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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10장 - 소유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지배하지 않기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10장 - 소유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지배하지 않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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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載營魄抱一,
재영백포일,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能無離乎!
능무리호!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專氣致柔,
전기치유,
기를 집중시켜 부드러움을 이루어
能嬰兒乎!
능영아호!
갓난 아기가 될 수 있는가?
滌除玄覽,
척제현람,
가믈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能無疵乎!
능무자호!
티가 없이 할 수 있는가?
愛民治國,
애민치국,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能無知乎!
능무지호!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天門開闔,
천문개합,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힘에
能無雌乎!
능무자호!
암컷으로 머물 수 있는가?
明白四達,
명백사달,
명백히 깨달아 사방에 통달함에
能無爲乎!
능무위호!
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生之,
생지,
도는 창조하고,
畜之,
축지.
덕은 축적하네.
生而不有,
생이불유,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爲而不恃,
위이불시,
지으면서도
지은 것을 내뜻대로 만들지 않고,
長而不宰,
장이부재,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네.
是謂玄德.
시위현덕.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1. 하늘의 무형의 기운이 떠나지 않을 때 나는 존속된다(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이 장은 성격이 매우 추상적이고 서술적이며 그 의미맥락이 매우 다양하여 편하게 해석이 되질 않는다. 물론 텍스트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고층대에 속하기 어려운 프라그먼트(fragment)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곽점 죽간(竹簡)에는 물론 나타나지 않지만, 놀라웁게도 백서(帛書) 을본(乙本)에 거의 왕본(王本)의 내용이 그대로 다 실려 있다. 약간의 문자의 출입(出入, 차이)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몸은 하늘과 땅의 묘합이다. 몸의 하늘을 혼(, , 훈몽자회)이라 부르고, 몸의 땅을 백(, , 훈몽자회)이라 부른다. 우리말에 혼났다.’ ‘넋 잃다.’ ‘넋이 빠졌다.’ ‘넋이 나갔다등의 표현은 잠시 혼이 백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훈몽자회()=,’ ‘()=이라 훈했는데 우리 고대말에서는 혼과 백이 그리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은 듯하다. 혼과 백이 분리되면(죽으면), 혼은 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제 고향인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무당들이 하늘에 제식을 올리고, 백은 장례자들이 땅에 묻는 것이다.

 

 

하늘 ()
()

 

 

()’은 고대인의 인체관에서 ()’와 상대되는 말인데, ()은 몸의 내부를 운영하는(영양을 공급하는) 영혈(營血)을 의미한다. ()는 몸의 밖으로부터 보위()하는(주로 면역작용과 관련) 위기(衛氣)를 의미한다. 즉 영위(營衛)는 기혈론(氣血論)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천지론(天地論)적 도식으로 설명하면 역시 영()은 땅[]이 되고 위()는 하늘[]이 된다.

 

 


immune
system
하늘

nutritional
mechanism

 

 

따라서 여기 재영백(載營魄)’은 모두 땅과 관련된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인간의 유형의 형체를 말한 것이다. ‘영백을 싣는다라는 뜻은 즉 내 이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하여 여기 ()’이란 유형(有形)이 아닌 무형자(無形者), 포괄적인 도()의 별칭(別稱)이다. 태일생수(太一生水)에서 말한 태일(太一)’이다. 그러므로 나는 암암리 영백(營魄)이 땅의 함의가 강함으로 ()’을 하늘의 뜻으로 대비시켰다. 인간의 신적(神的)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능무리호(能無離乎)?’라는 것은 ()이 영백(營魄)에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다. 우리는 어차피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이 비계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비계덩어리와 하늘의 무형의 기운이 같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만 존속되는 것이다. ‘()’이란 우주 전체, 즉 태일(太一)의 기운이다. 이 전체의 기운을 내가 끊임없이 받을 때만이 나는 생동할 수 있는 것이다.

 

 

2. 늙지 말고 항상 어린애 같은 몸을 유지하자(專氣致柔, 能嬰兒手)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단전호흡이나 국선도(仙道), 기공(氣功) 등의 원리가 다 여기 이 노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전기(專氣)’()를 오로지 한다라는 뜻으로 내 몸의 기()를 전일(專一)하게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운영이 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특히 우리가 먹는 것, 성생활하는 것, 자는 것, 식색(食色)의 모든 것을 깨끗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 세태와 같이 음식점에서 화학조미료를 퍼넣고, 남의 침이 묻은 더러운 반찬을 계속 회전시키고, 그릇을 하이타이로 적당히 씻고, 온갖 유전자조작 식품으로 요리를 하는 식생활환경 속에서는, ‘()를 전일(專一)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일 아침 단전호흡학원에 나가 온갖 수련을 다해도 낮에는 더럽게 외식(外食)하고 저녁에는 주색(酒色)에 곯아버리는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전기(專氣)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치유(致柔)’. 내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은 내 몸의 삶의 부분을 죽음의 부분이 이기고 있다는 증표이다. 전기(專氣)는 오로지 내 몸이 부드러움[]에 이르는[] 현상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허리가 부드럽고, 목이나 온갖 관절이 자유롭게 돌아가며, 근육이 보들보들하면서 탄력성이 있는 몸, 그것을 우리는 어린애와 같은 몸[嬰兒]이라 부르는 것이다.

 

노자는 묻는다. 전기치유(專氣致柔)하여 영아(갓난애기)와 같은 몸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선민족이여! 늙지 말자! 항상 어린애 같은 몸을 유지하자!

 

 

3.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하여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라(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척제현람 능무자호(滌除玄覽, 能無疵乎)

 

여기 현람(玄覽)이란 우주적 거울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뜻할 것이다. 백서(帛書) 갑본(甲本)에는 람()()’으로 되어고, 을본(乙本)에는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자형으로 보아, 그릇에 물을 떠놓고 자기를 비추어 보는 형태의 갑골문(甲骨文)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물의 고요함이 이와 같이 맑게 비추거늘, 하물며 성인의 마음의 고요함이랴! 그것은 천지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귀감이요, 만물의 거울이다.

水靜猶明, 而况精神! 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鑒也, 萬物之鏡也.

 

 

이 구절이 바로 노자의 구절과 상통한다 할 것이다.

 

척제(滌除), 우리가 세척(洗滌)이란 말을 쓰듯이, 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씻어 한 티끌도 없이 하여[無疵] 만물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노자에게 이러한 대승기신론등지에서 말하는 불교(佛敎)의 심진여상적(心眞如相的) 통찰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 티끌도 없는 마음의 거울, 그래서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상도(常道)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언설상(言說相)을 떠나고, 명자상(名字相)을 떠나고, 심연상(心緣相)을 떠난 여여(如如)의 세계! 그것을 노자는 이미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애국치민 능무지호(愛民治國, 能無知乎)

 

()’의 본 뜻은 아낀다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은 그 사람을 아껴준다는 뜻이다.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드는 당사자야말로 무지무욕하여야 하는 것이다.

 

백서(帛書) 을본(乙本)에는 능무지호(能無知乎, 능히 무지할 수 있는가)능무이지호(能毋以知乎, 능히 지식[조작적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로 되어 있다. 백서(帛書)의 표현이 원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왕필(王弼)의 주()에도 能無以智乎. 則民不辟而國治之也.’로 되어 있다.

 

 

4. 남성적인 가치를 유지하며 여성적 가치를 유치할 수 있는가?(天門開闔, 能無雌乎)

 

백서(帛書) 을본(乙本)에는 천문계합 능위자호(天門啓闔, 能爲雌乎)?’로 되어 있다. 백서(帛書)가 정확하다. ‘무자(無雌)’위자(爲雌)’의 오사(誤寫)이다. 왕필(王弼) ()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암컷이란 본시 부르는데 응할 뿐 자기가 주창하지 아니하고, 무엇에 원인이 되어줄 뿐 자기가 능동적으로 하지 않는다. 천문이 열렸다 닫혔다 함에 능히 암컷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은, 곧 만물이 스스로 질서 지우며, 그 처함이 스스로 편안해짐을 말한 것이다.

雌應而不倡, 因而不爲. 言天門開闔能雌乎. 則物自賓而處自安矣

 

 

암컷[]무위(無爲)의 덕성의 상징이다.

천문개합(天門開闔)’을 왕필(王弼)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하늘의 문이란, 천하의 모든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일컫는다. 개합이란,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열렸다가 어떤 때는 닫히면서 하늘 아래를 질서지운다. 그러므로 천문개합(天門開闔)이라 말한 것이다.

天門, 謂天下之所由從也. 開闔, 治亂之際也. 或開或闔, 經通於天下, 故曰天門開闔也.

 

 

왕필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여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이러한 추상적 주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분명히 여성()의 문제이다. 여성됨을 말하고 있고, 이것은 분명히 여체의 변화를 빌어 유기체적 우주의 생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천문(天門)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여체의 부분을 말한 것이다. ‘하늘의 문,’ 그것은 여체에 있어서의 만물의 생성의 문이다. 그것은 곧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이라는 표현과 성기의 이미지와의 상성은 리얼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천문개합(天門開闔)’이란 바로 고대 여성들에게서는 아주 명료하게 나타났던 에스트루스 성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배란기며, 자궁에 있어서의 증식기(에스트로겐 지배기)와 분비기(프로게스테론 지배기)가 엇갈리는 때인 것이다. 이때는 외음순(labia majora and minora)이 도톰하게 되면서 핑크빛이 더 돌고, 검으티티한 색깔이 나면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사향과 같은 냄새의 발동이 심해진다. 그리고 음순과 크리토리스가 뻑뻑해지고 뿌듯해지면서 성욕이 발동하고 입술과 입술 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구멍이 열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가 소위 말하는 천문(天門)이 개()하는 시기인 것이다. 멘스트루알 싸이클(menstrual cycle, 월경주기)에 있어서 그 반대되는 시기가 합()의 시기(황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시기)가 될 것이다. 여자의 몸의 천문(天門)이 개합(開闔, 열렸다 닫혔다)하는 것이 곧 생성(生成)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달의 기울고 차는 모습, 계절의 변화. 태일생수(太一生水)말대로 조습(燥溼)ㆍ열창(熱凔)의 변화가 모두 생성(生成)의 시간이요 리듬인 것이다. 그러한 리듬의 흐름 속에서 지배적이고 조작적인 남성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이며 순응적인 여성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노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노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삶의 숙제들인 것이다.

 

 

5. 지식의 경지에 이르며 백치 같은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나?(明白四達, 能無爲乎)

 

명백(明白)’이란 외계사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사달(四達)’이란 사방에 통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능무위호(能無爲乎)?’백서(帛書) 을본(乙本)능무이지호(能毋以知乎)?’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명백하게 사물을 인식하여 사통팔달하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면서도, 지식을 사용함이 없는 그러한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냐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왕필자신의 주()능무이위호(能無以爲乎)?’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조작적인 함[]으로써 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왕필 본()은 이 구절이 본시 능무이위호(能無以爲乎)’였을 것이다. 따라서 백서(帛書) 을본(乙本)과는 그 전승이 다른 것이다.

 

 

6. 덕이란 반드시 축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生之, 畜之)

 

왕필은 생지(生之)’에 대해서는 그 근원을 막지 않는다[不塞其原也].’라는 주를 달았고, ‘축지(畜之)’에 대해서는 그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다[不禁其性也].’라는 주를 달았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이 문맥의 흐름에서 너무 돌연하게 들어와 있음으로 착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백서(帛書)의 발굴로 과거에 착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구절들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생지 축지(生之, 畜之)’는 결코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강령이요, 중용(中庸)과 같은 기타 유가문헌과도 연속적 관계에 있는 매우 중요한 사상을 반영하는 명구절이다.

 

생지(生之)’란 도()의 측면을 말한 것이요, ‘축지(畜之)’란 덕()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란 보편자요, 우주적 원리요, 상대적 언어개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이다. ()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바로 이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생성력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의 작용은 ()’에 있다. ‘()’이란 곧 창조력(Creativity)’이다. 그런데 생에다가 갈 자를 붙인 것은, ()이 일시적 고정적 창조가 아니요,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창조력(Creative Creativity)이다. 창세기의 하나님처럼 이 세계를 월ㆍ화ㆍ수ㆍ목ㆍ금ㆍ토에 하루 하루씩 창조하고 힘이 겨워 하루를 쉬어야 하는(일요일) 그런 고정된 시점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의 과정이다. 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있어라하고 명령하는 로고스가 아니요, 말씀이 아니다. 도는 끊임없이 생성하는 우주의 과정이다. ()에 지()를 붙임으로써 그러한 진행형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런데 덕()이라는 것은 바로 개별자의 문제다. 왕필은 덕()을 일

컬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德者. 得也.

 

()이요, ()얻음이다. 얻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라는 보편자의 생성(生成)의 모습에서 내가 얻어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 내가 얻어 가지는 것, 이것을 송명(宋明) 유학자ㆍ조선조의 유생들은 분수(分受)’라고 표현했다. ()라는 보편자에서 나 도올이라는 개별자가 얻어 가지는 것, 그 얻음이 곧 나의 (Virtue)인 것이다(23, , 의 논의를 참조하라).

 

나의 덕은 곧 내가 도()로부터 분수(分受)받은 것, 내가 얻어 가진 것이다. 서양말의 이 버츄(Virtue, Tugend)에 해당되는 희랍어는 아레테(aretē)’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레테는 모든 사물(개별자)이 그 나름대로 가지는 좋은 상태(agathos)’를 의미한다. 이 좋은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기능, 즉 노자가 말하는 용(, ergon), 즉 특유의 기능(oikeion ergon)과 관련된 말인 것이다. 이러한 기능의 훌륭한 상태, 영어로 엑셀런스(excellence)’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훌륭함,’ ‘좋음이 곧 덕()인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말한다. ()이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畜之

 

()이란 덕()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것은 내 몸에 쌓는 과정(accumulation process)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느질 하나도 어려서부터의 축적이 없으면 그 엑셀런스(훌륭함)에 도달할 수 없다. 밥짓는 것 하나도 오랜 시간의 축적된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 역시 일시의 축적이 아니요, 끊임없이 축적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역동적 과정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갈 자를 붙인 것이다.

 

생지 축지(生之, 畜之).’이 한 구절은 노자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며,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단순한 함이 없음이 아니라 축지(畜之)’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된 훌륭함(aretē)의 덕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편자 生之 creative
creativity
인간
Man

우주
Universe
개별자 얻음 畜之 accumulation

 

 

7. 소유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지배하지 않기(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버트란드 럿셀이 이 세 구절을 소유없는 생산(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자기 주장없는 행동(action without self-assertion)’, ‘지배없는 발전(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으로 번역한 것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다.

 

위이불시(爲而不恃)’를 간본(簡本)에 쓰여져 있는 대로 위이불지(爲而弗志)’로 고쳐 풀이한다면, 럿셀의 자기 주장대로 휘몰아 가지 않는 행위(action without self-assertion)’라는 번역의 의미가 그 정확한 원의를 반영하고 있다할 것이다. 그런데 백서(帛書)에는 위이불시(爲而不恃)’가 빠져 있다.

 

 

8. 유비는 현덕의 덕성을 소유했다(是謂玄德)

 

현덕(玄德)’하며는 삼국지의 한 주인공이 떠오를 것이다. 촉한(蜀漢)의 건국자, 벡제성(白帝城)의 패주로 비운을 맞게 되는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 161~223)! 그의 현덕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노자이 구

절에서 따온 것이다. 왕필의 주석을 한번 보라!

 

 

그 근원을 막지 아니하니 만물은 스스로 생한다. 그러니 뭔 공을 운운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본성을 억압하지 아니하니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운다. 그러니 뭘 기댈 건덕지가 있겠는가? 만물은 자기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족함을 얻는다. 만물은 결코 나의 주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덕은 있으면서도 주재자 하나님이 있지 아니하니 어찌 가믈타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不塞其原, 則物自生, 何功之有. 不禁其性, 則物自濟, 何爲之恃. 物自長足, 不吾宰成, 有德無主, 非玄而何.

 

대저 가믈한 덕(玄德)이라 하는 것은 주재함이 없이 그윽한 데서 스스로 그 덕성이 우러나오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凡言玄德, 皆有德而不知其主, 出乎幽冥.

 

 

왕필의 주석대로 유현덕은 현덕 그 이름에 걸맞은 덕성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타인을 주재(지배)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충직하도록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란 곧 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현덕(玄德)의 지혜다. 그래서 제갈공명과도 같은 천하(天下)의 지혜인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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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10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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