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三十輻共一轂, 삼십복공일곡, |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
當其無, 有車之用; 당기무, 유거지용; |
그 바퀴통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
埏埴以爲器, 선식이위기, |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
當其無, 有器之用; 당기무, 유기지용; |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
鑿戶牖以爲室, 착호유이위실, |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
當其無, 有室之用. 당기무, 유실지용. |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
故有之以爲利, 고유지이위리, |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
無之以爲用. 무지이위용. |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
1. 허의 이론을 담은 바퀴의 쓰임(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이 장은 노자의 허(虛, 빔)를 말할 때, 가장 잘 인용되는 유명한 장이다. 『노자』 라는 서물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장 중의 하나이지만, 죽간(竹簡)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장도 역시 그 성격이 추상적(abstract)이며, 매우 이론적(theoretical)이라 할 때, 역시 후대에 성립한 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서(帛書)에는 거의 왕본(王本)과 동일한 형태로 실려있다. 이 장의 대강의 뜻은 이미 넷째 가름에서 허(虛)를 말할 때 충분히 논술한 것이다. 넷째 가름을 안 본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가름을 읽고 이 장을 읽어야 할 것이다.
평소 이 구절은 내 머리 속에 명료한 그림을 그려놓지 못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들이 모두 삶의 공간을 의미하는데, 수레의 공간이라고 하면 일차적으로 사람이 타는 곳을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 이 문장은 전혀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요즈음 내 생각으로는 ‘유거지용(有車之用)’의 거(車)는 실제적으로 ‘수레바퀴’의 의미로 새겨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복(輻)’이란 수레의 바퀴살이다. 지금도 자동차는 우리 삶의, 없어서는 아니 되는 주요한 주제를 형성하는 이기(利器)다. 자동차 모델만 바뀌어도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자동차는 자기 삶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기 삶의 생활방식이나 습관에 따라 자동차모델이 선택된다. 그리고 자동차는 한사람의 부나 권력의 표상이다. 초라한 소형 자동차! 삐까번쩍 하는 대형 자동차! 액센트와 에쿠우스는 역시 크나큰 신분의 거리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고전에는 수레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온다. 그것이 언급되는 상황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 수레에 대한 관심은 모두 바퀴에 모아져 있다. 그리고 이 수레의 가장 핵심적 부분이 바로 이 곡(轂, hub)이라는 것이다. 이 곡은 많은 바퀴살(輻, spokes)이 박히는 자리요, 또 축(軸, axis)이 끼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 바퀴의 살이 30개라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달구지, 똥구루마를 연상하면 살이 열 개정도면 끽일 것이다. 오늘 자전거 바퀴의 살 개수를 생각해봐도 육중한 수레의 바퀴 살이 30개라는 것은 좀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2. 30개의 바퀴살이 실물로 드러나다
진시황! 육국(六國)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동아시아역사에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운 정(政)! 13세에 진왕이 되었고 38세에 황제(皇帝)에 등극한 그는 인간적으로 아주 고독한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하남(河南)의 대상인(大商人) 여불위(呂不韋)가 사랑하는 애첩에게 임신시켜, 몰래 자초(子楚, 후의 莊襄王)의 부인으로 들이어 정(政, 후의 진시황)을 낳았음으로, 진시황의 실부는 여불위(呂不韋)였다. 여불위는 이러한 음모로 상국(相國)이 되었고 중보(仲父)라 불리울 정도로 온갖 권세를 걸머지었지만, 결국 진시황은 실부 여불위(呂不韋)에게 자살의 독배를 마시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마도 진시황은 여불위(呂不韋)가 자기 실부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고독한 사나이는 지상의 모든 세계를 정복했다. 그가 정복해야 할 마지막 세계는 죽음의 세계였다. 그는 죽음의 세계, 저 지하의 세계에 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1974년 3월 29일,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임동현(臨潼縣) 서양촌(西楊村) 남쪽 여산(驪山) 자락에서 양지발(楊志發)이라는 한 시골청년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을 얻고자 내리친 곡괭이의 운명이, 그 어마어마한,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의 암흑의 세계의 모습을 두 밀레니엄 후에나 빛의 세계로 드러내게 한 것이다. 그 장쾌한 진송(秦俑, 陶俑)의 모습은 내가 여기 새삼 언급할 계제가 아니다.
진시황은 천하 사방(西方ㆍ北方ㆍ南方ㆍ東方)을 순행(巡幸)하였다. 결국 그는 다섯번째 순행길에 죽었다. 그는 어떠한 수레를 타고 다녔을까? 발굴팀들의 관심은 도용에서 수레로 옮아갔다. 1980년, 진시황제의 묘가 있는 서쪽 갱(坑)에서 드디어 두 개의 수레가 발견되었다. 동으로 만든 사두마차(銅車馬) 두 개가 발견 되었는데 흙더미의 압력에 일그러져 1500개 이상의 조각으로 부셔져 있었지만, 그 온전한 형태의 복원이 가능한 상태로 묻혀 있었기 때문에 2천여년이 지난 오늘 그 정교하고도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앞에 있는 1호 동거마는 입식(立式)의 전차(戰車, War chariot)이고, 뒤따라오고 있는 2호 동거마는 좌식(坐式)의 승객수송차(Passenger chariot)의 모습이다. 이것은 실물싸이즈의 반(半)으로 축소제작된 것인데 그 실물의 모습을 매우 정교하게 구현하고 있다. 1호 동거마의 경우, 높이가 1.68m, 말을 포함한 전체 길이가 2.25m에 이른다. 이 전차 안에는 많은 무기들이 실려있었는데 이것은 황제호위의 기능을 하였던 전차였을 것이다(a war chariot for the imperial guards).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이 두 동거마의 수레바퀴로 집중된다. 두 수레가 모두 놀라웁게도 정확하게 30개의 살[幅]이 일곡(一轂)에 박혀있는 모습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노자』의 문헌적 언급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닌, 당대의 실제 기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로서 수레바퀴가 30개의 바퀴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어 왔으나, 실제 30개의 살이 하나의 살통에 박힌 실제상황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동거마는 고대문헌의 언급이 결코 관념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 정교한 모습이 우리의 찬탄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3. 30개의 바퀴살이 꽂히려면 바퀴살통이 비어 있어야 한다
30개의 살이란 한 달을 30일 기준으로 생각한 월륜(月輪)의 시간을 의미한다. 즉 수레바퀴는 시간의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연륜(年輪)이 쌓인다’는 식의 표현도 바로 바퀴를 시간의 상징으로 생각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인도문명에서도 짜끄라(cakra, 輪寶)는 태양의 수레의 바퀴(the wheel of the Sun's chariot)를 의미하며, 곧 시간의 수레바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슈누(Vishnu) 신의 원반형의 무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적진에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분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인간의 번뇌를 최파(摧破) 시키는 지혜의 상징으로 쓰였고, 또 불교에서는 석존(釋尊)이 설파한 법(法)이 위광(威光)을 가지고 인세(人世)에 퍼져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법륜(法輪)으로 쓰였다.
그러나 노자의 관심은 참 해괴한 곳에 있었다. 30개의 바퀴살이 한 개의 바퀴살통에 꽂힐려면 그 바퀴살통의 속이 비어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 빔의 지혜를 하필이면 살통[轂]의 속의 빔에서 찾으려 했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노자는 바로 그 곡(轂)의 속의 빔에 곧 수레의 쓰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때의 수레란 곧 바퀴[輪]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허(虛)가 있기 때문에 삼십복(三十輻)이 곡(轂)을 공유할 수가 있고, 또 그 빈 곳으로 축(軸)이 지나갈 수 있어 수레 전체의 ‘굴름’이란 현상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왕필(王弼)은 이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살통이 30개의 살을 능히 통일할 수 있는 것은 그 빔 때문이다. 그 빔으로써 사물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능히 적음으로써 많음을 통어(統御)할 수 있는 것이다.
轂所以能統三十輻者, 無也. 以其無能受物之故, 故能以實<寡>統衆也.
왕필에게 있어서는 살통의 의미가 살을 통괄한다고 하는 기능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그 기능을 그 원심의 빔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북극성이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인다[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고 한 의미와 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십복(三十輻)이 일곡(一轂)을 공유(共有)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 곡의 중심의 빔의 자리가 삼십복(三十輻)을 돌리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곡의 중심의 빔은 무(無)의 세계요, 삼십복(三十輻)은 곧 시간의 변화선상에서 현상(現象)하고 있는 유(有)의 세계의 상징이다.
無(빔) | 有(현상) |
一轂 | 三十輻 |
4. 빔은 곧 있음의 쓰임이다(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선(埏)이란 우리말로 ‘이긴다.’ ‘빚는다’의 뜻이다. 식(埴)이란 ‘찰흙’이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가공된 최후의 흙을 도공들은 ‘질’이라고 부른다. 식(埴)은 곧 ‘질’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무(無)’는 ‘없음’이 아니라, ‘허(虛, Emptiness)’를 의미한다. 그 빔[無]을 당(當)하여, 기(器)의 쓰임[用]이 있다고 했으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는다.
無(Nothingness) = 虛(Emptiness) = 用(Function)
없음(無)은 곧 빔(虛)이요, 빔은 곧 있음(有)의 쓰임(用)이다.
착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호(戶)’는 자형을 보아 쉽게 알 수 있듯이 여닫이 문의 반쪽이다. 그것이 두 쪽이 다 갖추어지면 ‘문(門)'이 된다. ‘유(牖)’는 ‘창’이다. 호(戶)는 ‘door’로 유(牖)는 ‘window’로 영역될 것이다. ‘착(鑿)’은 원래 ‘끌질하다(to chisel)’는 동사이다.
5. 존재의 이유는 이(利) 때문이다(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있음의 이(利)됨은, 없음의 용(用)됨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동양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모든 존재[有]는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利)로움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로움은 없음(빔)의 쓰임[用] 때문인 것이다.
有 | → | 利 |
↑ | ||
無 | → | 用 |
이 장은 전체적으로 허(虛)의 존재론인 동시에 도의 생성론을 말하는 매우 이론적인 장으로서 잘 인용되고 있으나, 그 성격으로 보아 후대에 정리된 느낌이 강하다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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