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視之不見, 名曰夷; 시이불견, 명활이; |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고, |
聽之不聞, 名曰希; 청지불문, 명왈희; |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 하고, |
搏之不得, 名曰微. 박지부득, 명왈미. |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 한다. |
此三者, 不可致詰, 차삼자, 불가치힐, |
이ㆍ희ㆍ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
故混而爲一. 고혼이위일. |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
其上不皦, 其下不昧. 기상불교, 기하불매. |
그 위는 밝지 아니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없는 데로 돌아가니 |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다. |
是謂惚恍. 시위홀황. |
이를 일컬어 홀황하다 하도다. |
迎之不見其首, 영지불견기수, |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
隨之不見其後. 수지불견기후. |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
옛의 도를 잡어 오늘의 있음을 제어한다. |
能知古始, 능지고시, |
능히 옛 시작을 파악하니 |
是謂道紀. 시위도기. |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라 한다. |
1. 혼돈과 카오스
이 장은 『노자』 전 텍스트 중에서도 아주 이론적이고, 매우 인식론적이며, 형이상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주 깊이 있는 장이다. 이런 장이 죽간(竹簡)에 있겠는가, 없겠는가? 물론 14장은 죽간(竹簡)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서(帛書)에는 거의 그대로 다 들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장의 깊이를 사랑한다. 노자철학을 만들어 간 사람들의 아주 조직적인 통찰력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이 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꼭 알아야 할 고사가 하나 『장자(莊子)』라는 책에 실려있다. 물론 『장자(莊子)』의 이런 고사도 『노자』의 14장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동양인의 인식론, 그리고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에게 고유했던 인간의 세계인식 방법, 그리고 인간의 감관(sense organs)에 대한 생각의 전형을 이 고사를 통해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장자(莊子)』의 니편(內編)의 제일 마지막 편인 제7편 「응제왕(應帝王, Fit for Emperors and Kings)」이 끝나는 부분에 이 ‘혼돈(渾沌)’의 고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보통 현재 우리 한국말로 ‘혼돈(渾沌=混沌)’이라고 하면, 어지럽고 정돈안되고 정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혼돈스럽다는 것은 즉 무질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고전, 특히 도가 계열의 책속에서 이 ‘혼돈’이라는 말은 그렇게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 말이 아니다.
희랍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있는 세계를 ‘코스모스(kósmos)’라고 불렀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500 B.C.)가 제일 먼저 사용했는데, 그것은 수학적 비례의 질서, 조화(harmonia)를 갖춘 세계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러한 코스모스에 반대되는 말이 ‘카오스" (chaos)이다.
코스모스 | 질 서 | 희랍철학의 중점 |
카오스 | 혼 돈 | 노자철학의 중점 |
그런데 사실 ‘카오스’라는 의미는 희랍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도, 그것은 단순한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코스모스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규정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카오스의 상태보다, 물론 가치론적으로 코스모스의 상태를 더 우위에 놓는다. 희랍인들은 카오스에 대해서 코스모스(질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기본적으로 코스모스보다 카오스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노장사상은 한 마디로 카오스의 철학인 것이다. 희랍인들이 말하는 카오스가 바로 『장자(莊子)』에게서 ‘혼돈(渾沌)’이라는 말로 나타나고, 그것은 일반명사가 아닌 신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2. 혼돈에 일곱 구멍을 뚫는 순간?
거대한 바다, 『태일생수(太一生水)』가 말하는 물의 세계! 저 남쪽바다에는 숙(儵)이라는 이름의 신이 살고 있었고, 저 북쪽바다에는 홀(忽)이라는 이름의 신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ㆍ북을 가릴 수 없는 그 중앙 한가운데 혼돈(渾沌)이라는 신이 살고 있었다.
北海之帝 | 忽 |
中央之帝 | 渾沌 |
南海之帝 | 儵 |
어느 날 이 홀과 숙이 혼돈신의 땅인 중앙에서 만나 놀게 되었다. 그런데 중앙의 신인 혼돈이 이 홀과 숙을 극진하게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홀과 숙은 어떻게 이 혼돈신의 융숭한 대접에 보답할 수 있는가를 의논하였다[儵與忽謀報渾沌之德]. 그들은 기나긴 숙고 끝에 아주 기발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시 사람들은 얼굴에 일곱구멍이 있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다[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 그런데 혼돈신에게는 이러한 구멍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여기 일곱구멍이란 눈구멍 두 개, 귓구멍 두 개, 콧구멍 두 개, 입구멍 하나를 뜻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생각한 시각+청각+후각+미각의 감각기관을 총칭하는 것이다. 즉 희랍인들이나 인도인들은(모두 인도 아리안 계열) 인간의 감관을 眼(시각)ㆍ耳(청각)ㆍ鼻(후각)ㆍ舌(미각)ㆍ身(촉각)의 5관(Five Senses)이라고 개념적으로 생각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5관이라는 개념 대신 ‘일곱구멍[七竅]’이라는 내(內)ㆍ외(外) 통로개념의 현상적 인식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홀과 숙은 혼돈의 신에게, 자기들이 감관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미루어, 일곱구멍을 선사하는 것이 최대의 보답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곱구멍을 뚫어주기로 작정했다[此獨無有, 嘗試鑿之]. 그런데 일곱구멍을 하루에 한꺼번에 뚫게 되면 무리가 될 것 같아, 하루에 한 구멍씩만 뚫기로 했다. 드디어 하루에 한 구멍씩 뚫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구멍씩! 하루에 한 구멍씩! 자아 어떻게 될까? 중앙의 혼돈의 신은 이제 못 인간이 누리는 감관의 쾌락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인가? 드디어 구멍이 열릴 것인가? 모든 구멍이 다 열린 일곱째 날, 혼돈은 죽고 말았다[七日而渾沌死].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장자(莊子)』의 신화의 마지막 말이다.
3. 노자가 말하는 도의 세계(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창세기」의 하나님은 첫날 빛을, 둘째 날 하늘을, 셋째 날 마른 땅과 푸른 움을, 넷째 날 밤과 낮을,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여섯째 날 온갖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편안히 쉬셨다.
이 『장자(莊子)』의 설화가 말하는 일곱구멍의 창조는 거의 「창세기」의 창조신화와 맥을 같이 한다. 일곱구멍을 뚫는다 함은 곧 일곱구멍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계의 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 신은 일곱째 날 편히 쉬셨는데, 「응제왕(應帝王)」의 혼돈의 신은 일곱째 날 죽음을 맞이했다. 즉 코스모스의 창조는 카오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코스모스의 질서의 탄생의 기쁨이 아닌 혼돈의 죽음의 비극적 장송곡(葬送曲)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남해(南海), 북해(北海)에 대하여 ‘중앙(中央)’이란 설정부터가 재미있다. 이곳은 바로 우리가 논의해온 ‘허(虛)’ 즉 ‘무위적(無爲的) 질서’의 상징이다. 중앙(中央)이란 곧 무규정성(the Unconditioned)을 의미하는 것이요, 무한한 가능태를 의미한다. 중앙의 혼돈의 신에게 일곱구멍이 없다는 것은, 곧 일곱구멍으로 파악되는 코스모스(질서) 이전의 어떤 원초적 카오스가 그에게 충만한 가능성으로서 생동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ㆍ북의 규정된(the Conditioned) 신들은 그에게 바로 그 규정성의 상징인 일곱구멍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구멍의 뚫음은 곧 카오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나 노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감관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감관적 세계의 거부! 그리고 혼돈의 질서에로의 회귀를 이 신화는 강력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바로 이 칠규(七竅, 일곱구멍)의 비극인 것이다.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세계는 이러한 칠규의 한정성이나 욕망 이전의 진실임을 명료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혼돈신(God Chaos)의 세계야말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이 희미의 세계인 것이다. 이(夷)ㆍ희(希)ㆍ미(微)는 그 의미상으로 보면, 튀쳐남이 없이 평탄하고[夷], 희박하고 가물가믈하며[希], 미묘하다[微]는 뜻을 내포하지만, 이 세 글자가 모두 같은 운(韻)을 밟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이희미’의 세계야말로 가물가믈하고 미묘한, 명료한 인간의 감관인식이 미칠 수 없는, 그 이전의 혼돈의 상태인 것이다. 이(夷)는 무색(無色)의 세계며, 희(希)는 무성(無聲)의 세계며, 미(微)는 무형(無形)의 세계인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세계 | ||
夷 | 希 | 微 |
튐 없이 평탄함 | 희박하고 가물가믈함 | 미묘함 |
無色의 세계 | 無聲의 세계 | 無形의 세계 |
인간의 감관인식이 미칠 수 없는, 그 이전의 혼돈의 상태 |
4. 혼돈이란 지적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이 이(夷)ㆍ희(希)ㆍ미(微) 삼자(三者)의 세계는 치힐(致詰)될 수 없다. 그것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치힐(致詰)’이란 카오스는 지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대 영미분석철학적인 논리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의 세계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애호하는 사상가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이야말로 20세기 도가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희미’ 3자는 하나하나 분석되어 따져질 수 없음으로[不可致詰], 그것을 뭉뚱그려[混] 하나로 만든다[爲一]라고 했을 때 ‘뭉뚱그린다’라는 단어가 바로 ‘혼돈(渾沌)’의 ‘혼(渾)’자인 것을 생각하면 혼돈신화의 배경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로 만듬(爲一)의 하나(一)는 곧 중앙(中央)이요. 혼돈(渾沌)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적 인식으로 분석되기 이전의 온전한 전체(the holistic Whole)인 것이다. 하나(一)가 곧 도(道)요, 그것이 곧 『태일생수(太一生水)』의 ‘태일(太一)’인 것이다.
5. 이원론을 해체하며 말하다(其上不皦, 其下不昧)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도 여기의 기상(其上), 기하(其下)라는 표현은 「계사」의 형이상자(形而上者), 형이하자(形而下者)와 같은 맥락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기상(其上), 기하(其下)는, 도라는 물체가 있고 ‘그 위’, ‘그 아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라는 ‘일(一)’은 전체며, 전체는 곧 그 밖의 상(上)ㆍ하(下)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따라서 상(上)ㆍ하(下)는 도(道)라는 일자(一者) 내의 사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내(道內)의 상(上)ㆍ하(下)의 구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상(上)은 분명히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세계며 따라서 어두울 것이요, 그 하(下)는 분명히 우리에게서 가까이 있는 세계며 밝을 것이다.
上 | 어둡다 |
下 | 밝다 |
그러나 상(上)은 어둡고[昧], 하(下)는 밝다[皦]라고 하면 이러한 표현에 있어서는 상(上)과 하(下)의 이분적(二元的) 분할(dualistic separation)이 일어나 버린다. 이러한 이원적(二元的) 분할을 막는 표현은 바로 양자를 엇물리게 하는 부정의(neti) 방법으로 양자를 비실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표현은 이와 같이 바뀐다.
上 | 밝지 않다 |
下 | 어둡지 않다 |
이러한 방식으로 노자는 철저하게 이원론의 오류(the Fallacy of Dualism)를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6. 시공의 전체는 하나의 연속태다(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그 위가 밝지 않고[不皦], 그 아래가 어둡지 않은[不昧] 도는 시공(時空)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요, 이 시공의 전체란 하나의 연속태이다. 그것은 스페이스ㆍ타임 콘티니엄(Space-Time Continuum)이며, 그것은 라이프 콘티니엄(Life Continuum)이다. 이러한 콘티니엄을 노자는 ‘승승(繩繩)’이라는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승승’이란 새끼줄이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이다. 이미 6장 곡신불사(谷神不死)장에서 ‘면면(緜緜)’이라는 말로 언급한 적이 있다.
6장 | 緜緜若存 |
14장 | 繩繩不可名 |
연속체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다[若存]. 그리고 그것은 시공의 구현의 가능태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개념적 언어로 이름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연속태(Continuum)는 구체적 물(物)적 존재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무물(無物)’이다. 다석(多夕) 선생은 ‘무물(無物)’을 ‘없몬’이라 번역하셨는데, 좀 억지스러운 우리말 번역이다. ‘무물(無物)’이란 구체적 물상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모든 물(物)의 가능태이다.
7.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다. ‘무상지상(無狀之狀)’, ‘무물지상(無物之象)’이라는 표현은 노자의 파라독스를 잘 표현하는 말로서 너무도 잘 인용되고 있다. 모습이 없으면 모습일 수 없다. 그런데 노자는 모습없는 모습을 말한다. 물체가 없으면 형상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노자는 물체없는 형상을 말한다. 그것은 모습이 없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요, 모습이 있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습이 없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모습이요, 그것이 곧 모습이 있는 것이다. 모습이 없는 것이 곧 모습이 있는 것이요, 모습이 있는 것이 곧 모습이 없는 것이다. 어느 일곡(一轂)에 치우칠 수 없다.
이것은 현대 양자역학의 이론들이 말하는 제 현상을 잘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요,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다. 왕필(王弼)은 앞의 6장과 이 14장에 이러한 존재론의 거부에 관한 재미있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6장의 주석은 앞서 해설한 바 있다.
6장 | 欲言存邪, 則不見其形, 欲言亡邪, 萬物以之生. 故綿綿若存也. |
14장 | 欲言無邪, 而物由以成. 欲言有邪, 而不見其形. 故曰無狀之狀, 無物之象也. |
14장 왕필주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없다고 말하려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고, 있다고 말하려 하면 그 형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말한 것이다.
欲言無邪, 而物由以成. 欲言有邪, 而不見其形. 故曰無狀之狀, 無物之象也.
8. 노자와 한비자는 강조 부분이 다르다
이것과 관련되어 『노자』의 현존하는 최초의 주석자인 한비자(韓非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 「해로(解老)」 말을 인용하기 전에 우리는 여기 텍스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글자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글자는 바로 ‘무물지상(無物之象)’의 ‘상(象)’이라는 글자다. 이 상(象)에 대한 한비자(韓非子)의 해석은 오늘날 카씨러가 말하는 ‘상징성(Symbolism)’에 관한 모든 논의의 인식론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象)’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보통 코끼리 상 자라고 훈한다. 상아(象牙) 도장이니, 상아젓가락이니 하는 것을 기억하면 그 일상적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상(象)이라는 글자를 옆으로 뉘여보면 그것이 그 모습 그대로 이미 하나의 코끼리의 상형자임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그 상형자가 甲骨文에 정확히 나오고 있다. 甲骨文에 관해서는 최영애 지은 『漢字學講義』[통나무, 1995]를 참고할 것). 중국에는 고래(古來)로부터 코끼리가 있었다는 자연사적 사실을 이러한 글자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코끼리라는 뜻의 정확한 상형자가 어떻게 해서 ‘모습’ 즉 ‘심볼’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한비자(韓非子)는 너무도 기발한 주석을, 『노자』를 해석하면서 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코끼리를 직접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대개 죽은 코끼리 뼈를 얻어, 그 전체 도상을 그려보고, 그 산 모습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뭇 사람들이 의식으로써 상상해내는 것을 모두 일컬어 상(象, 심볼)이라 하는 것이다.
人希見生象也, 而得死象之骨, 案其圖以想其生也, 故諸人之所以意想者, 皆謂之象也.
지금 도는 비록 산 코끼리처럼 직접 보고 들을 수는 없어도, 성인은 그것의 드러난 공능을 잡아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노자가 말하기를 ‘모습없는 모습’이요, ‘물체없는 형상’이라 한 것이다.
今道雖不可得聞見, 聖人執其見功以處見其形, 故曰: “無狀之狀, 無物之象”
한비자(韓非子)의 법가적 현실주의는 노자의 해석에 있어서 조차도 역력하다. ‘무상지상(無狀之狀)’이라는 아이러니칼한 표현속에서 노자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무상(無狀)’에 있다. 그러나 한비자(韓非子)의 강조점은 무상(無狀)이 아닌 ‘상(狀)’에 있는 것이다.
노자의 강조 | 한비자의 강조 |
無狀之 | 狀 |
그러나 이 한비자(韓非子)의 주석에 있어서 놀라운 것은 ‘상(象)’을 ‘의상(意想)’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적 물체의 모습(physical shape)이나 형태를 즉물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식으로 구성한 심볼릭 레퍼런스(symbolic reference)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진철학의 한 도약이다. 즉 즉물적 형체의 개념에서 비즉물적, 이념적 상징성으로 비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개념이, 한비자(韓非子)의 철학에 있어서 ‘리(理)’라는 개념과 연결이 되고, 또 이것이 바로 후대의 송명유학 이기론(理氣論)의 남상(監傷)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기억해둠직 하지만, 이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주제임으로 여기 그 일단을 시사하는 것만으로 그치는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9. 선후의 시간이 해소되는 시간 이전의 상태가 홀황이다(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황홀(恍惚)’이라는 말이 원래 『노자』라는 텍스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황홀’이나 ‘홀황’이나 중복되는 의미의 형용사적 단어의 배열의 문제일 뿐,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다(21장 참조).
그런데 우리가 보통 ‘황홀’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신체에 퍼져 있는 신경의 말단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s)의 자극에 의한 어떤 변화된 의식의 상태(a state of altered consciousness), 즉 우리가 흔히 트란스(trance)라고 부르는 몽롱한 느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의식이나 인지 능력의 저하를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주변의 인지가 감소되는 어떤 특정한 포카스의 과도한 집중(heightened focal awareness)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황홀’이란, 매우 우주론적인 기술(cosmological description)이다. 상ㆍ하와, 밝음ㆍ어두움이 구분되지 않는 토탈한 우주의 상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비존재[無物]의 상태, 모습없는 모습의 그 근원적 인식을 가리켜 ‘황홀,’ ‘홀황’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의식에 명료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모든 명언(名言) 이전의 무차별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적 해탈도 하나의 ‘황홀’이다. 그래서 그것은 앞에서 맞이하여도[迎之], 그 머리를 볼 수가 없고[不見其首], 뒤에서 따라가도[隨之]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不見其後]. 선ㆍ후의 시간조차가 해소되는 그 시간 이전의 상태를 노자는 ‘황홀’이라 표현한 것이다.
10. 근원을 파악함으로 말류적 현상을 포섭하라(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옛 길을 잡아 지금의 현존재(有)를 콘트롤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하는 생각일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도 오늘이 곧 과거의 역사라는 뿌리에서 내려온 연장상태라고 한다면 그 근원이 되는 과거역사를 배워 오늘의 문제를 파악한다 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치수(治水)를 할 때도 아무리 말류(末流)에서 제방공사를 해봤자 곧 터지고 말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항상 그 근원(根源)부터 물흐름을 잡아나가야 할 것이다.
고지도(古之道)를 취하여 금지유(今之有)를 어(御)한다는 것, 노자의 도(道)에 대한 생각을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즉 도(道)는 드러나는 만물(萬物)의 말류적(末流的) 현상에 대해 보다 본원적인 원류적(原流的)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하나의 텍스트의 문제가 발생했다. 백서(帛書) 갑(甲)ㆍ을(乙)본에 모두이 구절이 명확하게 다르게 쓰여있는 것이다.
王本 |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
甲本 |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
乙本 |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
갑(甲)ㆍ을본(乙本)이 일치하는 상황에서 ‘집금지도(執今之道)’의 금(今)이 고(古)의 오사(誤寫)일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다시 말해서 백서 『노자』 본의 명료한 의미는 ‘오늘의 도(道)를 잡아, 오늘의 유(有)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즉 『노자』 원텍스트에는 ‘고지도(古之道)’라고 하는 ‘복고적,’ ‘근원 회고적’ 시간개념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도(道)와 유(有)의 관계가 꼭 고(古)와 금(今)의 관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古)와 금(今)의 시간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 해도 도(道)와 유(有)의 관계는 이미 근원과 말류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본(王本)은 다음에 나오는 ‘고시(古始)’라는 전제 때문에, ‘금지도(今之道)’를 ‘고지도(古之道)’로 바꾸어 그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서본(帛書本)으로 추정해 보건대 노자의 원래 의도는 금지도(今之道)를 잡아, 금지유(今之有)를 제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시(古始)를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보다 역동적인 의미 맥락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구절의 첫 시작이 되는 접속사가 매우 중요하다.
王本 | 能知古始, 是謂道紀. |
乙本 | 以知古始, 是謂道紀. |
왕본(王本)은 그 앞에서 일단 문맥을 끊고, ‘능(能, 할 수 있다)’으로 접속시켰지만, 을본(乙本)은 앞의 문맥을 받아 ‘그렇게 함으로써’라는 뜻의 ‘이(以)’로 접속시킨 것이다. 그러나 하여튼 이 장의 최종적 결론은 명료하다.
古 始 (옛 시작) |
= | 道 紀 (도의 벼리) |
‘옛시작’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도의 벼리’인 것이다. 시간에 대한 통관적 이해가 없이, 우리는 오늘의 질서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존재의 역사를 알라! 그리고 그 근원을 파악하라! 그 근원의 파악으로부터 모든 말류적 현상을 포섭해야 하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서 도의 벼리(道紀)가 다 찾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입력된 사태의 출력일 뿐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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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13장 - 고통과 환란을 귀하게 여기라 (0) | 2021.05.09 |
노자와 21세기, 12장 -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려 하지 않는다 (0) | 2021.05.09 |
노자와 21세기, 11장 - 빔은 곧 있음의 쓰음이다 (0) | 2021.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