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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13장 - 고통과 환란을 귀하게 여기라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13장 - 고통과 환란을 귀하게 여기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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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寵辱若驚,
총욕약경,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다같이 놀란 것 같이 하라.
貴大患若身.
귀대환약신.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何謂寵辱若驚?
하위총욕약경?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다같이 놀란 것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寵爲下,
총위하,
총애는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得之若驚,
득지약경,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失之若驚,
실지약경,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是謂寵辱若驚.
시위총욕약경.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何謂貴大患若身?
하위귀대환약신?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及吾無身, 吾有何患!
급오무신, 오유하환!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
고귀이신위천하,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若可寄天下;
약가기천하;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愛以身爲天下,
애이신위천하,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에게
若可託天下.
약가탁천하.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1. 회남 왕국의 지식인들이 지은 새옹지마(寵辱若驚)

 

항우(項羽)에게 패잔의 고배를 마시게 한 한고조 유방(劉邦, 256~195 B.C.)의 서자 유장(劉長)의 아들 중에 유안(劉安, 179~122 B.C.)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고조 유방의 손자인 셈이다. 그 아버지 유장(劉長)은 모반을 일으켜 유배당하는 도중 죽었다. 10년 후 유안(劉安)은 아버지의 영토 일부를 계승받아 회남왕(淮南王)이 되었다.

 

이 회남왕 유안(리우안)은 대단한 박학지사였으며 문필(文筆)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이 회남왕 주변으로는 많은 문인(文人)과 임협지사(任俠之士)들이 모여 들었다. 형초(荊楚)의 구문화를 보수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이 회하(淮河)유역의 회남왕국에 모여든 이들은, 대부분이 한제국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이었고, 통일제국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방외인(方外人)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춘추제가의 잡학을 통일시키려는 패러다임에 반대하여, 기본적으로 도가사상을 중심축으로 해서 제자백가의 잡학을 통일시키려는 모종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남긴 책이 유명한 회남자(淮南子)라는 희대의 서물이다. 회남자(淮南子)는 노자철학의 한 역사적 발전이다.

 

이 책의 인간훈(人間訓)2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대저 화가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생하게 한 것이요, 복이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이룬 것이다. 화와 복이란 본시 한 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夫禍之來也 人自生之 福之來也 人自成之 禍與福同門

 

 

그리고 조금 지나 16을 보면, ‘변경 가까이 사는 사람으로 세상 이치에 밝은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近塞上之人, 有善術者……]’라는 구문으로 시작되는 한 고사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말하고 있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관용구의 출전이다. 인간만사새옹마(人間萬事塞翁馬)라는 표현도 있고, 새옹실마(塞翁失馬)라 하기도 하고, 새옹득실(塞翁得失)이니, 새옹화복(塞翁禍福)이니 하는 등등, 다양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2. 새옹(塞翁)과 노자 13

 

여기서 말하는 새옹(塞翁)은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시 고유명사는 아니다. ‘어느 변경요새에 살었던 세상을 달관한 늙은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새옹이야말로 바로 이 노자 13장의 정신을 구현한 한 역사적 늙은이(老子)였던 것이다.

 

이 새옹은 말을 잘 길렀다. 그리고 아주 사랑하는 애마가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애마가 홀연히 국경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것을 안 동네사람들()들이 그가 크게 상심하리라고 생각하여 애통한 마음으로 위문을 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그러나 새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화가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지금의 슬픔이 어찌 곧 기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此何遽不爲福乎!]”

 

수개월이 지났다. 새옹의 예언대로, 그 잃어버린 말이 북방 오랑캐지역의 아주 훌륭한 준마[胡駿馬]를 한 마리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잔치 분위기였다. 모두 들뜬 가슴을 안고 노인에게 경하를 하러 몰려왔다[人皆賀之]. 그러나 그 노인은 조금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또 차분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복이 내일의 화가 될 수도 있는 것, 지금의 기쁨이 어찌 곧 슬픔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此何遽不能爲禍乎!]”

 

그 새옹의 집엔 외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을 잘 길렀기 때문에 그는 말타기를 좋아했다. 새로 들어온 준마는 그에겐 너무도 싱싱한 매력이었다. 그 외아들은 어느 날 준마를 타고 달렸다. 그러다가 그만 낙마를 하고만 것이다. 비골[]이 크게 부러져 영영 다리병신이 되고 만 것이다. 온 동네가 상갓집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두 찾아와 노인의 슬픔을 위로했다[人皆弔之]. 그러나 새옹은 조금도 슬픈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화가 내일의 복이 될 수도 있는 것, 지금의 슬픔이 어찌 곧 기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리오?[此何遽不爲福乎!]”

 

그리곤 일년이 지났다. 그런데 변경의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들어왔다. 대 전쟁이 벌어졌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두 징발되어 나갔다. 그리고 열 중 아홉이 목숨을 잃었다[死者十九]. 그러나 새옹의 외아들은 다리병신이었기 때문에 징발되지 않았고, 부자(父子)가 다 제명을 보전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래서 회남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또 화가 복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불측하여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그 이치가 깊고 깊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새옹지마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쉽게 흘려 버릴 수 있는 한 고사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미래는 한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많다. 참을 수 없는 불운한 처지에 이유없이 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또 그러한 고통과 불운 속에서 예기치 못한 행운과 기쁨을 만날 수도 있다. 세속적으로 엄청난 행운과 성공을 거둔 자의 삶의 순간에 이미 불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수도 있다.

 

 

3. 내일의 보상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인내한다?

 

그런데 이 새옹지마의 고사는 기본적으로 노자13장의 총욕약경(寵辱若驚, 총애를 얻거나 욕을 얻거나 다 놀란 것 같이 하라)’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 행운()과 불운()에 대해 다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이해에 있어서 우리가 매우 조심할 것이 있다. 신약성서에 보면, ‘환난을 극복한다든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든가, ‘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핍박당하였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오늘의 환난을 내일의 영광으로 이끈다고 하는 역경 극복(to strive to overcome)’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야말로 서구적 가치관의 대표적인 것이고, 또 오늘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의 삶의 태도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팽배된 기독교적 가치관 속에서는 오늘의 이승에서의 고난을 잘 참아내면 내일의 저승(하늘나라)에서의 영광과 보상(Reward)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식의 고난극복 태도도 우리 삶에서 꼭 배제되어야 할 가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인과 요즈음 한국인의 생각은 너무도 천박한 것이다.

 

내일의 보상(Reward)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기기만적인 편협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설교의 수준이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의 첫 머리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의 중국적인 생각인 것이다.

 

오늘의 나의 고난 자체가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내가 스스로 지어낸 고난일 수 있다는 것이다[夫禍之來也, 人自生之]. 따라서 그것은 진짜 고난이 아닐 수도 있다. 순교자가 순교를 당하는 상황도 어찌 보면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연극적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 순교자 개인의 진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4. 불운이나 행운은 우리의 인식이 개념적 조작으로 만든 산물이다

 

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이 천하의 명언은, 나의 환난과 나의 영광 그 자체에 대한 나의 분별적 인식을 해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새옹(塞翁)의 담담한 인생 자세이다. 말을 잃어버리나 말을 얻으나, 복을 얻으나 복을 잃으나, 다 그것을 화ㆍ복이라는 인간의 가치술어로 이해하고 즐거워하고 애통해하지 않는 삶의 담박한 자세인 것이다.

 

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바로 노자2의 가치론에서 이미 연역되어 나오는 인생의 가치관인 것이다.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추함[]’일 수도 있고,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유()ㆍ무(), ()ㆍ이(), ()ㆍ단()이니 하는 따위의 우리의 상대적 개념 자체가 상보적 관계로서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운[]이니 행운[]이니 하는 따위가 근원적으로 우리 인식의 개념적 조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이야기를 근원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인생에서 오히려 많은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먼저 체크해봐야 할 것은 과연 이 환난이 진정으로 환난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관념이 만든 픽션이 아닌지? 대립하고 싸우기 이전에, 한 발짝 물러서면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지혜요, 구약의 욥의 지혜다. 욥은 터무니 없이 억울한 환난도 근원적으로 환난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욥기(the Book of Job)의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도 순수하게 노자적(老子的)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는 극기가 아니다. 지혜는 극기(克己)의 기()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내가 몸이 없는데 나에게 무슨 환난이 있으리오?

及吾無身, 吾有何處?

 

 

여기 무신(無身)’이라 함은 나중에 불교문학에 있어서는 물론 무아(無我, anatman)로 이해되었지만, 도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연단(練丹) 류의 신체단련과 관련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신(無身)’이라 할 때의 ()’은 기본적으로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신()이다. 이 신()을 단련하여 무지무욕(無知無欲)’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근원적으로 나의 삶의 환난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선지자나 예언자나 순교자의 진실도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서 기인된 환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우리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5. 고통과 환란을 없애려 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라(貴大患若身)

 

마지막으로 노자는 말한다. 천하(天下)를 내 몸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자에게는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과연 그대들은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자체를 내 몸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여기 몸이 없다몸을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는 상충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노자에게서는 동일한 언어다. 내 몸이 없어지는 것이 곧 내 몸을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환난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貴大患若身,.

 

 

이 말에 대해 내가 할 말이 있다. 나는 평생을 관절염(rheumatoid arthritis)’과 더불어 살았다. 내가 생각이 얕은 기독교 신자였을 때는 나는 항상 주님께 기도하고 매달렸다.

 

오 주여! 이 환난을 극복할 힘을 주소서! 주님께서 이 나의 고통을 치유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로소이다. 아멘!’

 

그러나 내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내 기도가 달라졌다. 더 이상 나는 나의 관절염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관절염이라는 나의 신체현상을 내가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대적시하지 않게 되었다. 관절염이야말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가장 대접해야 할 위대한 친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오른쪽 무릎이 심하게 시리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의 관절염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를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 서서히 관절염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30년 이상 나를 괴롭혔지만 그 위대한 나의 친구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관절염이야말로 나의 모든 낙관과 비관과 열정과 통찰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 귀한 친구가 없었더라면 나는 평범한 건강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오늘과 같이 깊은 통찰의 지혜를 만인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도올 김용옥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고통과 환난과 아픔을 극복하려하지 말라! 그것을 내 몸과 같이 귀하게 여기어라!

 

본 장은 백서(帛書)에도 있고 요번에 출토된 곽점죽간(郭店竹簡)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들어 있다. 뜻의 큰 변화가 없어 죽간(竹簡)이나 백서의 해석을 생략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이 13장이야말로 노자라는 텍스트의 가장 오리지날한 성격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노자는 원래 이러한 양생(養生)의 지혜로부터 출발한 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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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향 /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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