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으로 무명을 빨아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터본 적이 있으세요? 손이 트면 물이 닿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튼 손에 물이 닿으면 엄청 쓰리고 아프니까요. 빨래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겠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의 힘으로 손이 트지 않으니, 추운 겨울에도 그는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인이 빨래하는 사람을 찾아와 그 비법을 금일백 냥에 팔라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은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보고, 그것을 겨울 전투에서 수군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송나라 사람은 지금까지 그 비법의 힘으로 빨래를 해서 금 몇 냥만을 벌어 왔을 뿐입니다. 금일백냥을 준다는 말에 마침내 그는 이방인에게 비법을 팝니다. 이방인은 비법을 들고 오(吳)나라(BC? ~ BC 473)로 떠나죠.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그 오나라입니다. 고사처럼 오나라 최고의 라이벌은 월(越)나라(BC? ~ BC 334)였죠. 전쟁이 반복되면서 적개심은 두 나라 군주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람들 내면에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두 나라 사람들은 같은 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남중국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두 나라의 전쟁은 주로 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이 가져온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두 나라 사이의 팽팽한 전력에 불균형을 가져옵니다. 오나라 수군 대장이 된 이방인은 그 비법으로 겨울 수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오나라 수군들이 손이 트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전과였죠. 전승의 공으로 이방인은 오나 라의 영주가 됩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그것으로 여전히 무명 빠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 영주가 된 셈입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빨래할 때 사용한 것과 수전에 사용한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손약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장자 사유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맥주의 혹은 맥락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콘텍스트주의(contextualism)입니다.
제자백가 대부분이 텍스트(text)에 집중했을 때, 장자만이 콘텍스트(context)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서양은 본격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숙고하게 되죠.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젊은 시절의 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세계를 지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텍스트주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성숙해지면서 그는 콘텍스트주의자로 변합니다. 이때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라는 책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는 쓰임[use]에 있다”고 말하니까요. 동일한 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혹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혼 시 절에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사랑해”라고 말할 때, 결혼한 지 10년 된 남편이 출근하며 문 앞에서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너무나 무거운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지으며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등등. 동의어를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는 “잠시 헤어지는 것도 안타까워”가 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다녀올게”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동의어는 “먼저 세상을 떠나 미안해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똑같지만 그 문맥은 매우 상이하죠. 마지막 문맥에서의 “사랑해”라는 말을 첫 번째나 두 번째 문맥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일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쓰임’을 뜻하는 ‘유즈(use)’를 강조할 때 장자가 같은 뜻의 ‘용(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손 트지 않는 약, 즉 손약이 “사랑해”라는 말과 같은 위상에 있다면, 송나라의 문맥과 오나라의 문맥, 혹은 빨래하는 문맥과 수전을 치르는 문맥은 “사랑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세 가지 문맥과 위상이 같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처럼 어느 문맥에 놓이느냐에 따라 손약도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손약 이야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문맥주의적 입장을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라고 요약합니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이 텍스트에 집중하는 사유를 상징한다면, 그 송나라 사람에게 비법을 사서 오나라의 영주가 된 이방인, 즉 객(客)은 콘 텍스트주의자를 상징합니다. 텍스트주의자와 콘텍스트주의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송나라 사람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반면 이방인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전을 할 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죠. 우리는 왜 송나라 사람이 손약 비법을 이방인에게 팔 수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송나라 사람은 확신했을 겁니다.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처럼 빨래를 해서 돈을 벌 것이라고 말이죠. 만약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 사람 옆에서 빨래하는 일을 한다고 했으면, 그는 결코 비법을 팔지 않았을 겁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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