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깨기 힘든 악몽
여희 이야기
어떻게 내가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는가? 어떻게 내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우리들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도 고향으로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耶!
여희(麗姬)는 애(艾)라는 곳을 지키던 어느 여족(麗族)의 딸이었다. 진(晉)나라가 처음에 그녀를 잡아 데리고 왔을 때, 눈물이 그녀의 옷을 적실 정도였다. 진의 궁궐에 이르러 진왕과 침상을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후회했다. 어떻게 내가 죽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살기를 바랐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麗之姬, 艾封人之子也. 晉國之始得之也, 涕泣沾襟. 及其至於王所, 與王同筐床, 食芻豢, 而後悔其泣也. 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아침에 깨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 흘리던 사람이 아침에 깨서 새벽에 사냥을 즐긴다.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의 꿈을 해몽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음을 안다.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깨어있다고 생각하고 분명하게 아는 듯 “왕이구나! 목축민이구나!”라고 말하는데, 고루하기만 하구나!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제물론」 21, 22
내 생각은 나만의 꿈이 아닐까
『장자』에는 장자와 그 계승자들의 사유뿐만 아니라 심지어 겉보기에는 장자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반(反)장자적인’ 사유마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를 읽을 때 우리는 ‘장자인’ 것의 징표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야기들은 ‘장자적’이라고 생각해도 거의 무리가 없습니다. 공자는 당시 지성계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는데, 장자는 그런 공자의 입을 빌려 자기 사유를 피력합니다. 흥미롭게도 장자가 캐스팅한 공자는 자기 사상, 즉 『논어』의 내용을 부정합니다. 이렇게 공자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에서 장자는 공자의 권위를 이용하고 동시에 공자의 사상도 해체하는 지적 기민함을 보입니다. ‘장자적인’ 것을 알려주는 징표가 또 하나 있습니다. ‘꿈’이라는 모티브가 바로 그겁니다. 장자는 꿈을 자기만의 생각, 잘못된 생각 혹은 편견이나 착각 등에 비유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사실은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해보죠.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시간을 꿈속에 있었던 시간이라고 절규할 겁니다. 자신의 삶을 허비하는 이런 꿈도 있지만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꿈도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했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부모가 확신했던 자식 사랑은 자기만의 꿈이었을 뿐, 아이에게는 갚기 불가능한 부채 혹은 부담 자체였던 겁니다.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건에 대해, 관계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은 나만의 꿈이 아닐까? 장자의 꿈 모티브는 이런 반성을 유도합니다. 그렇다고 장자가 단순히 유아론(solipsism)을 표방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는 깨어남, 즉 각(覺)을 이야기하니까요. 이건 꿈이 아닐까 하고 장자가 반성하고 회의하는 이유는 꿈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방법론적 유아론(methodological solipsism)! 장자에게 있어 꿈 모티브의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사실 어떤 생각을 하든 바로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야’라고 유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면, 철저한 유아론자는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일 뿐이야’라고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생각은 나와 다르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설령 그 순간 타인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막연할지라도 말입니다. 철저한 유아론자는 타자 혹은 세계가 내 생각과 달리 움직인다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한 유아론자는 ‘여행을 함께 가면 딸이 행복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딸에게 여행을 통고합니다. 반면 방법론적 유아론자는 ‘이건 딸과 무관하게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어’라고 의심합니다. 당연히 그는 여행에 대한 딸의 속내를 조심스레 읽으려 하겠죠. 사실 진짜로 방법론적 유아론자가 된다면 우리는 평생 철학책 한 권 읽지 않아도 됩니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해’라고 반성하도록 만드는 학문이니까요. ‘나만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자각은 ‘타자들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과 동시적입니다. 『장자』에서 꿈의 모티브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장자는 우리를 철저한 유아론자의 길이 아니라 방법론적 유아론자의 길로 안내하는 철학자니까요.
몽각관(夢覺關)! 꿈과 깨어남을 가르는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한쪽은 꿈의 세계이고, 다른 한쪽은 깨어남의 세계입니다. 꿈의 세계 가장 바깥, 그 변경에 몽각관이라는 거대한 관문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 관문에 이르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 관문을 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입니다. 순수한 유아론자는 꿈의 세계 중심부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꿈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저 지평선 끝까지 가도 자신의 세계는 끝없이 펼쳐지리라 확신합니다. 반면 방법론적 유아론자는 꿈의 세계의 변경에 이르러 몽각관을 올려다보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으나 몽각관만 넘으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릴 것임을 직감하니까요. 그 다른 세계, 몽각관 너머의 세계는 대붕이 사는 곳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장자』는 각까지 안내하는 일종의 로드맵인지 모릅니다. 사실 『장자』의 모든 이야기들은 몽각관에 이르는 다양한 여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각관으로 떠나는 출발지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꿈의 세계 그 중심부의 번화한 다운타운일 수도, 주거지가 밀집한 도시 외곽 업타운일 수도, 아니면 도시 바깥의 한적한 촌락일 수도 있으니까요. 몽각관으로 가는 길들은 출발지가 다양한 만큼 여정의 길이도 방향도 복잡하기만 합니다. 친절하게도 『장자』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여정을 한 면에 압축한 전체 개관도가 있어, 그 몽각관으로 가는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바로 그것이 「제물론」편에 등장하는 ‘여희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가 일종의 압축 파일과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여희 이야기가 「제물론」편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문학적 묘사와 추상적 논증에 매혹되어 독자들이 몽각관으로 가야 하는 여정을 잊을까 봐 우려한 장자의 노파심입니다. 그러니까 여희 이야기는 작게는 「제물론」편, 크게는 『장자』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결정적인 이정표인 셈입니다.
장자의 역사적 상상력
기원전 422년, 그때까지 명목상 천자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주(周)나라가 그 명목마저 잃게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황하는 모자 테두리 모양(Ω)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릅니다. 볼록하게 솟은 가운데의 황하 아래쪽 부분은 오르도스(Ordos)라고 불립니다. 농경보다 목축이 번성했던 광대한 고원지대였습니다. 오르도스는 ‘중심지’나 ‘야영지’ 혹은 ‘무리’ 등을 뜻하는 오르두(Ordu)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그만큼 이곳은 천하질서와 무관한 유목민들의 땅이었습니다. 후에 이 유목민들은 중국 정주민들에게 쫓겨나 흉노(匈奴)라는 북방 유목민 연합체의 중심이 됩니다. 추방된 유목민들이 돌아올까봐 두려워 만든 것이 만리장성의 시초가 된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진(晉)나라(BC 265~BC 403)는 오르도스 우측 황하 위쪽에 있던 제후 국이었습니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천하질서를 멀리로는 북방 유목사회로부터 지키고 가깝게는 좌측 오르도스를 견제하는 북방의 최전선이었습니다. 진나라는 묘한 곳이었습니다. 오르도스나 그 북쪽 지역처럼 농경보다는 목축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진나라는 농경 정착국가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천하 이념을 받아들입니다. 한마디로 진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유목사회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착사회였던 겁니다. 사실 주나라가 오르도스 우측 지역을 점령하면서 탄생한 국가가 진나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진나라가 한(韓)나라, 위(魏)나라, 그리고 조(趙)나라로 분열된 겁니다. 진나라는 주나라가 책봉한 제후국이었으니 한·위·조, 즉 삼진(三晉)의 출현은 진나라에 대한 혁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자국 주나라에 대한 도발이었죠. 그런데도 주나라는 이를 묵인하고 방조했던 겁니다. 어쩌면 북방 유목사회의 역습으로부터 천하를 지키겠다는 주나라의 고육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위·조, 이 세 국가를 부정했다 가는 그들이 천하질서를 이탈해 북방유목전통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춘추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이제 명분도 필요 없습니다. 힘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니까요. 부국강병을 꿈꾸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이렇게 열립니다.
전국시대 중엽, 대략 기원전 300년 전후에 살았던 장자가 여희 이야기의 배경으로 진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진나라는 유목민적 삶과 정착민적 삶이 묘하게 섞인 곳, 유목질서와 천하질서가 불안하게 공존했던 곳입니다. 지배와 복종으로부터 나름 자유로웠던 유목민적 삶과, 지배와 복종에 취약한 정착민적 삶! 진나라, 그곳은 영토국가에 비해 느슨하고 유목국가에 비해 빡빡한 정치 질서가 유지된 곳이었습니다. 자기 남쪽 다른 제후 국가들에 비해 중앙집권적 질서가 약했기에 진나라는 한·위·조, 세 국가로 분열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진나라 사람들은 언제고 정착생활을 떠나 북쪽 초원과 사막지대로 들어가 전면적인 유목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천하 안은 삶을 보존하는 문명이고 천하 바깥은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야만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협박은 그들에게 먹히기 힘들었습니다. 복종은 지배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협박이 제도화되고 내면화되어야 가능합니다. 나보다 힘이 센 누군가가 우리 목을 조르며 “죽을래, 아니면 살래!”라고 협박합니다. 이런 협박을 무력화시키는 방법, 복종의 강요를 좌절시키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그래, 죽여라!” 복종하는 삶을 영위하느니 자유로운 죽음을 결연히 선택하는 순간, 그 누구도 우리를 복종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그 강자는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를 지배와 복종 관계로 몰아넣어 착취하거나 수탈할 수는 없죠. 그러나 유목민들에게는 죽음의 협박 자체가 무용지물입니다. “죽을래, 아니면 살래?”라는 협박은 한 번은 가능하겠지만 두 번은 불가능합니다. 유목민들은 가축과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미 떠나버렸을 테니까요.
두 번의 협박, 아니 반복적인 협박은 천하에 포획된 정착민적 삶을 사는 이들에게 통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정착·농경 생활은 영토국가 탄생의 기반이 되는 겁니다. 정착지를 떠나서는 죽을 것 같고, 지배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천하에 머물면 살 수 있을 것 같고, 복종을 감내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생사관(生死關)에 가두어 버리면서 정착민들은 피지배계급이 되고 맙니다. 이제 복종하는 삶이 죽음보다 불행한 삶이라는 호소도 피지배계급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깊이 사로잡혀 있으니까요. 자유에의 길은 복종을 거부하면, 혹은 정착지를 떠나서는 죽 을 수도 있다는 꿈에서 깨어나야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생사관이 몽각관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바로 여기서 천하 내부와 천하 외부가 공존했던 진나라와 그곳의 삶이 상징적 힘을 갖습니다. 천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 주는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죽음을 감내하는 자유인의 투쟁은 여유를 갖게 됩니다. 국가를 미련 없이 떠나는 길도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복종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거친 이분법의 절박감과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진 나라라는 역사적 상징은 생사관과 몽각관을 통과하는 데 경쾌함과 여유를 제공합니다. 생사과 몽각관을 천하의 변경 진나라 위에 놓는 예민한 문학적 감각! 장자가 일급의 지성인 이유입니다. 먼저 장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복종을 거부하거나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심적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이야기가 여희의 일화로 시작된 이유입니다. “진(晉)나라가 처음에 그녀를 잡아 데리고 왔을 때, 눈물이 그녀의 옷을 적실 정도였다. 진의 궁궐에 이르러 진왕(晉王)과 침상을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후회했다. 어떻게 내가 죽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살기를 바랐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여기서 죽음은 무조건 불행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판단은 유보되고 맙니다. 설사 복종에 맞서다 죽더라도 그 죽음이 핍박받는 삶보다 낫다는 인식까지는 이제 한 걸음이면 족합니다.
어떻게 하면 꿈에서 깰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는 지배와 복종 관계를 현실이라고 믿는 그야말로 리얼한 꿈의 세계로, 생사관으로 불러도 좋은 몽각관에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습니다. 태어난 것만큼 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장자』 곳곳에 많습니다. 생사관의 높이를 낮추려는 장자의 복안입니다. 그래야 생사관 너머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다른 삶이 펼쳐지는 세계라는 것을, 야만의 세계가 아니라 진정한 문명이 시작되는 세계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 테니까요. 반대로 국가는 생사관을 부단히 보수하고 수리해 그 성벽을 더 두껍고 더 높게 만들려고 합니다. 피지배 계급이 생사관 바깥을 엿보거나 혹은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하니까요. 생사관을 세우고 생사관에 사람을 가두어두는 것이 국가입니다.
결국 국가의 본질은 삶과 죽음을 분류하고 이어서 삶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해야 국가는 생사여탈의 칼을 휘둘러 복종을 강요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꿈의 세계 중심부가 삶이 가장 보호되는 곳이고 생사관 근처는 죽음에 가까운 위험한 곳으로 표상됩니다. 중심과 주변의 구별, 그리고 중심에 대한 우월성이 인정되면서 생사관은 점점 다른 범주들로 번식하게 됩니다. ‘지배중심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구분, ‘남성 중심적인’ 남자와 여자의 구분, ‘아버지 중심적인’ 아버지와 자식의 구분, ‘일자 중심적인’ 일자와 다자의 구분, ‘하늘 중심적인’ 하늘과 땅의 구분, ‘인간중심적인’ 인간과 자연의 구분, ‘신 중심적인’ 신과 만물의 구분, ‘자본 중심적인’ 자본과 노동의 구분은 모두 생사관의 사생아들입니다. 1991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응시했던 국가의 맨얼굴도 바로 이것입니다. 2014년 『국가에 대해(Sur l'État)』라는 책은 당시 그의 육성을 녹취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처럼 국가는 분류 원리들(principles de classement) 의 생산자, 즉 세계의 모든 것들 그리고 특히 사회적인 것들에 적용될 수 있는 구조화시키는 구조들(structures structurantes)의 생산자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 제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자답게 국가가 자신을 영속화하기 위해 다양한 분류 원리들을 생산한다는 걸 이야기합 니다. 장자는 부르디외보다 더 나아갑니다. 분류 원리들을 작동시키는 최종적 분류 원리로서 생사관을 응시하니까요. 어쨌든 부르디외의 성찰은 장자와 마주치면서 우리에게 묘한 울림을 줍니다. 장자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누구나 중심에 서려 하고, 누구나 지배계급이 되려 하고, 누구나 자본가가 되려 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가급적 중심 근처에 있으려 하고, 가급적 지배계급 근처에 있으려 하고, 가급적 자본가 근처에 있으려 합니다. 문제는 갈등과 경쟁이 치열해지니 꿈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내면을 지배하는 이 모든 것들이 국가가 생산한 것이라니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한 일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 느끼고 살아내는 모든 것이 사실 국가의 꿈이라는 사실, 지금 우리의 꿈은 내 것이라기보다 국가의 것이라는 사실! 불쾌하고 불편할지라도 부르디외의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나 장자의 “깨어난 사람에게” “이것은 자명한 사실”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정신을 가질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해야 부르디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정신을 갖게 하고, 어떻게 해야 장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꿈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말하고 말하고 말할 뿐이고, 글 쓰고 글 쓰고 글 쓸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꿈속에서도 들릴 수 있는 말이나 글, 다시 말해 국가 바깥, 꿈 바깥, 생사관 바깥의 상쾌한 바람을 느끼도록 하는 말이나 글입니다. 부르디외와 달리 장자가 부단히 우리를 방법론적 유아론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아침에 깨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 흘리던 사람이 아침에 깨서 새벽에 사냥을 즐긴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건 항상 그것이 나만의 꿈이 아닌지 의심하라는 겁니다. 친구를 만날 때, 애인을 만날 때, 고양이를 만날 때, 꽃을 만날 때, 늑대를 만날 때, 바람을 만날 때, 매번 우리는 개운치 않게 생각하고 개운치 않게 행동해야 합니다. 깔끔한 분류와 명확한 가치평가는 국가의 꿈이니까요. 대붕은 바람이 충분히 모여야 날 수 있는 법입니다. 작은 꿈에서 깨어나는 경험이 충분히 쌓여야 합니다. 생사관과 몽각관을 가볍게 날아 넘어갈 수 있는 대붕이 되려면 말입니다. 대붕이 되어 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비상할 때, 천하는 아주 협소한 세계라는 것이 분명해질 겁니다. 장자의 말 대로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되니까요. 여희 이야기를 마치며 장자는 자신이 꾸었던 큰 꿈, 가위 눌리면서도 깨기 힘들었던 그 지독한 악몽을 분명히 합니다. 바로 국가주의입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분명하게 아는 듯 ‘왕이구나! 목축민이구나!’라고 말하는데, 고루하기만 하구나!” 마지막까지 장자는 진나라를 역사적 상징으로 쓰는 노련함을 보여줍니다. 왕과 농민이 아니라 왕과 목축민으로 지배와 복종 관계를 묘사하니까요. 농민과 달리 목축민은 언제든 영토국가를 떠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큰 꿈에도 자유의 실마리를 새겨 넣었던 철학자, 바로 장자입니다.
인용
25. 에히 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 / 27. 장주가 장자로 다시 태어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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