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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22. 타자에 주파수를 맞춰라(심재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22. 타자에 주파수를 맞춰라(심재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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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자에 주파수를 맞춰라

심재 이야기

 

 

안회가 말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顔回曰: “吾無以進矣, 敢問其方.”

 

공자가 말했다. “재계[]하라!” ()

仲尼曰: “” ()

 

안회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顔回曰: “回之家貧, 唯不飮酒不茹葷者數月矣. 如此則可以爲齋乎?”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이지, ‘심재(心齋)’가 아니다.”

: “是祭祀之齋, 非心齋也.”

 

안희가 말했다. “부디 심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回曰: “敢問心齋.”

 

공자가 대답했다. “너의 마음 방향[]’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부합되는 것을 알 뿐이다. 기는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은 오로지 비움[]에서만 깃들 수 있다. 이렇게 비움이 바로 심재이니라.”

仲尼曰: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안회가 말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의식이 실재처럼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 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顔回曰: “回之未始得使, 實自回也; 得使之也, 未始有回也, 可謂虛乎?”

 

공자가 대답했다. “이게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위나라에 들어가 그 울타리 안에 노닐 때, 너는 명성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들어오면 울고 들어오지 않으면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라. 너의 집을 하나로 만들어 부득이(不得已)에 깃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夫子曰: “盡矣! 吾語若: 若能入游其樊而無感其名, 入則鳴, 不入則止. 無門無毒, 一宅而寓於不得已則幾矣.” 인간세5, 6

 

 

장자가 공자를 캐스팅한 이유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투톱은 유가(儒家)묵가(墨家)입니다. 실제 정치에 영향을 깊이 미쳤던 상앙(商鞅, BC ?~BC 338), 신불해(申不害, BC ?~BC 337), 신도(愼到, ?~?) 그리고 한비자(韓非子, BC 280?~BC 233) 등은 자신들이 법가(法家)라는 학파에 속한다는 의식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국강병의 기술과 논리를 고민했던 현실 정치가였을 뿐입니다. 반면 유가와 묵가들은 확고한 학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가가 대인(大人)을 정당화하는 사유를 전개했다면, 묵가는 소인(小人)을 위한 사유를 표방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묵가보다는 유가가 더 권위 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소인의 육체노동을 긍정하던 묵가의 입장은 고급 관료를 꿈꾸던 대부분 지식인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니까요.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묵가의 쇠퇴를 재촉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중엽, 묵가들은 국가주의나 관료주의를 강하게 표방하면서 당시 시대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학파의 창시 자묵적(子墨的)비공(非攻)’, 즉 전쟁 반대론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묵가들은 전쟁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었기 때문이죠. 전국시대 중엽 묵가가 점점 지적 헤게모니를 잃어감에 따라 유가는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그에 따라 지식인 사회에서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의 권위는 높아만 갔습니다. 물론 장자 당시 실제적 영향력을 지녔던 지식인들은 사후적으로 법가로 분류되는 사상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주의와 패권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 반인문주의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였으니까요.

 

장자에는 공자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장자 본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자의 권위가 높아지던 전국시대 중엽, 장자가 살았던 당시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니 말입니다. 장자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일단 공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가 동시 대 사람들에게 먹히리라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공자로 하여금 유학을 해체하는 입장을 피력하게 만들어, 유가의 지적 헤게모니를 그 뿌리부터 흔들려 했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공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재 이야기일 겁니다. 바람을 맞아 근사한 바람 소리를 내려면 구멍이 막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구멍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도 갈등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그 배는 비어 있어야 합니다. 빈 배에 화를 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빈 구멍이나 빈 배는 비유일 뿐, 구체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지 그 상세한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세편에 등장하는 심재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구멍이나 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신을 비울 수 있는지, 나아가 그 비우는 과정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론바람 이야기에서 남곽자기라는 가상 인물이 말했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는 상태, ‘오상아(吾喪我)’의 진실이 심재 이야기로 그 전모가 드러납니다. 심재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상태만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장자의 통찰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배나 구멍과 달리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심재 이야기는 논어처럼 공자와 그의 수제자 안회(顔回)의 대화로 구성됩니다. 사실 전체 심재이야기는 인간세편의 거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안연(顔淵)으로도 불리는 안회가 위()나라(BC ?~BC 209)로 유세를 가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위나라 군주는 포악하고 독단적이어서 잘못 유세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나 큰 유세였던 겁니다. 공자의 수제자로 인정받던 안회로서는 두려웠습니다. 잘못 유세했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으니까요. 공자는 안회의 걱정을 알아채고 어떻게 유세할 생각인지 그에게 물어봅니다. 안회는 자신의 유세 전략을 스승에게 이야기합니다. 수제자의 이야기를 듣자 공자는 그 전략을 논박하고, 다른 전략을 이야기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전략을 이야기하자 공자는 다시 또 안회의 생각에 퇴짜를 놓습니다. 이제 안회의 불안은 극에 달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유세 전략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으니까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군주를 만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일입니다. 마침내 안회는 스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습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공자는 드디어 자신이 생각한 유세의 방법을 제자에게 발설합니다. “재계하라!”는 말로 심재 이야기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드디어 펼쳐집니다. 방금 읽어본 심재 이야기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위나라 군주를 타자의 상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위나라 군주 대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각자의 타자들, 즉 부모, 아이, 아내, 남편, 애인, 동물, 식물, 사물 혹은 사회적 환경이나 자연적 환경 등을 대입해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귀로도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로 들어라

 

재계재계하다로 풀이하는 ()’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심신을 정화하기 위해 기름기 있는 음식을 줄이거나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재계하라!”는 스승의 충고를 듣자마자 안회는 육체의 속, 즉 배를 비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자신이 말하는 재계는 몸의 재계가 아니라 마음의 재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재계가 무언가를 비운다는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회는 마음의 재계, 즉 심재의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마음을 비우는 수양의 구체적인 묘사를 만나게 됩니다. 공자는 “‘마음 방향을 하나로 만드는것이라고 심재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마음 방향은 ()’를 번역한 말인데, 는 마음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사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우리는 마음 방향이나 지향을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 방향이 세상과 무관한 상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주치고 있는 타자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카페에서 그(그녀)를 만났다고 해보죠. 상대에게로 마음 방향을 집중하는 것이 “‘마음 방향을 하나로 만드는것입니다. 상대를 무시하고 카페의 음악이나 인테리어에 집중하거나 혹은 다른 일이나 내일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의 매력이 번쩍이는 대목입니다. 방 안에 앉아 많은 상념들 중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장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마주치고 있는 타자에, 그 타자성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입장이니까요.

 

불교에서는 부정관(不淨觀, Aśubhabhāvana)이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집착을 끊으려고 시체가 썩어가는 불쾌한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려보는 겁니다. 정말 내 눈앞에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처럼 불쾌한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려보는 것이 부정관의 핵심입니다. 장자는 이런 식의 마음 집중에 반대합니다. 그는 방에 있으면 푹 자거나 방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공자의 입을 통해 장자가 자기 입장을 바로 명료화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본다는 이미지가 아니라 듣는다는 이미지로 사유하는 대목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본다는 뜻의 ()’가 아니라 듣는다는 뜻의 ()’이 중요합니다. 장자는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시작하니까요. 애초에 타자를 본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그의 결단입니다. 시선의 형이상학 혹은 시선의 정치경제학을 생각해보세요. 보는 자가 우월한 자이고 보이는 자는 열등한 자입니다. 우리는 우월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전통이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거나 절을 하면서 나는 보지 않겠으니 당신은 마음껏 나를 보라는 복종의 의미입니다. 나는 사냥감이고 당신은 사냥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반대로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경우,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도전한다는 위기감 혹은 상대방이 나를 깔본다는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왜 신이나 귀신 등을 만들어냈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우리를 항상 보고 있다고 상정되는 존재가 신이나 귀신이니까요.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되겠다는 의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가 되겠다는 의지는 타자와 소통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반면 듣는다 혹은 듣겠다는 의지는 이와 다릅니다. 음악을 듣는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습니다. 혹은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거실의 불을 끄거나 빛을 약하게 조절합니다. 음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군주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복종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눈을 감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상대방에 복종하겠다는 의지와 무관합니다.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을 감게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음이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라면, 눈을 감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군주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응시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타자의 말이나 혹은 타자를 듣는다는 것은 지배에의 의지나 복종에의 의지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건 소통에의 의지니까요.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고 말합니다. ‘’, ‘마음혹은 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은 듣겠다는 그의 의지입니다. ‘듣겠다는 소통에의 의지가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좋고, 마음으로 듣는 것보다 기로 듣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비우고 부득이에 깃들 때

 

물리학에는 공명(resonance)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소리굽쇠 A가 울리면 일정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소리굽쇠, 즉 같은 진동수를 가진 다른 소리굽쇠 B를 울리는 현상입니다. 만약 BA와 진동수가 다르면 BA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진동수가 같아야 BA의 소리에 반응해 함께 울 게 됩니다. 장자가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부합되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실연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있지만 함께 울어주기는 힘든 법입니다. 반대로 실연의 경험이 있다면 친구의 아픔에 함께 울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기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특정 진동수를 갖고 있는 소리굽쇠가 아니라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진동수를 갖고 있는 소리굽쇠를 상상해보세요. A가 울려도 울고, B가 울려도 울고, C가 울려도 울고……. 라디오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채널을 돌려 주파수를 맞춰 다양한 진동수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채널을 돌리면서 우리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냉담해지기도 하고, 밝아지기도 합니다. 타인의 소리를 듣자마자 그에 반응할 수 있는 실연의 경험, 사랑의 경험, 실패의 경험, 성공의 경험 등 자기만의 진동수가 꺼내지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공명이자, 장자가 기로 듣는다고 했을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는 수백 수천의 소리들, 진동수가 다른 그 소리들로 가득한 어떤 충만한 공간, 너무나 의미가 많아 무의미해 보이는 복잡한 공간을 떠올리면 좋습니다. 분위기(雰圍氣)라고 문학적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장자는 기는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정 진동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이것을 비워야지요. 잡음이 사라져 명료한 소리를 잡을 때까지 돌아가는 채널을 생각해보세요. 비움이란 결국 타자의 주파수를 잡을 때까지 자신이 가진 특정 진동수를 부단히 버리는, 혹은 떠나는 행위였던 겁니다.

 

이제야 길은 오로지 비움에서만 깃들 수 있다는 장자의 난해한 말이 직감적으로 이해됩니다. 찌지직거리는 잡음이 사라지고 드디어 명료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상대방의 진동수에 나의 진동수가 일치되자 타자의 소리가 내게 들리는 겁니다. 타자가 내게 오는 길, 아니 타자로 내가 뚫으려 했던 길이 완성된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 단계의 들음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들었지만 진동수가 맞지 않아 반응하지 않는 단계, 진동수가 맞아 특정 소리에 반응하는 단계, 진동수가 저절로 조정되어 다양한 소리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단계입니다. 귀의 들음, 마음의 들음 그리고 기의 들음입니다. 물리학의 공명현상으로 심재 이야기를 독해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장자를 읽어보면, 장자에게 공명현상은 하나의 상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비파를 대청에, 다른 비파는 거실에 놓고 궁음을 치면 궁음이 반응하고 각음을 치면 각음이 반응하는 것은 음률이 같기 때문이다[廢一於堂, 廢一於室, 鼓宮宮動, 鼓角角動, 音律同矣].” 서무귀(徐无鬼)편에서 혜시와 논쟁하면서 장자가 인용한 공명현상입니다. 어쨌든 공자의 말로 장자가 권고한 심재는 마음의 특정 진동수를 비워내는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비움이 바로 심재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 비움이 진동수가 맞지 않아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첫 번째 단계로의 퇴행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막혀 있지 않아 바람과 마주칠 때 그에 맞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구멍과 같은 상태니까요. 타자의 소리를 잡기 위해 저절로 채널이 움직일 수 있는 근사한 라디오와 같은 상태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안회는 마음으로 듣지 않고 기로 들을 수 있는 상태, 즉 마음을 비운 상태에 이릅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의식이 실재처럼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안회라는 자의식, 그것은 안회만의 특정 진동수죠. 안회는 마침내 자기만의 고유 진동수를 비운 겁니다. 이제 다양한 주파수를 잡을 수 있는 성능 좋은 라디오가 된 셈이죠. 공자는 이제 위나라 군주를 만나러 가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안회는 언제든 특정 주파수에 사로잡힐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다시 한 번 들의 지혜를 반복합니다. “들어오면 울고 들어오지 않으면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라.” 타자의 소리가 명료하게 들어오면 그때서야 반응해야 합니다. 아니면 어떤 반응도 해서는 안 됩니다. 타자의 소리를 제대로 포착하지 않고 떠들면 소통은커녕 불통, 나아가 갈등이 생기니까요. 또한 이 주파수면 소리가 잡히리라 기대해서 채널을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타자에 이르는 문도 없애고 타자를 내려다보는 언덕도 없애야 한다고 장자가 말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자너의 마음 방향[]’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너의 집을 하나로 만들어 부득이(不得已)에 깃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부득이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장자의 매혹적인 표현이죠. 찌지직거리는 잡음의 공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는 자기 진동수를 맞춰야 합니다. 잡음이 조금이라도 명료한 소리가 되도록 채널을 섬세하게 돌려야 합니다. 그나마 잡음의 웅성거림이 가시면 다행입니다. “너의 집을 하나로 만들어 부득이에 깃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장자가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감도가 좋은 라디오라도 모든 주파수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잡음마저 들리지 않고 내 귀를 지나가는 주파수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비웠다고 모든 타자와 소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자와 반응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고유 진동 수들을 늘리는 일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귀에는 수많은 타자들의 소리가 잡히지 않은 채 흘러갈 겁니다. 구멍과 마주치지 않고 휘몰아치는 바람들처럼 말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21. 바로 여기다, 더 나아가지 말라 / 23. 형이상학이라는 깊은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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