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허영의 감옥
찬양받는 자나 찬양하는 자 모두가 허영에 물들어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거대한 허영의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의문 한 가지가 뒤따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파스칼은 신에게 헌신하면 허영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허영이란 기독교에서 말한 원죄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파스칼의 『팡세』 후반부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허영의 세계를 구원이라는 종교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산목」 편의 이야기 하나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미인 이야기’입니다. 미인 이야기는 겉보기에 매우 단순합니다. 양주라는 철학자가 제자들과 함께 송(宋)나라(BC 11세기 ~ BC 286)로 갈 때 한 객사에 머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객사 주인은 부인이 두 명이었습니다. 양주 일행이 보기에 한 명은 외모가 아름다웠고, 다른 부인은 못생겼습니다. 그런데 객사에 일하는 직원들은 아름다운 부인은 홀대하고 못생긴 부인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상히 일이죠. 아름다운 부인을 귀하게 여기고 못생긴 부인을 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궁금해진 양주는 객사의 머슴아이에게 그 연유를 물어봅니다.
아이의 대답으로 이야기는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其美者自美, 吾不知其美也; 其惡者自惡, 吾不知其惡也].” 이 말에 양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더니 말합니다. “너희가 능력을 발휘하되 ‘나는 능력자다’라는 마음을 버리라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름다운 부인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느냐”고 말이죠. 미인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인은 미인입니다. 그렇지만 미인이 미인으로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능력 있는 사람도 겸손해야 하죠.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가진 능력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가 옳다면, 결국 미인 이야기가 문제 삼은 것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 즉 자미지심(自美之心)’이나 스스로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즉 ‘자현지심(自賢之心)’이라는 독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인 이야기의 주인공을 미인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객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이 눈에 들어와야 미인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이 드러나니까요. 분명 미인은 허영의 가장 분명한 상징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못생긴 부인, 즉 추녀도 그리고 객사의 머슴아이로 대표되는 나머지 객사 직원들도 허영의 존재입니다. 문제는, 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허영은 은밀하고 복잡하기에 눈에 바로 띄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두 부인을 제외한 객사 식구들의 허영을 생각해볼까요. 머슴아이의 두 부인에 대한 평가가 그 실마리가 됩니다. 외모에서 미녀는 비교 우위에 있고 심지어 그것을 객사 식구들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는 객사 식구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외모에서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 겁니다. 그래서 비교 우위에 대한 욕망을 가진 객사 식구들은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며 미인에게 저항하게 되죠. 반면 추녀는 외모에서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당연히 객사 식구들은 최소한 외모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추녀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추녀는 객사 식구들의 허영을 제대로 충족시켜준 셈이죠. 이제 가장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추녀의 허영을 들여다볼까요. 미녀 때문에 객사 식구들은 외모라는 차원에 갇히고 맙니다. ‘외모 때문에 부인이 된 주제에. 너는 외모가 망가지면 버림 받을 거야.’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순간, 객사 식구들은 추녀가 외모가 아닌 무언가 힘이 있어 부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라이벌이 객사 식구들과 외모로 인정 투쟁에 들어가자, 추녀는 외모에서의 비교 우위를 포기하면서 객사 식구들로부터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끌어낸 거죠. 자신의 못생김이 찬양은 아닐지라도 상대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했으니, 추녀는 외모에 대한 자신의 허영을 나름 충족시킨 셈입니다. “얼굴이 고와야 미인인가, 마음이 고와야 미인이지”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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