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열자는 이렇게 살았다!
열자 이야기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부엌일을 하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를 먹었으며,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 세련된 나무 조각품이 다시 온전한 나무로 돌아가듯, 그는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 그의 행동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열자는 한결같이 이렇게 살다가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
然後列子自以爲未始學而歸. 三年不出, 爲其妻爨, 食豕如食人, 於事無與親. 雕琢復朴, 塊然獨以其形立. 紛而封哉, 一以是終. 「응제왕」 5
열자는 왜 스승을 떠났을까?
『장자』 「응제왕」 편의 반을 차지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계함(季咸)이라는 무당과 호자(壺子)라는 선생 사이의 일화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바로 호자의 제자 열자(列子)입니다. 계함은 신통하여 생명체를 보면 그 생명체가 언제 죽을지를 알았고, 심지어 사람의 죽음까지도 점칠 수 있었습니다. 열자는 계함이 자기 스승보다 더 훌륭하다고 판단합니다. 당연히 열자는 스승을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스승을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열자는 지금까지 스승이었던 호자에게 계함의 훌륭함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새로운 스승을 찾아 떠나겠다는 은근한 작별 선언이었던 셈이죠. 호자로서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마침내 호자는 계함을 만나게 해달라고 열자에게 부탁합니다. 자신과 무당 중 누가 더 수준이 높은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죠. 뭔가 스토리가 이상하게 진행됩니다. 열자라는 제자 앞에서 현재 스승과 미래 스승이 경연을 벌이는 형국이 펼쳐지니까요. 결국 가장 수준이 낮은 사람이 경연의 심사위원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경연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과연 계함은 호자를 보고, 호자의 생사를 예측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살피다’나 ‘보다’라는 뜻의 ‘상(相)’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바로 관상(觀相)입니다. 계함은 호자의 관상을 볼 수 있을까요? 관상을 본다면 계함이 이기는 것이고, 보지 못한다면 호자가 이기는 경연은 이렇게 펼쳐집니다.
호자를 만나자 계함은 그의 관상을 봅니다. 관상을 본 뒤 그녀는 호자가 일주일안에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열자는 슬픔에 빠집니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지만, 호자는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셔온 정든 사람이었으니까요. 열자가 울면서 스승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호자는 “내가 꽉 막힌 땅의 기운을 보여주었다. 다음에 또 그녀를 불러와라”라고 말합니다. 이에 계함이 다시 와 호자의 관상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 그녀는 호자에게서 봄날 같은 기운을 느낍니다. 관상을 본 뒤 계 함은 열자를 불러 “당신 스승이 나를 만났더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만난 것만으로 호자의 막힌 기운이 뚫렸다고 믿었던 겁니다. 계함이 호자를 살렸다고 믿은 열자는 이 이야기를 스승에게 해줍니다. 그러자 호자는 말하죠. “내가 그녀에게 맑은 기운을 보여주었다.” 이런 식으로 계함은 호자의 관상을 보고, 그때마다 호자는 계함에게 다른 기운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호자는 계함에게 허(虛)의 기운, 즉 빈 마음을 보여주죠. 이를 본 계함은 망연자실하여 달아납니다. 호자의 마음이 순간순간 관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계함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호자는 빈 구멍이고 계함은 바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빈 구멍은 다양한 소리를 내지요. 바람의 세기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계함은 호자의 빈 마음에서 복잡한 무의식을 포함해 자신의 수많은 의식과 감정들을 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계함은 그 모든 혼돈이 호자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빈 마음, 즉 허심을 보여주었을 때 호자는 자신과 계함 사이에 있었던 일을 열자에게 설명합니다. “계함과 있을 때 나는 비워서 (돌 등 장애물을 만나면 몸을 자유롭게 휘는) 뱀처럼 타자에 반응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가라앉으면 나도 가라앉고 그녀가 요동을 치면 나도 요동쳤기에, 그녀는 놀라 도망친 것이다[吾與之虛而委蛇, 不知其誰何, 因以爲弟靡, 因以爲波流, 故逃也]”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처럼 계함은 자신의 관상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호자의 빈 마음에서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봅니다. 빈 구멍에서 바람 소리를 들은 바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계함은 놀랐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경연은 이렇게 호자의 승리로 결판이 나고 맙니다. 채운 것을 비울 수 있는 병과 같은 선생이 끝까지 채운 것을 유지하려 했던 무당을 이기는 결론은 사실 이미 예견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호자는 ‘병 선생’이라는 뜻이고, 계함은 ‘끝까지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계함은 그녀 자신이 채운 것을 빈 병에 빼앗기는 역으로 캐스팅된 겁니다. 자, 이제 열자는 어떻게 할까요? 호자의 승리를 보았으니 열자는 스승 옆에서 마음을 비우는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정상일 겁니다. 그런데 열자는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이미 멀리 도망간 무당은 차치하고, 스승에게서마저 떠나기 때문입니다. ‘호자 이야기’로 불릴 만한 이야기가 ‘열자 이야기’로 불리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호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열자가 주인공이니까요.
3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는 ‘연후(然後)’라는 말을 풀이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런 일이란 물론 호자가 계함에게 최종 승리를 거둔 일을 가리킵니다. 계함은 스승 호자와의 싸움에서 패했으니 그녀와 결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호자와의 경연에서 패한 그녀가 실성한 듯 사라져 종적이 묘연하니, 열자가 스승으로 모시려 해도 그럴 수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호자의 승리 이후 열자는 호자마저 떠나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호자의 이야기가 맞다면, 호자는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한 사람, 다시 말해 바람 이야기에서 남곽자기처럼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吾喪我]”라고 선언해도 무방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완성하려면, 열자는 이전보다 더 간절하게 스승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열자는 호자를 떠납니다. 이미 열자는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한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승을 떠났다는 것은 열자가 호자를 더 이상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대체 계함이라는 무당을 쫓아낸 호자의 어떤 측면이 열자에게 불만족스러웠던 것일까요? 사실 그 답은 단순합니다. 호자가 계함에게 보여주었다고 떠벌렸던 빈 마음, 즉 허심(虛心)은 사실 빈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이유는 타자를 놀라게 하거나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호자의 허심은 소통은커녕 계함을 공포에 빠져 실성하는 지경까지 내몹니다. 열자는 바로 이를 간파했던 것입니다. 호자의 허심에는 사실 괴물이 살고 있었던 셈입니다. 뱀처럼 부드럽게 몸을 휘는 상태가 아니라 그냥 뱀이 있었던 겁니다. 계함은 호자의 허심에서 자신의 맨얼굴과 함께 그 뱀을 보았던 게 아닐까요. 아마 그 뱀은 계함에게 다가오며 말했을 겁니다. “나는 너의 몸과 마음을 휘감아버릴 거야.” 분명 이것도 계함의 공포를 가중시켰을 겁니다. 어쨌든 호자는 그저 무당도 속이는 능숙한 배우였을 뿐입니다. 막힌 기운도 연출하고 맑은 기운도 연출합니다. 심지어 그는 허심도 연출하죠. 그러나 마음을 실제로 비우는 것과 비운 척 연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 우리는 압니다. 호자의 허심 이면에는 계함을 이기겠다는 의지, 허심으로 계함을 놀라게 하겠다는 의지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요. 호자는 ‘자신을 잃기[喪我]’는커녕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겁니다. 열자는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겁니다. 이제 계함도 스승일 수 없고, 아울러 호자도 스승일 수 없습니다. 남은 것은 이제 열자 그 자신일 뿐입니다. 여기서 열자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묘사가 중요합니다. 중국 특유의 삼년상(三年喪) 전통을 생각해보세요. 3년은 호자와 철저히 결별하는 죽음의 시간이자 열자가 새롭게 태어나는 탄생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3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열자는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한 것입니다.
갈등을 피하는 빈 배처럼, 혹은 바람을 맞아들이는 빈 구멍처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의식, 즉 ‘아(我)’를 버리는 겁니다. 3년이 지나자 열자는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합니다. 당연히 ‘나는 남자야’ ‘나는 인간이야’ ‘나는 마음을 비운 사람이야’ 등의 자의식은 사라집니다. 아울러 자의식을 구성하는 허영도 함께 소멸됩니다. ‘나는 남자야’라는 자의식에는 여자를 열등하게 보는 우월의식이, ‘나는 인간이야’라는 자의식에는 동물을 폄하하는 우월의식이, 그리고 ‘나는 마음을 비운 사람이야’라는 자의식에는 마음을 채운 사람을 깔보는 우월의식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장자는 열자의 상태를 너무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부엌일을 하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를 먹였으며,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 아직도 통용되는 가부장제를 열자는 가볍게 넘어서 있고, 다른 동물을 그저 인간 삶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인간중심주의도 그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달리 말해 남녀를 차별하지 않기에, 그리고 남자가 우월하다고 보지 않기에 열자는 부엌일을 할 수 있었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기에, 그리고 인간이 우월하다고 보지 않기에 열자는 돼지를 가족처럼 대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전국시대 중국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돼지 등 가축을 돌보는 것은 대인(大人)이라면 꿈에라도 할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열자는 기꺼이 육체노동을 긍정하는 결코 작지 않은 건강한 소인(小人)이 된 겁니다. 장자가 최종적으로 일자는 “모든 일에 특별히 편해하는 일도 없었다”는 말을 덧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허영을 찾아볼 수 없는 열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서서
호자는 허심으로 계함을 공포에 빠뜨려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호자는 허심으로 스승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반면 열자는 허심으로 아내와 돼지를 따뜻하게 품습니다. 그리고 열자는 허심으로 소인과 구별되지 않은 삶을 영위합니다. 허심을 연기했던 호자와 허심을 살아냈던 열자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건널 수 없을 만큼 멀고 아득합니다.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는 말처럼 열자가 일체의 것들을 비교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금덩어리나 돌멩이는 그에게 모두 비교 불가능한 단독자일 뿐이죠. 허영과 비교의 논리에 포획된 사람들의 눈에는 열자가 금덩어리의 가치를 부정하고 돌멩이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열자의 눈에는 금덩어리가 돌멩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혹은 돌멩이가 금덩어리보다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비교의식이 없기에 열자에게는 부재 의식도 없습니다. 열자는 ‘고기가 없어 요리를 못 하겠네’ 혹은 ‘청경채가 없으니 맛이 없을 거야’라며 투덜대는 요리사가 결코 아닙니다. 열자는 아무리 빈약한 식재료가 주어져도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열자에 게는 없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충만하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그는 어디든 가볍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남들 눈에 열악해 보이는 초원에서도 사막에서도 혹은 만년설이 쌓인 고산지대에서도 그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근사한 삶을 살아낼 테니까요.
흥미롭게도 모든 것이 비교 불가능하고, 따라서 우월을 매길 수 없는 것으로 볼 때 열자도 비교 불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세상에 가치의 우월을 매기는 자는 자신에게도 가치의 우월을 매기지만, 세상을 단독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도 단독적인 것으로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열자는 “세련된 나무 조각품이 다시 온전한 나무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기적이 발생한 겁니다. 대들보로 쓰려면 나무를 죽여야 하듯 세련된 나무 조각품도 나무를 죽여야 만들 수 있습니다. 열자는 대들보나 세련된 나무 조각품처럼 체제가 필요로 하는, 혹은 남들이 인정하는 삶을 부정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죽여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열자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래서 장자는 열자가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고 덧붙이는 겁니다. 괴연(果然)을 번역한 ‘우뚝’이라는 말이 당당함을 의미한다면, 독을 번역한 ‘홀로’라는 말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보지 않는 단독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선다”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서지 못하면 무언가에 기대고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자는 자신의 몸으로 서고자 합니다. 대인이 되어 소인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힘으로 먹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우뚝 홀로“라는 부사는 바로 이 의지가 관철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겁니다.
누군가에게 명령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 하기에, 열자의 삶은 번잡하고 장자의 표현처럼 “어지러워 보일” 겁니다. 하긴 밥을 하고 돼지를 기르고 집도 수리하고 빨래도 하며 의식주와 관련된 일을 몸소 행하는 열자로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내나 하인 혹은 노예에게 육체노동을 시키는 대인이 어떻게 열자의 마음을, 메추라기가 어떻게 대붕의 속내를 알겠습니까.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고 타인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의지, 혹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을 업겠다는 사랑에의 의지는 흐트러지지 않은 열자의 원칙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허심이 자유와 사랑의 삶, 혹은 타자와 소통하는 삶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밥이 저절로 되고, 돼지가 먹지 않아도 자라고, 옷이 스스로 깨끗해지는 일은 없으니까요. 마음을 비우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겁게 밥을 하고 행복하게 돼지를 기르고 개운하게 빨래를 하게 되는 겁니다. 열자 이야기를 마치면서 장자가 했던 마지막 말, “열자는 한결같이 이렇게 살다가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는 말이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죽을 때까지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서고자 했던” 열자, 늙어가는 몸으로 끝까지 사랑과 자유를 실천하려 했던 열자의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하니까요. 한결같다는 말, 마음을 비운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면, 열자는 이렇게 산 것입니다.
인용
23. 형이상학이라는 깊은 늪 / 25. 에히 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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