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장자가 장자로 다시 태어난 날
조릉 이야기
조릉의 수렵 금지 구역 근처에서 노닐고 있을 때, 장주는 남쪽에서 방금 날아온 기이한 까치를 보았다. 날개폭이 일곱 자이고 눈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듯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큰 날개로 날지도 못하고, 큰 눈으로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莊周曰: “此何鳥哉! 翼殷不逝, 目大不睹.”
장주는 자신의 옷자락을 걷고 밤나무 숲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석궁으로 그 새를 겨냥했다. 그때 그는 매미 한 마리를 목도 했는데, 그 매미는 방금 아름다운 그늘을 발견해 그 자신을 잊고 있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그 매미를 낚아채려 했는데, 그 사마귀도 얻을 것을 기대하며 자신이 드러났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 기이한 까치도 그 사마귀를 뒤따르며 이롭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인데, 그 까치도 이익을 기대하며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蹇裳躩步, 執彈而留之. 睹一蟬方得美蔭而忘其身. 螳螂執翳而搏之, 見得而忘形. 異鵲從而利之, 見利而忘其眞.
장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 “아!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연루되어,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장주가 석궁을 던지고 숲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사냥터 관리인이 그에게 욕하며 달려왔다. 장주는 집으로 돌아와 사흘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莊周怵然曰: “噫! 物固相累, 二類相召也.” 捐彈而反走, 虞人逐而誶之. 莊周反入, 三日不庭.
그러자 인저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겁니까?”
藺且從而問之, “夫子何爲頃間甚不庭乎?”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 자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조릉에서 노닐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기이한 까치가 이마를 스치고 날아들었을 때 나는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나의 실제 상황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냥터 관리인은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다.”
莊周曰: “吾守形而忘身, 觀於濁水而迷於淸淵. 且吾聞諸夫子曰: ‘入其俗, 從其令.’ 今吾游於雕陵而忘吾身, 異鵲感吾顙, 游於栗林而忘眞. 栗林虞人以吾爲戮, 吾所以不庭也.” 「산목」 8
장주(莊周)와 장자(莊子)의 차이
『장자』에는 장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장자의 삶과 사유를 직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장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에는 미묘한 차이가 보입니다. 장자(莊子)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있고, 그와 달리 장주(莊周)라는 이름으로 기술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장자 계열 이야기들과 장주 계열 이야기들이 있는 겁니다. 주(周)는 장자의 이름이고, 자(子)는 ‘선생’이라는 의미죠. 장자라는 경칭으로 진행되는 장자 계열 이야기들에서 이미 장자는 선생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계열 이야기들에 서 장자는 별다른 인간적 약점이 없는 위대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반면 장주로 불리며 묘사된 장주 계열 이야기들에서 장자는 인간적 냄새가 나는 인물로 나름 객관적으로 묘사됩니다. 장주 계열 이야기들에서 그가 성인(聖人)이나 도인(道人)의 느낌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래서 장자 계열 이야기들을 읽을 때는 거품을 좀 빼고 읽고, 반대로 장주 계열 이야기들을 읽을 때는 거품을 살짝 넣어서 읽을 필요가 있지요. 아마 두 계열 이야기들 사이 그 어딘가에 ‘장자’의 맨 얼굴이 있을 테니까요. 「산목」 편의 조릉 이야기는 장자가 아니라 장주를 주인공으로 한 가장 중요한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장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로 성장하게 한 중요한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릉 이야기에서 우리는 장자에게 익명의 스승과 인저(藺且)라는 제자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특히 장자의 제자 인저가 장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인저는 스승 장자가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개성을 갖춘 철학자로 탄생하는 과정,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다리로 우뚝 서게 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저가 장자 곁에 없었다면 조릉 이야기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결국 장자의 지적 성숙 과정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우리 손에 안겨준 공은 전적으로 인저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저의 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장자』의 원형적 판본을 만드는 데도 인저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일지라도 사후 그의 삶과 사유를 정리해줄 제자가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예수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는 사뭇 달랐을 것처럼 말입니다. 시조가 빛나기 위해서는 그 계승자가 창대해야만 하는 법입니다. 인저는 장자의 사상을 반석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장자의 지적 유산의 관리자였을 겁니다. 이후 장자의 후학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조롱이 야기를 만든 사람은 장자와 함께 인저의 실명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인저는 실명이 거론될 정도로 장자의 후학들에게 경시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으니까요. 자, 이제 인저가 들려주는 스승의 경험, 장주를 장자로 만든 그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볼 시간입니다.
장자는 조릉의 사냥 금지 구역 부근에서 노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손에는 습관적으로 석궁이 들려 있었습니다. 장자가 등불 아래에서 책만 읽던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여행의 귀재 장자는 능숙한 사냥꾼이기도 했던 겁니다. 그가 유목민적 감수성에 깊게 공감하게 된 것도 우연만은 아닙니다. 어쨌든 조릉 근처에 장자가 이르렀을 때, 거대한 까치가 그의 이마를 스치며 날아가 사냥 금지 구역 안의 밤나무 숲 어느 나뭇가지에 앉습니다. 일곱 자는 2미터가 넘는 길이니 정말 거대한 까치였죠. 아마도 이 까치가 대붕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붕의 모티브가 되었을 겁니다. 장자는 그 까치를 잡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장자가 거대한 까치를 잡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자신이 지금 수렵 금지 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군주나 귀족들은 자기 영지 안에 수렵 구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력자들의 놀이터였지요. 그러니 이곳에 침입해 사냥을 하는 것은 권력자의 재산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범죄였습니다. 물론 장자도 수렵금지 구역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 바깥에서 노닐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거대한 까치, 그 보기 힘든 사냥감을 보자 장자는 누구든 사냥할 수 있는 공간과 권력자만 사냥할 수 있는 공간을 가르는 선을 넘어가버린 겁니다. 거대한 까치를 겨냥해 석궁을 날리려는 순간, 매미 한 마리가 장자의 눈에 들어옵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지쳐 있던 매미는 시원한 그늘에 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매미가 시원한 그늘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몸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자의 눈에는 그 매미를 잡아먹으려는 사마귀 한 마리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조롱 이야기는 점점 깊어집니다.
매미, 사마귀, 까치, 장주가 자신을 잊은 까닭
사마귀도 상황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매미를 앞발로 잡아채려 할 때 사마귀는 자신도 외부에 노출되었다는 걸 망각했으니까요. 매미가 시원한 그늘에 정신이 팔려 “그 자신을 잊고 있었던[忘其身]” 것과 마찬가지로, 사마귀도 매미에 정신이 팔려 “자신이 드러났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겁니다[忘其形]”. 그제야 장자는 거대한 까치가 석궁을 들고 있는 사냥꾼, 즉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밤나무 숲에 앉은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까치는 사마귀를 잡아먹으려는데 정신이 팔려 사냥꾼의 표적이 된 겁니다. 매미와 사마귀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까치도 이익을 기대하며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고 있었던 겁니다[忘其眞]”, 조릉 이야기는 매미에 대해 “망기신(忘其身)”, 사마귀에 대해 “망기형(忘其形)”, 그리고 거대한 까치에 대해서는 “망기진(忘其眞)”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자신[其身]” “자신의 드러남[其形]”, 그리고 “자신의 실제 상황[其眞]”으로 표현을 바꾸면서 상황을 점진적으로 더 명료하게 묘사하는 기법이 인상적입니다. 매미가 ‘그 자신을 잊었다’는 말은 매미가 시원한 그늘에 심취해 자신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매미가 무방비 상태에 있어 사마귀의 먹이가 되리라는 사실이 아직 분명히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마귀가 ‘자신의 드러남을 잊었다’는 말은 ‘그 자신을 잊었다’는 표현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노출되었다는 뉘앙스로 그 누군가를 암시하니까요. 물론 여기서 그 누군가는 바로 거대한 까치입니다. 이어서 표현이 더 심화됩니다. 거대한 까치가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었다’고 할 때, 거대한 까치는 사마귀의 상위 포식자지만 동시에 장자의 사냥감이라는 상황이 분명해지니까요.
매미, 사마귀 그리고 거대한 까치가 모두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매미의 세계에는 시원한 그늘과 자신만 있어서, 이 세계에는 사마귀가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사마귀의 세계에는 매미와 자신만 있어서, 이 세계에는 거대한 까치가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까치의 세계에는 사마귀와 자신만 있어서, 이 세계에는 사냥꾼 장자가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서 묘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매미가 그 자신을 잊었을 때 매미가 실제로 잊은 것은 앞발을 들고 있는 사마귀였고, 사마귀가 자신의 드러남을 잊었을 때 사마귀가 실제로 잊은 것은 나뭇가지에 앉은 거대한 까치였고, 거대한 까치가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었을 할 때 이 거대한 까치가 실제로 잊은 것은 석궁을 겨냥하는 장자였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잊다’라는 뜻의 ‘망(忘)’이라는 글자에 주목해야 합니다. 보통 장자 사유에서 ‘망’은 빈 배처럼 자의식과 소유 의식을 잊은 긍정적인 상태, 빈 구멍처럼 바람을 맞아 그에 맞게 바람 소리를 낼 수 있는 소망스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조롱 이야기에서 ‘망’은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달리 말해 『장자』에서 ‘망’은 대부분 협소한 세계가 넓게 확장되는 계기를 가리키는데, 조릉 이야기에서 만큼은 ‘망’이 넓은 세계를 망각하고 협소한 세계에 갇히는 계기를 나타냅니다. 조릉 이야기를 읽을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어쨌든 매미에서 사마귀로, 그리고 사마귀에서 거대한 까치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을 직관하자마자 장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자신도 그 거대한 까치에 정신이 팔려 다른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망’의 상태에 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매미, 사마귀, 거대한 까치, 그리고 자기 자신! 바로 이 순간 거대한 까치에 정신이 팔린 자기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상위 포식자가 있으리라는 불길한 느낌이 장자의 몸을 감싼 겁니다. 마침내 장자는 수렵금지 구역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연루되어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장자의 소름 끼치는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로 밝혀집니다. “장주가 석궁을 던지고 숲에서 되돌아 나올 때, 사냥터 관리인이 그에게 욕하며 달려”온 겁니다. 조롱 이야기의 완전한 먹이사슬은 이렇게 완성됩니다. 그늘 → 매미 → 사마귀 → 까치 → 장자 → 사냥터 관리인! 물론 사냥터 관리인 뒤에는 군주나 귀족, 나아가 최종적으로 국가라는 최상위 포식자가 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장자가 수렵 금지 구역에서 조금만 늦게 나왔다면 사냥터 관리 인에게 잡혀 곤욕을 치렀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깨달음을 추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겠다는 기대, 시원한 그늘이든 매미든 사마귀든 거대한 까치든 무언가를 얻으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기대가 중요합니다. 이익이 되는 대상에 정신이 팔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미끼의 유혹에 빠진 물고기가 된다는 겁니다. 낚싯바늘은 보지 못하고 거기에 꽂힌 벌레만 보는 물고기입니다. 벌레와 자신만이 있는 좁은 세계에 갇힌 물고기는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온 걸 모릅니다. 그 대가는 치명적입니다. 목숨마저 부지하기 힘드니 자유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대붕의 첫걸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득에 대한 기대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생각이니까요. 어떤 균형이 필요합니다. 물고기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먹이를 먹지 않아도 죽고, 먹이를 먹어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낚싯바늘에 달린 먹이 와 그렇지 않은 먹이, 다시 말해 미끼가 되는 먹이와 미끼가 아닌 먹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장자는 고민을 거듭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 나아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르침마저 근본적으로 흔들렸으니까요. 장자의 고뇌는 사흘간 계속됩니다. 사흘이라는 기간은 장자에게 짧지만 긴 시간이었습니다. 장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로 탄생하는 잉태와 출산의 시간이기도 했지요. 당연히 인저는 불안한 마음으로 스승의 고뇌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의 안색이 너무나 좋지 않아 걱정이 되어도 물어볼 수 없었던 겁니다. 스승에 대한 예의인 셈이죠. 다행히도 사흘이 지나 스승의 안색이 조금 풀어지자, 인저는 자초지종을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에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겁니까?” 사흘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장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조릉의 경험 이전의 자신과 조릉의 경험 이후의 자신 사이의 간극과 단절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믿었다가 배신당하는 것이 불신했다가 배신당하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는 법입니다. 장자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인저와 같은 제자를 가르친 것도 자신이 나름 진리를 알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조릉의 경험은 이런 자부심을 산산이 부수고 맙니다. 그렇다면 조릉 경험 이전 장자의 생각은 극복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잘해야 수정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장자는 조롱 이전 자신의 생각과 삶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장자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그 자신을 잊으려 했습니다. 둘째, 장자는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장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마다 다른 규칙들을 존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릉의 경험은 장자의 세 가지 생각에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먼저 자신을 잊을 정도로 자신에게 ‘드러난[形]’ 대상이나 사건에 몰입하면 우리는 협소한 세계에 갇히고 만다고 조롱의 경험은 말해줍니다. 한마디로 장자는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의 진실을 제대로 체험한 셈입니다. 자신을 잊을 정도로 드러난 것들에 몰입해야 한다는 장자의 첫 번째 생각에 이렇게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바로 여기서 자기 마음을 맑은 연못처럼 만들어 주어진 상황을 투명하게 비추겠다는 장자의 두 번째 생각도 의심에 빠지고 맙니다. 거울을 생각해보세요. 거울은 자기 뒷면과 자기 옆에 있는 것은 비추지 못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드러난 것들을 맑은 연못처럼 투명하게 비추고 있으니, 모든 것을 비추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시 효과로 인해 마음은 실제로 자신이 일부분만 비추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첫 번째 생각과 두 번째 생각에 짙은 영향을 미쳤을 스승의 가르침도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대상이나 사건에 몰입하면 그것들이 다른 문맥에 있을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매미가 자신을 잃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낀 서늘한 그늘은 사마귀가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지만 사마귀가 있으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입니다. 문제는, 매미로서는 시원한 그늘이 어떤 문맥에 있는지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마귀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미는 그 시원한 그늘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入其俗, 從其令]!”는 스승의 가르침은 순진한 주장으로 판명됩니다. 그 사회에 들어가지 않고 그곳의 규칙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시원한 그늘에 들어가 사마귀의 표적이 된 매미에게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는 충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흘은 장주가 장자로 태어난 인고의 시간, 질적 단절의 시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태어난 장자는 아직 어린 장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저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장자는 장자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셈입니다. 사흘 동안 침묵하면서 장자는 기존의 생각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나흘째에 장자는 자신의 사유와 삶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아직 막연하고 불안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조릉의 경험 이전으로 퇴행하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어쨌든 ‘잊는다’는 뜻의 망(忘) 개념을 계속 사용한다면, 그것은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세계로 열리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겁니다. 또한 사전에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내 앞에 있는 먹이가 미끼 인지 아니면 그냥 먹이인지를 식별하려는 데 온 힘을 모을 겁니다. ‘노닌다’는 뜻의 유(遊) 개념도 주어진 대상이나 사건에 그냥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라면 몰입해서 먹고 미끼라면 미련 없이 떠난다는 의미로 확장되리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어쩌면 조릉에서 장자는 자신의 행동으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사유와 삶의 방향을 미리 보여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장자는 서늘한 느낌에 수렵 금지 구역을 허겁지겁 탈출합니다. 비록 당장은 범죄자로 몰려 도망갔다는 부끄러운 기억이겠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입니다. 그 서늘한 느낌! 장자가 거대한 까치와 자신만으로 구성된 협소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아쇠였습니다. 사마귀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사마귀가 있다는 서늘한 느낌이 들면 매미는 신속하게 시원한 그늘을 벗어나 있는 힘을 다해 나무 위로 날아올라야 합니다. 물론 쾌적하고 시원한 그늘을 포기하고 땡볕에 노출되는 가난함을 감당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 사회에 들어가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곳을 신속히 떠나라!” 사마귀도 그렇고 거대한 까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물러도 좋다면 머물고, 떠나야 한다면 과감히 떠나는 것! 바로 이것이 소요유(逍遙遊)니까요. 마침내 대붕의 첫걸음을 시작한 장자입니다.
인용
26. 깨기 힘든 악몽 / 28. 허영의 세계에서 기쁨의 공동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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