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타자와 함께 춤을
포정 이야기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며 소를 잡는데, 설컹설컹, 썩둑썩둑,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소 잡는 것이 무곡 「상림(桑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경수(經首)」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이에 문혜군이 말했다. “참 훌륭하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표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因]’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훌륭한 푸주한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푸주한이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간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하지만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 『장자』 「양생주」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체험된 상황들’을 위하여
숫자나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지배/피지배 관계 혹은 국가질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거나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처음 등장한 거대 문명 혹은 최초의 국가들이 복잡한 숫자나 문자 체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을 남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세금 체계, 법률 체계 그리고 행정 체계는 숫자나 문자로 뒷받침됩니다. 숫자나 문자는 기억과 분석 그리고 예측이라는 마법을 부리는 요술 지팡이니까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가는 국가의 요술 지팡이를 그대로 벤치마킹합니다. 기업 내부에 떠돌아다니는 문서만 살펴봐도, 복잡한 숫자들과 문자들이 상명하복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잘 해독해 실행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원초적 분업이 숫자와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죠. 정신노동은 숫자와 문자를 다루는 노동을 말하니까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농부, 어부, 광부, 목동, 노동자 등의 육체노동이 없다면, 정신노동은 그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억압체제를 받아들인 대부분 사람들은 정신 노동에 종사하려고 합니다. 수고는 덜한 데 비해 이익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그야말로 동물적인 판단에 따르는 셈입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이나 오늘날의 입학시험, 임용 시험 혹은 입사 시험에 열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림축산식품부 관리나 혹은 그와 관련된 학과의 대학교수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소에 대해 박식함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소를 직접 기르거나 도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에 경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관리나 대학교수들에게 직접 소를 기르거나 도살해보라고 하면, 그들 중 제대로 소를 기르거나 도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은 문자나 숫자로 이루어진 책에서 배운 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 뿐이니까요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의 저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이라면 아마 실천적 지식(know-how)은 이론적 지식(know-that)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론적 지식이 실천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했을 겁니다. 장자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씨름하는 육체노동자, 전국시대 당시 용어로 말해 소인(小人)이 작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큰 존재라고 긍정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육체노동자는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지만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에 기생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에 비해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는 소를 기르는 일, 소를 도살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전거 타는 일, 여행하는 일, 사랑하는 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책이나 영상으로 떠올리는 자전거 여행지 혹은 매력적인 사람은 실제로 타는 자전거, 걷고 있는 대지 혹은 만나고 있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 울퉁불퉁한 길을 잘 걷는 사람, 제대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뿌듯한 행복감에 젖어들 테니까요. 이럴 때 우리 삶은 정신과 육체라는 해묵은 이분법을 넘어 완전해지는 게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지식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천적 지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문자와 숫자로 기억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며 예측하려 하니, 현실을 체험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힘든 법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타자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혹은 타자와 ’같이 하면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삶도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육체노동자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타인이든, 소이든, 나무이든, 물고기든, 철이든 티타늄이든, 혹은 땅이든 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죠. 반면 상명하복에 포획된 정신노동은 삶의 세계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기 어렵습니다.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이제 사무실에서 나와 햇빛이 찬란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영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눈을 떼고 창가로 불어들어오는 바람과 꽃내음을 느껴야 합니다.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표상된 상황들(vorgestellte Situationen)’과 ‘체험된 상황들(erlebte Situationen)’을 구별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체험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상황은 나만이 아니라 타자와 어울려야 만들 수 있습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의 기원인 표정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체험된 상황이 좌절감을 안기지 않도록 만드는 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인용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 10. 텅 빈 하늘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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