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은 오직 하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주의가 모든 문맥과 무관한 텍스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텍스트주의의 핵심은 하나의 문맥만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을 보세요. 그에게는 손약이 빨래하는 데만 사용되는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로 주어집니다. 오나라도 월나라도 그리고 제나라도 심지어 한반도도 그에게는 송나라와 질적으로 같은 세계일 뿐이죠. 그래서 텍스트주의는 ‘문맥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문맥 단수주의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콘텍스트주의는 ‘문맥이 다양하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문맥 단수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문맥 복수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죠. 이방인은 손약이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최소 두 가지 문맥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다른 문맥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문맥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문맥, 겨울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문맥도 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손약의 발견 혹은 발명으로 새로운 문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송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손약은 겨울에도 가능한 빨래 산업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혹은 겨울 바다에서 조업을 가능하게 해서 북쪽의 추운 지역 바닷가에 어촌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고층 건물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지지만, 역으로 엘리베이터 때문에 새로운 고층 건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맥 복수주의와 함께 문맥 생산주의는 콘텍스트주의의 두 날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혜시의 반박에 장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장자는 손약 이야기로 혜시를 송나라 사람과 같은 텍스트주의자, 즉 문맥 단수주의자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박은 무언가를 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의 박은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물을 담아 나르기에는 두께가 너무 얇아 곧 깨지고 말 것 같았고, 쪼개서 바가지를 만든다 해도 너무 평평해 바가지로 쓸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혜시는 자기 박이 무용하다고 판단했고 파괴해버린 겁니다. 여기서 장자는 박은 물 등 액체를 담을 수도 있지만 물 위에 띄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박은 그릇이 될 수도 “큰 술통으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혜시의 마음을 “쑥의 마음”, 즉 ‘봉지심(蓬之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쑥은 땅바닥에 딱 붙어 있는 풀입니다. 송나라 사람에게 손약과 빨래가 문맥상 뗄 수 없이 밀착되어 있듯, 혜시에게 박은 물 등을 담는 것이라는 문맥에 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땅에 붙어 있는 쑥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이렇게 무용하다면 파괴될 수 있다는 혜시의 반론은 해체되고 맙니다. 무용하 다는 큰 박은 사실 무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용하다면 파괴된다’는 혜시의 말이 옳다고 전제하고, 장자는 지금 무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파괴해도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간혹 체제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쓸모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폐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의 문맥주의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복수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이죠. 문맥에 따라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는 법”입니다.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다른 문맥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문맥을 만들어도 됩니다. 그만큼 장자의 문맥주의는 강력합니다. 일리(一理)가 있다는 말! 이것은 문맥주의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죠. 거목이 쓸모가 없어서 거목으로 자랄 수 있었다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커다란 박이 강이나 호수에 띄운 큰 술통으로 쓰이면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일리가 있죠. 그렇지만 장자의 일리가 개체들의 삶을 긍정하는, 혹은 개체들이 자기 삶을 향유해야 한다는 그의 이념을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혜시가 큰 박을 무용하다고 여겨 부수거나 세상 사람들이 재목이라고 나무를 자르는 것에도 장자가 일리 있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무용과 유용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더 근사한 문맥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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