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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본문

책/철학(哲學)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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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으로 무명을 빨아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터본 적이 있으세요? 손이 트면 물이 닿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튼 손에 물이 닿으면 엄청 쓰리고 아프니까요. 빨래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겠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의 힘으로 손이 트지 않으니, 추운 겨울에도 그는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인이 빨래하는 사람을 찾아와 그 비법을 금일백 냥에 팔라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은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보고, 그것을 겨울 전투에서 수군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송나라 사람은 지금까지 그 비법의 힘으로 빨래를 해서 금 몇 냥만을 벌어 왔을 뿐입니다. 금일백냥을 준다는 말에 마침내 그는 이방인에게 비법을 팝니다. 이방인은 비법을 들고 오()나라(BC? ~ BC 473)로 떠나죠.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그 오나라입니다. 고사처럼 오나라 최고의 라이벌은 월()나라(BC? ~ BC 334)였죠. 전쟁이 반복되면서 적개심은 두 나라 군주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람들 내면에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두 나라 사람들은 같은 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남중국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두 나라의 전쟁은 주로 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이 가져온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두 나라 사이의 팽팽한 전력에 불균형을 가져옵니다. 오나라 수군 대장이 된 이방인은 그 비법으로 겨울 수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오나라 수군들이 손이 트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전과였죠. 전승의 공으로 이방인은 오나 라의 영주가 됩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그것으로 여전히 무명 빠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 영주가 된 셈입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빨래할 때 사용한 것과 수전에 사용한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손약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장자 사유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맥주의 혹은 맥락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콘텍스트주의(contextualism)입니다.

 

제자백가 대부분이 텍스트(text)에 집중했을 때, 장자만이 콘텍스트(context)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서양은 본격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숙고하게 되죠.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젊은 시절의 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세계를 지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텍스트주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성숙해지면서 그는 콘텍스트주의자로 변합니다. 이때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라는 책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는 쓰임[use]에 있다고 말하니까요. 동일한 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혹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혼 시 절에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사랑해라고 말할 때, 결혼한 지 10년 된 남편이 출근하며 문 앞에서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너무나 무거운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지으며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등등. 동의어를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는 잠시 헤어지는 것도 안타까워가 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다녀올게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동의어는 먼저 세상을 떠나 미안해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똑같지만 그 문맥은 매우 상이하죠. 마지막 문맥에서의 사랑해라는 말을 첫 번째나 두 번째 문맥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일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쓰임을 뜻하는 유즈(use)’를 강조할 때 장자가 같은 뜻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손 트지 않는 약, 즉 손약이 사랑해라는 말과 같은 위상에 있다면, 송나라의 문맥과 오나라의 문맥, 혹은 빨래하는 문맥과 수전을 치르는 문맥은 사랑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세 가지 문맥과 위상이 같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처럼 어느 문맥에 놓이느냐에 따라 손약도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손약 이야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문맥주의적 입장을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라고 요약합니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이 텍스트에 집중하는 사유를 상징한다면, 그 송나라 사람에게 비법을 사서 오나라의 영주가 된 이방인, 즉 객()은 콘 텍스트주의자를 상징합니다. 텍스트주의자와 콘텍스트주의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송나라 사람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반면 이방인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전을 할 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죠. 우리는 왜 송나라 사람이 손약 비법을 이방인에게 팔 수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송나라 사람은 확신했을 겁니다.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처럼 빨래를 해서 돈을 벌 것이라고 말이죠. 만약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 사람 옆에서 빨래하는 일을 한다고 했으면, 그는 결코 비법을 팔지 않았을 겁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7. 허영, 애달파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 9. 타자와 함께 춤을

쓸모에 관한 혜시와 장자의 논쟁

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문맥은 오직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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