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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5. 에히 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총명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5. 에히 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총명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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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등불의 불을 끄고

 

 

25. 에히 파시코 아니 그냥 파시코!

총명 이야기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 눈이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모양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吾所謂聰者, 非謂其聞彼也, 自聞而已矣; 吾所謂明者, 非謂其見彼也, 自見而已矣.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저것을 보는 경우나 스스로 얻지 않고 저것을 얻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얻으려는 것을 얻음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에 맞추려함이지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夫不自見而見彼, 不自得而得彼者, 是得人之得而不自得其得者也, 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也. 변무4

 

 

릴케가 보는 법을 배운 이유

 

독일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 말테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Ich lerne sehen)”고요. 1910년에 출간된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에 나오는 말입니다. 얼핏 지나칠 수도 있지만 곱씹으면 무섭고도 섬뜩한 말입니다. 스물여덟 살까지 말테, 즉 릴케도 분명 무언가를 보았을 테니까요. 도시를, 거리를, 건물을, 산을, 강을, 구름을, 여자를, 남자를,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꽃을, 새를 무수히 보고 또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릴케는 이를 모조리 부정합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릴케는 이제야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궁금해집니다. 이제까지 릴케는 어떻게 봤던 것일까요? 릴케는 남이 보는 것이나 남이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들을 보았을 뿐입니다. 달리 말해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이나 자신이 보아야 한다고 여기는 걸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릴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는 법을 새로 배우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보고있는 걸 자신이보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릴케로 하여금 이런 비범한 자각에 이르게 했을까요? 그건 릴케가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시를 써보아도 이미 누군가가 쓴 시와 비슷하기만 합니다.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이런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남의 눈으로 보고 그걸 글로 표현하니, 릴케의 시는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시가 되고만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릴케는 자기 눈으로 보지 않으면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자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유모차나 누군가의 등에서 벗어나 이제 걷는 법을 익혀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말 입니다. 자기 발로 걷기 시작한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넘어질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길을 잃을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감당해야만 하는 역경일 겁니다.

 

나는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릴케만이 아니라 모든 인문정신이 공유하는 슬로건입니다. 군주가 보라는 대로 보지 않고, 아버지가 보라는 대로 보지 않고, 선생님이 보라는 대로 보지 않고, 신이 보라는 대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 삶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습니다. 군주, 아버지, 선생님 그리고 신이 자신들이 보는 대로, 자신들이 보라는 것만을 보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억압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긍정했던 인문정신이 이런 억압적 상황을 묵과할 리 없습니다. 특정 시선을 강요하는 억압체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억압에 복종해 스스로의 눈으로 보지 않는 이웃들을 깨우려 간절히 노력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눈을 저주하고 기꺼이 군주, 아버지, 선생님, 신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무서워하고 불안해하는 이런 유아적 정신이 바로 노예의 정신이자 종교적 정신입니다. 신약성경요한복음에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보지 아니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만큼 종교는 인간들이 스스로 보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을 긍정하고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회의(懷疑)한다면, 보이지 않는 신이나 사후세계라는 개념으로 인간들을 지배하는 종교는 설 자리가 없어질 테니까요. 그러니 보지 아니하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보지 않게 되었을 때 복은 인간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신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제들에게 복이 있게 될 겁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지만, 불교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인간은 부처를 숭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처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르침, 종교로서는 정말 개운치 않은 종교가 불교입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들에게 복이 있으려면 중생들은 부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중생들이 사찰을 찾아 시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면 붕괴되는 종교 탄생할 때부터 그 내부에 시한폭탄을 장착했던 종교! 그것이 불교입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는 긴박감 때문인지, 종교성과 함께하는 불교의 인문성은 더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밝은 대낮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이 더 인상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앙굿따라니카야(Aṅguttara Nikāya)에 실린 작은 경전 마하나마경(Mahānāmasutta)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야기합니다. “에히 파시코(chi pasiko)!” “와서 보라(come and see)!”는 아주 강렬한 인문주의 선언입니다. 내 말을 믿지 말고 여기로 와서 너의 눈으로 직접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을 뜻하는 파삼(passam)’에서 유래한 파시코라는 말은 강렬합니다. 그렇습니다. 싯다르타는 중생들이 자기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를 원했던 겁니다. 중생들이 자기 눈으로 보게 되면, 그들도 자신처럼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된다는 걸 싯다르타는 알았으니까요. 바로 여기서 릴케의 발원은 부처가 되겠다는 의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 보는 법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은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라!”는 말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와서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보면되니까요. 변무편의 총명 이야기에서 장자의 입장은 바로 이겁니다.

 

 

 

남의 눈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보라

 

자기 곁에 와서 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보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제자가 스스로 자기 눈으로 보기를 바라는 싯다르타의 애정, 제자가 스스로 볼 때까지 돌봐주겠다는 부처의 마음을 느낍니다. 자비의 감각은 바로 여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쿨합니다. 그냥 스스로 보라!”고 말할 테니까요. 아이가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탈 때까지 자전거의 뒤를 잡아주는 자상함은 장자에게 없습니다. 장자는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넘어질까봐 우려하며 자전거를 잡아주는 애정,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는 아이를 잡아주려고 그 곁에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노파심이 오히려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타게 되는 순간을 지연시킨다는 사실을요. 물론 아이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질 수 있고, 다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전거 타기를 끝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장자는 아이를 안아주지도 격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타지 말든가!”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의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신, 군주, 아버지, 선생의 눈으로 보려 하고 심지어 타인에게도 그러기를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장자는 그냥 등을 돌리고 떠납니다. “아님 말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니까요. 물론 장자가 보는 법을 이야기한 것도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그의 소명의식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눈으로 보는 장자를 목도하고 어떻게 하면 스스로 볼 수 있는지 그에게 물었을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스스로 보는 법을 말한 겁니다. 총명 이야기에서 릴케의 조바심이나 싯다르타의 노파심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총명 이야기라는 제목에 등장하는 총명(聰明)’이라는 말은 지금은 머리가 좋고 지적인 사람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총명은 원래 탁월한 청각 능력이나 시각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귀가 밝다는 뜻이고, ‘()’눈이 밝다는 뜻이죠. 하긴 잘 듣고 잘 보아야 멍청해 보이지 않으니, 총명이라는 말이 똑똑한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이나 진짜로 똑똑한 사람은 앵무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유인은 표절자가 아니라 작가(author)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장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장자는 자기 생각을 더 분명하고 더 인상적으로 피력하기 위해 총명이라는 단어의 감각적 의미를 되살려내려고 합니다. 장자가 총명을 분리해서 다루는 것으로 총명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먼저 ’, ‘귀가 밝다는 것의 의미를 다릅니다. 처음부터 장자는 자기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힙니다. 특정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스스로 들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핵심이라는 겁니다. 간단한 예를 생각해보죠. A바깥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라고 말하자, B가 귀를 기울이다 말합니다. “, 그러네. 늑대가 텐트 주변을 돌고 있는 소리야.” 분명 BA보다 청력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A가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다면 B는 늑대가 조심스레 걷는 그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이 경우 A스스로 들은사람이라면, B는 스스로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A가 들어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B는 늑대 소리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AB보다 귀가 밝은 게 아닐까요? 그래서 장자는 말했던 겁니다.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요.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과 스스로 듣는다는 것 사이에는 묘한 의미의 뒤틀림 혹은 불일치가 있습니다. 사실 양자가 엮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나 있습니다. 남이 저 소리를 들어보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지 식별한 사람, 남이 저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 저 소리를 스스로 막연히 듣고 무슨 소리인지 식별한 사람, 저 소리를 스스로 막연히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 이중 남이 저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이나 저 소리를 스스로 막연히 듣고 무슨 소리인지 식별한 사람중에 누가 더 귀가 밝은지 고민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나머지 두 경우를 놓고 저울질했던 것 같습니다. ‘남이 저 소리를 들어보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지 식별한 사람저 소리를 스스로 막연히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중에는 어느 쪽이 귀가 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장자는 후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왜일까요? ‘남이 저 소리를 들어보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지 식별한 사람은 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막연한 소리조차 듣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저 소리를 스스로 막연히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텐트에 함께 있던 지인의 귀를 이용해 무슨 소리인지 바로 식별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날이 밝은 뒤 캠핑장을 살펴보고 늦게나마 무슨 소리인지 식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눈이 밝다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 눈이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모양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요. 여기서도 남이 저것을 보라고 해서 어떤 것인지 식별한 사람보다는 저것을 스스로 막연히 보고는 있지만 어떤 것인지 식별하지 못한 사람이 더 눈이 밝다는 것이 장자의 입장입니다.

 

 

 

팩트는 팩트가 아니다

 

이게 팩트야!”라는 표현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니 이걸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때 팩트라고 강조된 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는 특정한 무언가를 팩트라고 강조하며 그것을 보라고 유혹합니다. 예를 들어 연예인의 스캔들이라는 팩트를 강조해 국민들로 하여금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에서 눈을 돌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계급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직원을 쓰는 대신 편의점에서 밤샘하는 자영업자의 모습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힘든 대학생들 의 모습을 팩트로 부각시키는 겁니다. 국가의 전횡을 막으려는 저항운동에 맞서, 시위로 인한 교통체증에 짜증 내는 시민들의 모습을 팩트로 강조하는 것은 애교에 가깝죠. 여기에 데이터나 통계 기법까지 도입하면 국가가 보라고 유혹하는 팩트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게 됩니다. ‘팩트 물신주의라고 해도 좋고 팩트 형이상학이라고 해도 좋을 사태입니다. 연예인이 마약을 한 건 분명 팩트이고, 최저임금이 올라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구하기 힘든 것도 분명 팩트이고, 시위로 길이 막혀 불편함을 느끼는 시민이 있다는 것도 분명 팩트입니다. 그러나 이런 팩트는 가치 중립적인 팩트나 순수한 팩트가 아니라 이미 특정 해석이 장착된 팩트이거나 보라고 강요된 팩트에 불과합니다. 그냥 외워두면 편합니다. 팩트는 팩트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보라는 팩트만 보다 보면 우리는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국가의 시선으로만 보니까요. 이럴 때 우리의 눈은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국가의 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의 팩트 물신주의 전략은 사실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배운 겁니다. 매스컴을 통한 상품홍보 전략을 생각해보세요. 최근 전기 자동차 광고가 좋은 예일 겁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가 남의 일이나 먼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위기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무더위, 집중호우, 산사태, 물 부족 등등을 온몸으로 겪고 있죠. 지금까지 자동차 자본은 제조 과정에서부터 생산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생태계를 그야말로 초토화시킨 주범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이웃들과 함께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경유나 휘발유로 움직이는 차를 타지 말고 전기자동차를 타서 환경을 보호하고 미래를 구하자고 호소합니다. 내연기관 자동차와 달리 전기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배출하지 않습니다. 이건 팩트입니다. 그러나 이 팩트는 전기 자동차에 내장된 배터리를 충전할 전기를 만들기 위해 생태계를 얼마나 많이 파괴하는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팩트 물신주의의 극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 자본만이 팩트 물신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액정 화면을 보세요. 소위 셀럽들이 입고 먹고 누리는 상품들, 영화처럼 근사한 편집 기술로 매력을 더한 상품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을 겁니다. 세련된 사람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상품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이미지와 함께, ‘당신도 세련되고 여유로우려면 이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은근한 유혹도 이어집니다. 팩트 물신주의가 상품 물신주의에서 유래한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액정화면이 보여주는 상품이 아닌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자본의 눈으로 보게 되고 맙니다. 그 결과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임금은 고스란히 자본의 주머니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눈이 없는 것을 ()’이라 하고, 귀가 없는 것을 ()’이라 합니다. 맹이라는 한자는 을 뜻하는 ()’없다는 뜻의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롱이라는 한자는 을 뜻하는 ()’를 뜻하는 ()’로 구성됩니다. 뱀이든 용이든 파충류에게는 귀가 없다는 것에 착안한 글자입니다. 어쨌든 맹인이나 농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귀가 되고 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누군가 자신이 귀와 눈이 되어줄 테니 너는 스스로 듣지도 보지도 말라고 유혹하거나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유혹과 강요에 복종하는 순간 우리는 기묘한 맹인이나 엽기적인 농인이 되고 맙니다. 소요유8에서 장자가 말했던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어찌 몸에만 농맹(聾盲)이 있겠는가? 저 앞에도 역시 농맹이 있다[唯形骸有聾盲哉? 夫知亦有之].”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경우보다 더 웃픈상황입니다. 이런 희비극을 폭로하는 것이 총명 이야기입니다. 국가나 자본의 팩트 물신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들을 수 있거나 특정한 저것의 모양을 볼 수 있는 것보다 스스로 듣고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을 장자가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제야 총명 이야기의 핵심이 특정한 저것의 소리특정한 저것의 모양이라고 번역한 ()’라는 글자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저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나 국가 혹은 자본이 보라고 유혹하거나 강요하는 팩트였던 겁니다. 그래서 총명 이야기 후반부에서 장자는 말합니다.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저것을 보는 경우나 스스로 얻지 않고 저것을 얻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얻으려는 것을 얻음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에 맞추려 함이지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지 못한 채, 자신의 소중한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러니 싯다르타는 노파심에 절절하게 호소했던 겁니다. “내게 와서 네 눈으로 보라!” 그러나 장자는 사람들이 국가나 자본의 눈 대신 스승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마저 경계합니다. “네가 있는 그곳에서 네 눈으로 보라!” “에히 파시코가 아니라 그냥 파시코!” 릴케는 장자에게 미소를 던집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24. 열자는 이렇게 살았다! / 26. 깨기 힘든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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