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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5. 자유인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애태타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5. 자유인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애태타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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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자유인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

애태타 이야기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는 못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애태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었던 젊은 남자들은 그를 사모해 떠나지 못했고, 그를 보고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어요라고 간청하는 젊은 여자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일찍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고,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호응했을 뿐이죠.

魯哀公問於仲尼曰: “衛有惡人焉, 曰哀駘它. 丈夫與之處者, 思而不能去也; 婦人見之, 請於父母曰: ‘與爲人妻, 寧爲夫子妾, 數十而未止也. 未嘗有聞其唱者也, 常和人而已矣.

 

() 제가 그를 불러 살펴보니 정말 온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못생겼더군요. 저와 함께한 지 몇 달이 되기도 전에, 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한 해가 되기도 전에 저는 그를 신뢰하고 말았습니다.

() 寡人召而觀之, 果以惡駭天下. 與寡人處, 不至以月數, 而寡人有意乎其爲人也; 不至乎期年, 而寡人信之.

 

() 결국 저는 나라를 그의 손에 맡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것처럼 실의에 빠졌고, 더 이상 이 나라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 卒授之國. 無幾何也, 去寡人而行. 寡人恤焉若有亡也, 若無與樂是國也. 是何人者也!”

 

공자가 말했다. “() 그는 분명 소질은 완전하지만 덕은 드러나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仲尼曰: “()是必才全而德不形者也.”

 

애공이 물었다. “‘소질이 완전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哀公曰: “何謂才全?”

 

공자가 대답했다.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능력과 무능함,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것은 모두 사태의 변화이고 부득이한 움직임이어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사유로서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로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거나, 이런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어서는 안 되죠.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즐겁게 하여, 타자와 소통해도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연속성에 틈이 없도록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것이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마음에 그에 맞는 때를 생성시키는 겁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소질이 완전하다는 말의 의미죠.”

仲尼曰: “死生·存亡·窮達·貧富·賢與不肖·毁譽·飢渴·寒暑, 是事之變·命之行也. 日夜相代乎前, 而知不能規乎其始者也. 故不足以滑和, 不可入於靈府. 使之和豫, 通而不失於兌. 使日夜無卻, 而與物爲春, 是接而生時於心者也. 是之謂才全.”

 

애공이 물었다.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何謂德不形?”

 

공자는 대답했다. “고르다는 것은 최고로 물이 안정되어서 표본이 될 만한 상태를 말하죠. 안으로부터 잘 보전되고 밖으로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조화로움을 이룬 결과물입니다. 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서 타자는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법이죠.”

: “平者, 水停之盛也. 其可以爲法也, 內保之而外不蕩也. 德者, 成和之修也. 德不形者, 物不能離也.” 덕충부5, 6

 

 

추남 애태타의 비밀

 

정착생활과 유목생활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유목민은 떠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있다는 것이 핵심이니까요. 천하든 어떤 국가나 제국이든 유목민은 머물 수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양과 염소, 낙타와 함께 유목민은 물과 풀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떠납니다. 이렇게 도달한 곳이 지배와 복종이 작동하는 천하일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천하는 유목생활 동안 잠시 머무는 임시 거주지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천하는 알타이산맥 고지대 초원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곳에 있을 수 있지만 도심지 근처 하천에 잠시 머무는 두루미처럼 말입니다. 자유인이 우리 곁에 잠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 유목민이 방금 우리에게 미소를 던지며 인사했을 수도 있다는 것! 대붕이 날갯짓으로 바람을 일으켜 우리 머리카락을 흩날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영토국가에 포획되어 지배와 복종 그리고 허영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자유인의 손을 잡을 기회, 유목민의 말을 탈 기회, 그리고 대붕의 등에 올라탈 기회입니다. 자주 오지 않는 기회라고도 할 수 있고, 항상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부라리며 기회를 잡으려고 혈안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자유의 바람은 매혹적인 향수처럼 우리에게 스며들 테니까요. 단지 우리는 그 매력에 몸을 맡기면 됩니다. 매캐한 연기에 질식할 것 같던 사람이 신선한 공기를 맡았다면, 그는 웬만해서는 다시 매캐한 연기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장자내편 중 다섯 번째 편은 덕충부편입니다. ‘덕충부라는 말은 매력이 충만한 징표라는 의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편에는 우리에게 소요유, 즉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르쳐주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들은 우리 옆에서 자유인의 삶을 살아냅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겁니다. 맞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날갯짓이 만드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면 우리의 가슴은 자유의 희망으로 부풀어 오를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대붕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대붕이 될 때까지 대붕 곁에 있으려 할 겁니다. 덕충부편의 수많은 이야기 중 압권은 그래서 애태타 이야기입니다. 대붕과도 같은 자유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왜 그에게 저항할 수 없이 빠져 드는지, 도대체 자유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매력을 뿜어 내는지를 이 이야기만큼 극적이고 친절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으니까요. 애태타(哀駘它)슬픔을 자아낼 정도로 못생긴 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못생긴 상태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서 저 못생긴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는 걱정마저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애태타는 극단적인 추남 혹은 최상급으로 못생긴 남자입니다. 당연히 애태타는 혐오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 달리 애태타는 매력의 화신이었습니다. 애태타 이야기에서 장자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 추남이 뿜어내는 매력의 원천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애태타 이야기는 공자에게 던지는 노나라 군주 애공의 흥미로운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위나라에서 설명하기 힘든 사건, 최고의 추남이 최고의 매력남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애태타와 함께 있었던 젊은 남자들은 그를 사모해 떠나지 못했고, 그를 보고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어요라고 간청하는 젊은 여자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외형적 아름다움에 가장 민감한 것이 젊은이들입니다. 그런데 위나라 젊은이들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애태타를 보면 그와 함께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이 기이한 현상은 위나라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더 멋지고 더 아름답고 더 지적이고 더 말 잘하고 더 능력 있어 보이려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허영의 세계입니다. 애태타는 점점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젊은이들의 지도자가 되려는 지식인들이나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려는 미남들이 애태타를 가만둘 리가 없죠. 그들은 애태타가 외모 이외의 매력을 어필해 순진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고 짐작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애태타는 사이비 교주와 같으리라는 추정입니다. 애태타를 직접 관찰한 결과, 그는 사이비 교주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고,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호응했을 뿐이니까요. 지금 장자가 언뜻 애태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애태타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먼저 무언가를 말하거나 상대방에게 지적질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추임새만 잘한다고 모든 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추임새는 아부꾼이나 아첨꾼으로 낙인찍힐 빌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도대체 애태타의 추임새는 어떤 추임새였던 걸까요? 이런 의문을 품고 애태타 이야기를 더 읽어보도록 하죠.

 

 

 

애태타는 왜 떠났을까

 

최고의 미남도 부러워할 위나라 최고의 추남이 뿜어내는 매력의 비밀은 더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애태타가 위나라를 넘어서 노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이유입니다. 노나라 군주 애공은 애태타를 자기 나라로 초빙해 그 비밀을 풀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애공은 애태타의 매력을 벤치마킹해 매력적인 군주로 거듭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젊은 남녀들을 매료시킬 매력의 비밀을 안다면, 자신의 권력뿐만 아니라 노나라의 국력도 반석에 오르리라 확신했던 애공입니다. 그런데 애태타를 만난 지 몇 달이 되기도 전에 애공은 무장해제되고 맙니다. 매력적인 군주가 되어 노나라의 국력을 강화하겠다는 애초의 의도마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애태타와 함께하고 싶은 애공의 마음은 위나라의 젊은 남녀보다 강하면 강했지 조금도 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애공은 불안해집니다. 언젠가 애태타가 자신을 떠나면 찾아올 공허감과 슬픔이 무섭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애태타를 잡아두고 싶은 마음에 애공은 객경(客卿)의 자리를 그에게 제안합니다. 노나라의 모든 실권을 애태타에게 맡긴 거죠. 허영의 세계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애공은 이 선물이 애태타와의 이별을 재촉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애공이 공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게 된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최상의 애정을 보여주었는데, 애태타는 오히려 자신의 곁을 떠나버렸으니까요. “결국 저는 나라를 그의 손에 맡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대체 애태타는 왜 떠난 것일까? 최상의 선물을 받자마자 애태타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결별을 결정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것처럼 실의에 빠졌고, 더 이상이 나라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애공은 납득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떠나버려 종적이 묘연한 애태타를 애공은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태타가 자신을 떠난 이유, 자신이 그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겠다는 애공의 간절함입니다.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는 애공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애태타는 소질은 완전하지만 덕은 드러나지 않은[才全而德不形] 사람이었다는 말이 그 시작이죠. 우리도 그렇지만 애공도 직접 이해하기에 아리송한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애공은 우리 대신 차근차근 그 의미를 물어봅니다. “‘소질이 완전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먼저 공자는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능력과 무능함,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등의 가치가 애태타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 중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능력과 무능함, 비방과 칭찬이라는 가치는 억압과 허영의 사회를 떠받치는 최고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억압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을 지배하려면 최종적으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는 협박이 먹혀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애태타는 이런 협박에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를 지배할 수는 없어!” 국가기구에 맞서는 애태타의 당당함입니다. 반면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능력과 무능함, 비방과 칭찬이라는 가치는 억압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 즉 피지배자들의 서글픈 생존의 논리를 반영합니다. 지배와 복종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지배자들의 간택을 받아야 더 잘 먹고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얻으려는 복종에의 욕망이자 동료를 제치고 더 맛난 당근을 얻으려는 경쟁에의 욕망입니다. 국가의 억압에 당당했던 애태타, 비굴한 삶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애태타가 이런 세속적 가치에 눈길을 줄 리 없습니다. 이미 생사관(生死關)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애태타가 이해관(利害關)이나 빈부관(貧富關) 등에 막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라는 구절이 중요해집니다. 애태타는 자유를 위해서는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도 기꺼이 감내합니다. 폭력이 난분분하는 집을 아이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을 떠나서는 목마르고 배고플 것이고 집 바깥은 춥거나 더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약 아이가 야영의 기술을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는 조용히 집을 떠날 겁니다.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정도는 견딜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을 테니까요. 장자가 도처에서 천하 바깥의 삶,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존재했던 야의 삶에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천하 북쪽 유목민의 삶, 천하 남쪽 국가가 없는 사회는 장자 당시에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복종과 수탈을 감내하는 돼지의 삶도 있지만 멧돼지의 삶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유목민이나 멧돼지는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물고 싶으면 머뭅니다. 스피노자적 유목민이자 스피노자적 멧돼지입니다. 타자와 마주쳐 기쁨이 발생하면 그 기쁨을 지키고, 반대로 슬픔이 발생하면 그 슬픔을 주는 타자를 제거하거나 떠나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윤리학이니까요. 슬픔과 우울을 감내하는 정착민들, 억압사회에 길든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자유인의 윤리학일 겁니다. 바로 여기서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가 정착민이 과도하게 일반화한 공포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억압사회 바깥에서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를 그냥 견디는 삶이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낚아서 먹고 목마르면 샘물을 마십니다. 추우면 저지대로 내려가거나 불을 땝니다. 더우면 거주지를 고지대나 서늘한 동굴로 옮깁니다. 취업을 기다리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남루한 집에서 겨울을 견디는 삶은 유목민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애태타는 기쁨을 주는 타자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혹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는 그 누군가와 혹은 그곳과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여물위춘이라는 네 글자

 

기쁨을 주는 사람이나 장소에게 애태타는 슬픔과 우울을 주 지는 않습니다. 슬픔과 우울은 존재를 파괴하는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할 때 상대방이 슬퍼하거나 우울하다면, 그는 나를 떠나거나 시들어 죽어갈 겁니다. 결국 나의 기쁨도 유쾌함도 그와 함께 꺼져버리고 말겠죠. 그래서 소질이 완전하다’, 즉 재전(才全)의 뜻을 설명해주는 마지막 대목에서 장자는 말합니다.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즐겁게 하여, 타자와 소통해도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연속성에 틈이 없도록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것이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마음에 그에 맞는 때를 생성시키는 겁니다.” 자유인에 대한 최고로 멋진 찬사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장자의 찬사는 아침 해에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이슬처럼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한 네 글자 여물위춘(與物爲春)’에 맺힙니다. ‘~와 함께라는 뜻의 ()’, ‘타자외물를 뜻하는 ()’, ‘되다라는 뜻의 ()’, 그리고 을 뜻하는 ()’으로 구성된 문장입니다. 누가 장자 사유의 핵심을 묻는다면, 이 네 글자의 문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물위춘!” 바로 여기서 장자는 자유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원천을 다 보여준 셈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봄이 아닙니다. 타자도 외물도 봄기운에 들어가니까요.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마다애태타가 생성시킨때가 바로 봄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 자신에게서 기쁨을 얻은 사람을 우리는 만난 겁니다. 함께 봄이 되는 사람, 그래서 우리 삶에 봄기운을 가득 안겨주는 사람입니다. 슬픔과 우울에 빠진 자신에게 기쁨과 상쾌함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장자외편 변무2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지극히 바른 사람은 생명의 실정을 잃지 않는다. 발가락이 물갈퀴처럼 붙어 있다고 해서 붙어버린 발가락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이 하나 더 갈라져 있다고 해서 육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긴 것이라고 해서 남아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짧은 것이라고 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이어주면 오리는 근심에 빠지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잘라내면 학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를 긴 것은 잘라내야 할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를 짧은 것은 이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니, 근심을 없앨 이유도 없는 법이다[彼正正者, 不失其性命之情. 故合者不爲騈, 而枝者不爲跂; 長者不爲有余, 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也]” 발가락이 네 개인 사람도 육손인 사람도 애태타를 만나면 불구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태타는 발가락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모두가 자신을 놀리거나 연민을 표했고, 스스로도 좌절하고 절망했던 나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애태타는 발가락이 네 개인 사람이나 육손인 사람을 다른 무엇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단독자로 긍정합니다. 여기서 발가락 이 네 개인 사람은 신발을 벗고 당당히 발을 자랑하게 되고, 육 손인 사람도 장갑을 벗고 아름다운 손가락에 태양빛을 허용하게 될 겁니다. 슬픔, 우울, 좌절, 절망, 체념, 분노 등의 감정이 봄기운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애태타 앞에서 오리도 학도 당당히 걸을 겁니다. 애태타는 과하거나 부족하다고 자신의 다리에 칼을 들이대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종종걸음으로 혹은 껑충걸음으로 애태타를 따라다니는 오리와 학의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이제 애태타가 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냈는지 분명해졌습니다. 불행히도 노나라 애공의 마음에는 여물위춘의 가르침이 들어오지 않았나 봅니다. 공자에게 애공은 쓸데없는 질문을 이어가니까요.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그렇지만 장자는 인내를 가지고 공자의 입을 통해 여물위춘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고르다는 것은 최고로 물이 안정되어서 표본이 될 만한 상태를 말하죠. 안으로부터 잘 보전되고 밖으로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수(止水)의 비유입니다. 고요한 물에만 사람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법입니다. 이상한 물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 전에 만났던 미녀의 표상을 마치 필름처럼 가지고 있는 물입니다. 추녀가 자신을 비추어 보다가 물 안에서 그 미녀의 표상을 함께 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추녀는 자기 외모를 부족한 것으로, 무언가를 결여한 것으로 느끼게 될 겁니다. 자신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이 이상한 물을 그녀는 가까이할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응제왕6에 등장하는 거울 비유도 바로 이걸 말한 겁니다. “지극한 사람[至人]의 마음 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두려 하지도 않는다[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거울이 과거 자신이 비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애태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녀를 만날 때도 비교하지 않고 추녀를 만나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에게는 비교 불가능한 두 여자를 매 순간 단독적으로 만난 것이고, 두 여자도 애태타를 통해 자신의 단독적인 삶을 긍정하게 된 겁니다. 미녀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는 허영과 타인의 시선에 목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추녀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겁니다. 지수라는 친절한 비유에 이어 공자는 애공에게 애태타의 비밀을 대놓고 알려줍니다. “덕이라는 것은 조화로움을 이룬 결과물입니다. 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서 타자는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법이죠.” 누구와 있어 기뻤고 어느 곳에 있어서 상쾌했다는 것이 바로 덕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매력은 기쁨과 행복의 흔적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애태타는 유목민적 심성을 갖춘 자유인입니다. 그 행복의 기억을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여물위춘했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물위춘하는 사람이니까요. 이제야 국가를 맡겼을 때 애태타가 애공을 떠난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애태타는 자유와 기쁨의 공동체를 지향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공을 군주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공은 애태타에게 군주와 객경이라는 억압사회적 관계를 강요했던 겁니다. 봄기운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불행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애태타는 애공을 원망하지도 애공에게 서운함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냥 쿨하게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날씨가 추워지면 저지대로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말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4.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 / 46.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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