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자유를 지켜보는 전사의 마음
여우 이야기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도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 같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南伯子葵問乎女偊曰: “子之年長矣, 而色若孺子, 何也?”
여우가 말했다. “나는 길에 대해 들었습니다.”
曰: “吾聞道矣.”
남백자규가 말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南伯子葵曰: “道可得學耶?”
여우가 말했다. “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 복량의(卜梁倚)는 성인의 소질은 있지만 성인의 길은 없고, 나는 성인의 길은 있지만 성인의 소질은 없습니다. 내가 성인의 길을 가르치고자 하면, 아마도 그는 진짜 성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성인의 길을 성인의 소질이 있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울 거예요. 그에게 알려주고서 내가 그를 지켜보면, 그는 3일이 되어 천하를 도외시할 거예요. 그가 천하를 이미 도외시한 뒤 내가 그를 지켜보면, 그는 7일이 되어 외물을 도외시할 겁니다. 그가 이미 외물을 도외시한 뒤 내가 그를 지켜보면, 그는 9일이 되어 삶을 도외시할 거예요. 이미 삶을 도외시한 뒤 그는 ‘아침이 열리는 것[朝徹]’처럼 될 겁니다. 아침이 열리는 것처럼 된 뒤 그는 ‘단독적인 것을 볼[見獨]’ 거고요. 단독적인 것을 본 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없앨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를 없앤 뒤 그는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 들어갈 겁니다.”
曰: “惡! 惡可! 子非其人也. 夫卜梁倚有聖人之才而無聖人之道, 我有聖人之道而無聖人之才. 吾欲以敎之, 庶幾其果爲聖人乎? 不然, 以聖人之道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參日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而後能入於不死不生. 「대종사」 8
특수성 vs 단독성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에 이르러 서양철학은 드디어 ‘특수성(particularité)’과 ‘단독성 (singularité)’을 명료하게 구분하는 데 성공합니다. 일단 교환 가능성이 특수성이라면, 교환 불가능성은 단독성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간단한 예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어느 젊은 부부에게 자식이 둘 있었는데 그중 철수라는 막내 아이가 죽고 맙니다. 슬픔에 빠진 부부에게 한 지인이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아직 젊으니 다시 낳으면 되잖아.” 이 말이 부부에게 위로가 될까요? 바로 여기서 특수성과 단독성은 팽팽히 부딪힙니다. 지인에게 부부의 두 아이는 그저 ‘자식’과 ‘자식2’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자식2가 없어졌다면, 새로 아이를 낳아 자식2가 되도록 하면 된다는 거죠. 심지어 지인은 다시 낳을 아이를 철수라 부르라고 조언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지인의 조언이 순간적이나마 먹힐 수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 맞아! 새로 아이를 낳아 철수라 부르고 잘 키우면 되지.” 바로 이것이 특수성의 사유입니다. 죽은 아이는 새로 낳은 아이와 교환 가능하다는 입장이죠. 바로 이때 죽은 철수는 ‘특수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반면 지인의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이를 다시 낳아도 그 아이가 죽은 철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래 맞아! 새로 아이를 낳아 철수라 부르고 잘 키우면 되지”라고 읊조린 부부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새로 둘째 아이를 낳아도, 심지어 죽은 아이와 똑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그 아이는 결코 철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죽은 아이는 부부에게는 결코 다른 아이와 교환할 수 없는 아이, 한마디로 단독적인 아이였으니까요. 물론 이 젊은 부부가 정상적인 감수성을 가졌다면 말이죠. 어쨌든 겉보기에 동일한 대상이라도 사람에 따라 ‘단독적인 것’일 수도 있고 ‘특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특수성과 단독성은 교환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비교 가능성과 분류 가능성의 여부로도 이해 가능합니다. 이럴 때 특수성과 단독성은 윤리학적 의미를 넘어 정치경제학적 의미로도 확장됩니다. 하긴 이미 자식1 이나 자식2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두 아이를 ‘내 자식’이라는 집합으로 ‘분류’하고 있는 겁니다. 자식이 자식보다 성적이 좋다거나 자식2는 자식1보다 말을 잘 듣는다는 ‘비교’도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자식1의 속성과 자식2의 속성이 완전히 같다면, ‘내 자식’이라는 집합의 원소 개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회사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자본가 입장에서 직원1, 직원2, 직원 등등은 모두 교환 가능한 존재들입니다. 직원이 스스로 그만두면 자본가는 다른 노동자를 직원1로 뽑을 수 있습니다. 혹은 자본가는 직원들을 비교해 직원을 정리 해고하기도 하죠. 물론 이 경우에도 자본가는 가성비가 좋은 다른 직원을 아무렇지 않게 대신 뽑을 겁니다. 자본에게 노동자들은 이렇게 ‘특수한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정 자본의 노동자들로 ‘분류된 그들은 자본에 의해 ‘비교’되고 자본에 의해 다른 노동자로 ‘교환’ 가능하니까요. 자본만이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인구가 많으면 출산을 억제하고 인구가 감소하면 출산을 장려합니다. 아울러 국가는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사람들을 선호하고, 징집을 위해 젊은 청년들에게 신체검사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국가에게 국민은 모두 ‘분류’되고 ‘비교’ 되고 ‘교환’ 가능한 존재들, 즉 ‘특수한 존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자본이나 국가가 사람들을 ‘특수한’ 것으로 보게 만든 주범이라고 할 수 있죠. 자본과 국가를 규정하는 특수성의 논리가 가족이라는 자발적 공동체도 물들이는 것이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현재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자본이나 국가처럼 ‘특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동시에 ‘단독적인 것’으로 보는 자기분열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관청에서, 군대에서, 법원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특수성’을 받아들이도록 훈육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이 어느 집합에 묶이든 다른 구성원과 비교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것과 교환되지 않기 위해 가성비를 스스로 증명하려는 서글픈 삶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신마저도 특수한 것으로 보는 참담한 자기부정입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껴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수성의 논리는 죽음과 죽임의 논리입니다. 억압체제의 부품이 되고, 끝내는 체제로부터 버려지는 논리입니다. 자본과 국가의 사제가 아니라 인간의 친구가 되려면, 인문학과 철학은 ‘특수성의 논리’가 가진 반인간적 잔혹성을 폭로하고, 그와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합니다. 단독성을 지키려는 전사가 되지 않으면 인문정신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인간 한 사람뿐만 아니라 바위 하나 바람 한 줄기, 독수리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것으로 긍정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보잘것없이 작은 것들은 다른 것과 함부로 바꿀 생각조차 하기 힘든 거대한 대붕처럼 될 겁니다. 특수성의 논리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사이비 인문학이 유행하는 지금, 「대종사」 편의 ‘여우 이야기’는 섬광처럼 작열합니다. 그 섬광 속에서 우리는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먼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력하게 단독성을 지키려는 고독한 전사의 얼굴을, 단호하지만 여유로움을 품고 있는 장자의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우 이야기에서 단독성의 이념은 ‘홀로’나 ‘혼자’를 뜻하는 ‘독(獨)’이라는 글자에 응축됩니다. 「응제왕」 편의 열자 이야기에서 장자는 열자가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塊然獨以其形立]”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소홀히 넘어가기 쉬운 “홀로”라는 이 부사, ‘독’이라는 이 글자 하나에 장자의 모든 사유가 응축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장자 읽기는 이렇게도 만만하지 않은 일입니다.
홀로 걷는 여자, 여우
여우 이야기는 남백자와 여우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우는 나이가 많음에도 어린아이 같은 안색을 하고 있습니다. 니체에게서도 그렇지만 어린아이는 자유롭고 생생한 생명력을, 어디에도 주눅 들지 않는 경쾌함을 상징합니다. 남백지규는 그 건강함, 그 천진난만함, 그 상쾌함의 비법을 알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자 여우가 대답합니다. “나는 길에 대해 들었습니다[吾聞道矣].” 뒤를 보면 여우가 들은 길은 완전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 즉 성인(聖人)이 되는 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여우입니다. 주석을 보면 이채로운 설명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책은 ‘이 사람은 부인이다’라고 언급했다[一云是婦人也].” 당(唐)나라의 육덕명(陸德明, 550?-630?)이 지은 『경전석문(經典釋文)』에 나오는 말입니다. 당시 가 가부장제 사회였음을 생각해보세요. 길에 대해 들은 사람이 여자일 수 있고, 심지어 이 여자는 남자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캐릭터를 장자가 만든 셈이죠. 여우라는 이름을 보세요. 이 이름은 ‘여자’를 뜻하는 ‘여(女)’와 ‘홀로 걷다’라는 뜻의 ‘우(偊)’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우는 ‘여자가 홀로 걷는다’ 혹은 ‘홀로 걷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남자에 의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자를 가르치는 여자! 중년 이상의 나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생동감을 뿜어내는 여자! 바로 여우입니다. 당연히 가부장적 의식을 가진 학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여우는 그녀의 성별이 주제화되지 않고 장자가 만든 이상적 인물 중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우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백자규, 여우 그리고 복량의는 모두 남자일 거라는 암묵적 동의가 지속되고요. 바로 이것이 육덕명이라는 학자가 대단한 이유입니다. “어떤 책은 여우가 부인이라고 언급했다”고 넌지시 자신의 책에 기록했으니까요. 가부장적 통념에 장자의 의도가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학자적 양심입니다.
여우! 그 존재 자체로 천-천자–대인-소인으로 구성된 천하 질서, 천으로 정당화된 가부장적 질서 바깥에 위치합니다. 천하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여자! 그녀가 바로 여우입니다. 여기서도 장자의 유목민적 상상력이 빛을 발합니다. 정착·농경생활은 여성이 남성보다 육체적 힘이 약하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무언가를 들 때를 생각해보세요. 비슷한 연령이라면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들고 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죠. 그러나 유목생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성도 말이나 낙타를 탈 수 있으니까요. 아니 여성도 말이나 낙타를 타야만 합니다. 그래야 가축을 몰고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말을 타고 질주하는 순간, 여성은 남성과 차이가 없습니다. 남성이 탄 말이 더 빠르거나 더 많은 걸 끄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몽골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 말달리기 축제를 합니다. 아이들이 초원을 질주하는 경주입니다.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축제로, 말달리기에서 이기면 나름 성숙한 유목민으로 인정받습니다. 말을 잘 탄다는 건 부모를 떠나서 살 수 있다는 증거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 부모가 때리려 하면 아이는 말을 타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말을 잘 탄다는 것, 그건 지배와 복종 관계를 떠날 힘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 말달리기에는 소년뿐만 아니라 소녀도 아무런 제약이 없이 참여합니다. 소녀들이 우승을 하면 패배한 소년들은 이를 기꺼이 인정합니다. 정착ㆍ농경생활에 익숙한 여성들, 집 안에 갇힌 여성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죠. 언제든지 말을 타고 남편을 떠날 수 있는 여성과, 걸어서는 남편을 따돌릴 수 없는 여성, 그 차이는 엄청난 겁니다.
‘홀로 걷는 여자’, 여우에게서 우리는 말을 타는 전사의 당당함을 떠올려야 합니다. 여우는 억압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전통 가부장제 속의 여성과는 다릅니다. 그녀가 “나이가 많은데도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여성, 여성에게 강요되는 온갖 의무들로부터 자유로운 여성, 바로 그녀가 여우였습니다. 그녀가 억압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위대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또한 자유로운 전사를 꿈꾸던 남백자규가 여우에게 배움을 청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달리 여우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남백자규에게는 성인, 즉 자유인이 되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소질이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여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선언에 남백자규가 좌절이라도 할까 걱정하듯, 여우는 복량의(卜梁倚)라는 남자의 사례를 통해 성인이 되는 길을 남백자에게 알려주니까요. “저 복량의는 성인의 소질은 있지만 성인의 길은 없고, 나는 성인의 길은 있지만 성인의 소질은 없습니다. 성인의 길을 가르치고자 하면, 아마도 그는 진짜 성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직접적 가르침이 아니라 간접적 가르침입니다. 자유는 강요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는 여우의 통찰입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라는 남백지규의 의문 자체가 그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자유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여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겁니다. 누군가에 의지해 자유로우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자유에서 멀어지게 되니까요. 자유는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여우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비교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여우는 복량의라는 남자가 “성인의 소질은 있지만 성인의 길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찾으려 바깥으로 배회하지 않으니 복량의는 남백자와 달리 자유인의 본능, 자유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복량의는 그 본능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여우는 자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성인의 길은 있지만 성인의 소질은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 여우는 절망하는 남백자규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으려 합니다. 자신도 남백자규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의 본능이 없다는 겸손입니다. 이어서 그녀는 복량의라는 남자를 만나 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알려줄 때, 그가 어떻게 자유인의 본능을 실현시킬지 그 구체적인 여정을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남백지규에게 자유인의 소질이 진짜로 없다고 판단했다면 할 필요도 없는 가르침이죠. 여우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자유의 공기를 맡으려는 본능이 있음을 긍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자유인이 되는 과정, 몽골 소녀가 전사가 되는 과정을 엿보도록 하죠. 여우의 설명에서 중요한 건 “그에게 알려주고서 내가 그를 지켜본다[告而守之]”라는 구절입니다. 유목민 남자가 아이를 전사로 키울 때는 보기 힘든 감수성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말은 끝내 스스로 타야 하고 몇 번의 낙마를 감당해야 합니다. 말 타는 법을 알려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설 수 있지만, 여우는 그렇게 돌아서지 못합니다. 말을 타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미래의 자유인을 지켜봅니다. 말을 대신 타줄 수는 없지만, 같이 있어주는 것으로 응원하려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낙마할 때 아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과 응원을 담아 함께 있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지켜본다”고 번역한 ‘수(守)’의 여성적 감수성입니다.
복량의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여우는 자신이 이 아기 자유인 옆에서 최소 9일 동안 있으리라 이야기합니다. 9일은 아기 전사가 말을 타고 홀로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초원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먼지를 보며 전사 여우는 드디어 발걸음을 돌려 천막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아기 전사는 의젓한 전사가 되었습니다. 돌아올 수도 아니면 초원이 끝나는 곳까지 계속 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천막으로 되돌아온다면 여우는 기쁠 겁니다. 돌아올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얻은 신출내기 자유인은 자유로써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니까요. 자유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먼저 천하를 도외시해야 합니다. 천-천자–대인-소인이라는 위계질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다음 외물을 도외시해야 합니다. 직위, 봉급, 식읍 등 국가가 내건 미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국가의 유혹을 받는 순간, 언제든지 자유인은 천하질서에 다시 포획될 테니까요. 그다음은 삶을 도외시해야 합니다. 자신이 내민 당근을 먹지 않으면 국가는 채찍을 휘두를 겁니다. 자유인의 목을 조르며 혹은 자유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할 겁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죽을 거야!” 이 협박이 먹히면 자유인은 직위, 봉급, 식읍이라는 미끼를 다시 물게 되고 억압사회에 갇혀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마지막 관문은 바로 삶을 도외시하는 생사관이었던 겁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자유인은 결코 지배와 복종 관계로 퇴행할 위험이 없습니다. 이미 천하질서의 가장 바깥 장벽, 인간을 가두고 사육하는 마지막 울타리를 돌파했으니까요. 여우는 천하, 외물, 그리고 삶을 도외시해야 한다고 말할 때 ‘외(外)’라는 말을 씁니다. ‘외면화한다’ 혹은 ‘바깥으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천하로 대표되는 국가질서, 귀하다고 평가되는 외부 대상, 존중되어야 한다는 삶마저도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병균이나 침입자와 같다는 발상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의 원래 자리인 바깥으로 보내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삶을 도외시하는 순간 자유인의 질주는 시작됩니다. 하늘이란 거대한 쇠장막으로부터 벗어나니 마치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바로 ‘조철(朝徹)’입니다. 천-천자–대인-소인의 위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존재–생물–동물-인간 등의 개념적 위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른 것과 비교되고 바뀔 수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비교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단독성’을 회복합니다. 올해 핀 꽃이 작년에 핀 꽃이 아님을 알고 올해 태어난 아이가 작년에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올해도 같은 개나리가 피었네” 혹은 “두 번째 자식이네”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내 앞의 개나리는, 내 앞의 아이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학적 의미나 신비적 뉘앙스를 완전히 제거해 이해해야 할 ‘영원한 현재(the eternal present)’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우는 말했던 겁니다. “단독적인 것을 본 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없앨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를 없앤 뒤 그는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 들어갈 겁니다”라고요. 죽음을 피하고 살려고 하면, 죽음이 아닐지라도 다칠 것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말을 탈 수가 없습니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을 먹으면 아기 유목민은 진정한 유목민으로 탄생합니다. 역으로 말해도 좋습니다.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자유인에게 삶과 죽음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고 말입니다. 여우의 모든 가르침은 이렇게 끝납니다. 아기 전사가 자신을 의젓한 전사로 스스로 벼리는 과정을 지켜주는 전사 여우의 섬세함이 빛을 발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집니다. 남백자규는 초원을 질주하는 전사가 되었을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자신의 자유를 바깥에서 찾으려는 순례를 계속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세」 편의 거목 이야기가 기억나시나요. 주석가들은 남백 자규가 거목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했던 남백자기(南伯子綦)라고 말합니다. 몸소 말을 타지 않으면 전사 여우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기 전사를 억지로 말에 태울 수는 없으니까요. 반드시 지켜보려는 마음을 가진 전사 여우입니다. 남백자기, 즉 남백자규가 말을 타기를 기다리는 여우입니다.
자유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여유가 말하고자 했던 게 바로 이것입니다.
인용
42. 섭섭한 세계와 장자의 고독 / 44.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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