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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2. 섭섭한 세계와 장자의 고독(삼인행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2. 섭섭한 세계와 장자의 고독(삼인행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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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섭섭한 세계와 장자의 고독

삼인행 이야기

 

 

효자는 부모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군주에게 아부하지 않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신하와 자식이다. 부모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부모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아들이라고 한다. 군주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군주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신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됨을 모르는 것일까?

孝子不諛其親, 忠臣不諂其君, ·子之盛也. 親之所言而然, 所行而善, 則世俗謂之不肖子; 君之所言而然, 所行而善, 則世俗謂之不肖臣. 而未知此其必然耶?

 

세상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아부꾼[道人]이나 아첨꾼[諛人]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부모보다 더 권위가 있고 군주보다 더 위엄이 있다는 것인가! 자신을 아부꾼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불끈 화를 내고 자신을 아첨꾼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왈칵 화를 내지만, 그들은 평생 아부꾼이자 평생 아첨꾼일 뿐이다. 적절한 비유를 모으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해서 대중을 끌어모으지만, 시작과 끝, 근본과 지엽은 서로 모순될 뿐이다. 근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도 착용하고 표정과 몸짓을 바꾸어가며 동시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이 아부한 다거나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 세상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옳고 그름을 따르지만 자신이 대중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世俗之所謂然而然之, 所謂善而善之, 則不謂之道諛之人也! 然則俗故嚴於親而尊於君耶? 謂己道人, 則勃然作色; 謂己諛人, 則怫然作色. 而終身道人也, 終身諛人也, 合譬飾辭聚衆也, 是終始本末不相坐. 垂衣裳, 設釆色, 動容貌, 以媚一世, 而不自謂道諛; 與夫人之爲徒, 通是非, 而不自謂衆人也, 愚之至也.

 

자신이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지는 않고, 자신이 미혹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혹된 사람은 죽어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한 사람이 미혹되어도 목적지에는 이를 수 있는 것은 미혹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미혹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미혹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온 세상이 미혹되었기 때문에 내가 설령 아무리 방향을 알려준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으니, 너무나도 슬픈 일 아닌가!

知其愚者, 非大愚也; 知其惑者, 非不惑也. 大惑者, 終身不解; 大愚者, 終身不靈.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 猶可致也, 惑者少也; 二人惑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以天下惑, 予雖有祈向, 不可得也. 不亦悲乎! 천지14

 

 

장자의 비애와 분투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는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그리고 천하(天下)편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천으로 시작하는 편들은 장자 본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장자적이지 않은 편들이죠. 장자는 하늘의 시선으로 인간과 그 삶을 내려다보기를 거부하니까요. 장자는 천자나 대인이라는 지배자의 시선이 아니라, 소인이라는 피지배자의 삶을 긍정하는 철학자였습니다. 하늘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세계는 - 천자 - 대인 - 소인이라는 위계적 질서로 이해된 세계죠. 대붕은 바로 이 천하가 중국 대륙 일부분에만 통용되는 협소한 세계임을 폭로합니다. 장자의 시대까지만 해도 천하 바깥에는 영토국가와 무관한 세계, 혹은 자유인의 긍지가 통용되는 세계가 훨씬 방대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천하의 북쪽에서 천하의 남쪽으로 날아가면서 대붕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이라는 글자를 제목에 품고 있는 편들을 그냥 폐기 처분해서는 안 됩니다. 이 편들을 편집하면서 후대 편집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장자가 만든 이야기, 너무나 장자적인 이야기들을 포함시켰을 수 있기 때문이죠. 아니나 다를까, 천지편을 넘기다 보면 공자를 은근히 비꼬는 이야기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삼인행 이야기입니다. 논어』 「술이(述而)21에서 공자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안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 공자와 마찬가지로 세 사람이 길을 가는경우를 상정해 진행되는 삼인행 이야기는 장자 본인이 쓴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장자는 공자와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철학자였으니까요.

 

삼인행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제물론편을 시작하는 바람 이야기만큼이나 높은 문학성을 뽐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동시대 지식인들에 대해 분노를 피력하는 부분은 지금 읽어도 울림이 있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지배와 복종에 익숙해져 허영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보다 그들을 이용해 지적 헤게모니와 아울러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지식인들의 권력의지가 장자의 표적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제자백가에 휘둘리면서 억압과 허영의 늪에 점점 깊게 빠져들고 있으니 장자의 안타까움과 섭섭함은 커져만 갑니다. 장자는 지리소나 표정 혹은 맹손재처럼 쿨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남에게 가르칠 수 없고 그저 자신이 살아내는 것이라는 근본 입장을 관철해야 쿨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장자는 자신의 이야기들로 사람들이 대붕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천하라는 지배질서에 포획된 사람들에 대한 장자의 연민과 애정은 이처럼 깊었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결코 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는 법이죠. 그래서 장자는 우리 곁에 잠시 머무는 대붕이라기보다 사회와 인간을 고민했던 천생 지식인이었던 겁니다.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자유를 가르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유를 가르치려는 자유의 지식인을 우리는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손에는 자유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장자라는 책이 쥐어질 수 있었으니까요. 장자에 실린 수많은 이야기들 그 자체가 장자가 얼마나 동시대 사람들을 깨우려고 노심초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말하고 글을 쓰고 또 말하고 글을 쓰는 나날이었을 겁니다.

 

장자의 분투는 불행히도 언발에 오줌을 누는 형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은 지배와 복종의 미망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노력의 작은 대가로 소수의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기보다 부국강병의 생존 논리에 매몰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전국시대는 인간의 자유를 점점 옥죄는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으니까요. 살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양반이고, 이제 모두 이익에 목을 맵니다. 모든 가치평가는 억압과 자유가 아니라 이익과 손해를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래서는 억압과 허영의 세계를 돌파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이익과 손해는 국가기구가 던지는 당근과 채찍을 내면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익과 손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자유와 사랑을 외치는 장자의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됩니다. 부국강병에 휘말리지 말고 국가기구를 돌파하라는, 혹은 좋은 군주에 매몰되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그의 예리한 지성은 점점 빛을 잃어갑니다. 심지어 장자의 주장이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문학적 백일몽이라는 조롱도 힘을 얻어가게 됩니다. 그럴수록 장자의 비애와 고독감, 나아가 울분은 커져만 갔을 겁니다. 삼인행 이야기가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그래서 삼인행 이야기는 장자가 만든 다른 대부분의 이야기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웃들의 미혹에 대붕처럼 쿨할 수 없었던 어느 다정한 지식인, 대봉을 기르겠다며 스스로 대붕이 되기를 주저했던 어느 인간적인 지식인의 서글픈 고백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섭섭한 세계 따위는 잊고 떠나려는 대붕의 숨겨진 욕망도 은근히 드러나 있습니다.

 

 

 

-천자-대인-소인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삼인행 이야기가 서늘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장자가 묘사한 섭섭한 세계가 2,000여 년 전 중국 전국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를 붕괴시키려는 시도 대신 한 단계라도 그 상층부로 올라가려는 경쟁 논리만이 팽배한 것이 문제입니다.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잠재적 지배계급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을 잠재적 자본가로 오인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혹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근원적 억압 형식이 은폐되고 맙니다. 군주제에서 대의제로의 이행은 억압 형식이 스스로의 생명을 영속화하는 가장 세련된 형식을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민중의 혁명으로 특정 군주가 축출되는 걸 방치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특성 군주와 함께 군주라는 형식도 폐기될 수 있으니까요. 나쁜 군주는 좋은 군주든 문제는 군주라는 형식 자체에 있다는 걸 민중은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혹은 국가주의자는 셀프 혁명을 만들어냅니다. 다수 피지배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선거라는 사이비 혁명으로 지배계급 이 먼저 군주를 바꾸어버리는 거죠. 군주라는 형식을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입니다. 선거에 의한 군주 변경, 대통령제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물론 대통령 후보는 지배계급의 일원이거나 지배계급이 간택한 사람입니다. 지배계급이 통제 가능한 혁명. 합법적인 혁명, 지배와 피지배라는 형식은 결코 침해되지 않는 보수 혁명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으나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기만적 지배 형식이죠. 이것은 물론 누구나 대자본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대자본가가 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도플갱어 (doppelgänger) 입니다. 자본과 국가 사이의 은밀한 지배는 이렇게 공명하면서, ‘작은 대통령’ ‘작은 국회의 원’ ‘작은 자본가’ ‘작은 CEO’의 시대를 열었죠. 대통령이, 국회의 원이, 그리고 CEO가 바뀌는 현란한 저글링 속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와 복종 형식은 편안히 숙면을 취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하도 빨리 내용물이 바뀌니 형식은 생각할 겨를도 없고, 심지어 형식이 항상 새로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겁니다. 선거도 좋고 주주총회도 좋습니다. 대표가 되려면 작은 대통령들이나 작은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CEO나 대주 주의 권한을 휘두르려면 작은 자본가들이나 작은 CEO들의 지지가 필수적입니다. 이제 군주의 총애만 받으면 혹은 독점재벌의 총애만 받으면 피라미드 상층부에 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물론 주어진 임기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CEO의 힘은 과거 군주와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시한부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피라미드 상층부로 간택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니까요. 그러나 최종심급에서는 여론이나 세간의 평가가 결정적인 시대가 된 것은 맞습니다. 대통령 후보자부터 취업준비생까지 모두 스펙에 연연하는 기묘한 시대가 도래한 셈이죠.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도 여론이나 세간의 평가나 평판이 중요했던 시대입니다.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군주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재상이 될 수 있던 시절이니까요. 지식인을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이 억압과 허영의 세계를 문제 삼지 않고 그 세계가 열어놓은 경쟁, 갈등, 질투의 장에서 승자가 되고자 합니다. 누구나 더 많은 추천과 더 많은 좋아요를 갈망합니다. 인간의 자유, 평등, 평화, 사랑마저도 세상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는 매력적인 도구가 되었으니, 다른 가치나 이념은 말해 무엇하겠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적절한 비유를 모으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해서 대중을 끌어모으지만, 시작과 끝, 근본과 지엽은 서로 모순될 뿐이다.” 자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지위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결국 근사한 인문주의자가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타인에 대한 사랑이 지독한 자기애의 표현이 되니, “시작과 끝, 근본과 지엽은 서로 모순될수밖에 없죠. 제자나 지지자들을 모으고 그 영향력을 과시했던 제자백가의 시대는 이런 문맥에서 탄생했습니다.

 

춘추시대의 가치를 옹호하며 보수적인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유가, 직접적 성공을 꿈꾸던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으려 했던 법가, 부국강병의 실무기술들을 가졌던 소인, 즉 기술노동계급의 지지를 꿈꾸던 묵가 등등. 만일 원하는 지지를 얻으면, 제자백가들은 제후국 군주도 어쩌지 못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됩니다. 잘하면 재상이 될 수도 있고 못해도 세간의 지지로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니, 손해 볼 일 없는 장사였던 셈이죠. 국가의 상벌과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아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던 장자입니다. 그의 눈에 제자백가들의 언행이 마음에 들 리 없습니다. 삼인행 이야기는 평판에 연연하는 지식인들과 유명 지식인에 열광하는 동시대인들에 대한 서글픈 스케치입니다. 허영과 질투 그리고 경쟁이 난분분한 곳에서 인간의 자유와 사랑은 숨을 쉴 수 없다는 그의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묘사였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를 적으로 돌릴 만한 돌직구로 삼인행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효자는 부모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군주에게 아부하지 않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신하와 자식이다. 부모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부모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아들이라고 한다. 군주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군주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신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됨을 모르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아부꾼이나 아첨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부모보다 더 권위가 있고 군주보다 더 위엄이 있다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장자다운 날카로운 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의 권위나 군주의 권위에 눌려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자식이나 신하를 나쁜 자식이나 나쁜 신하라고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세간의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자기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지 못하기는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포퓰리스트 공자의 맨 얼굴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한 동아시아 최초의 비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포퓰리스트는 다수결의 원칙이나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든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다수 대중과 일치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자신의 포퓰리즘을 대중에 대한 사랑이나 평소 자기 신념이라는 미명으로 가리려는 행동이지요. 자신이 대중에게 아부하거나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나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침이 부모를 망치고 아부가 군주를 망칩니다. 포퓰리즘도 대중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니 그들을 망치고 말 겁니다. 결국 포퓰리스트가 자임하던 대중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은 끝내 포퓰리스트 본인의 이익을 위 한 것임이 폭로되고 맙니다.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는 순간, 포퓰리스트는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험담 속에서 버려집니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걸 숨겨야 합니다. 자신의 언행이 대중에 대한 사랑이나 평소의 소신에 따른 것이라고 끝까지 우겨야 합니다. 포퓰리스트의 저주받은 숙명입니다. 장자의 눈에 세상 사람들은 포퓰리즘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저주로부터 나올 의지도 생각도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아부꾼이라고 하면 불끈 화를 내고 자신을 아첨꾼이라고 하면 왈칵 화를 내는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작은 지배자로서 큰 지배자가 되려 는 꿈, 작은 대통령으로서 큰 대통령이 되려는 꿈, 작은 자본가에서 큰 자본가가 되려는 꿈으로부터 깨지 않으려는 무지와 미몽에의 의지입니다.

 

당당한 자유인으로 사랑하고 살려면 해법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아부꾼이자 평생 아첨꾼으로 살아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장자도 말했던 겁니다. “근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도 착용하고 표정과 몸짓을 바꾸어 가며 동시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이 아부한다거나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 세상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옳고 그름을 따르지만 자신이 대중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평판에 휘둘리는 세상 사람들이라는 상황과 관련됩니다. 내가 내리는 평가나 판단이 세상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나 판단과 우연히 일치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내가 평가와 판단을 내리는지 그 경계가 묘하기만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기 지시의 현기증이 꿈에서 깨어나는 걸 막는 마법을 부리는 겁니다. 그러나 마법에 취해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불현듯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자신의 모습을 얼핏 볼 기회는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내 욕망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 혹은 권력과 부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장자는 격려의 말과 아울러 경고의 말을 동시대 사람들, 나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겁니다. “자신이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지는 않고, 자신이 미혹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혹된 사람은 죽어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참담한 사실을 빨리 받아들여 크게 미혹되거나 크게 어리석은 상태에 빠지지 말라는 간청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제자백가의 아이콘 공자의 사유에서 포퓰리즘의 싹을 발견하게 됩니다. 논어』 「술이편의 구절,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안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세요. 공자 본인이 포함되니, 그에게 있어 타인은 바로 두 사람입니다. 둘 중 한 사람을 따른다면, 그와 공자는 세 사람 중 다수가 됩니다. 한 사람이 동쪽으로 가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서쪽으로 가자고 한다고 해보죠. 공자가 동쪽으로 가자는 사람의 입장을 따른다면, 그리고 세 사람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면, 세 사람은 동쪽으로 갈 겁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면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서쪽으로 가도 급류가 길을 막을 수도 있죠. 남쪽만이 탄탄대로가 열려 있는 방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의 삼인행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읽어버리는 겁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한 사람이 미혹되어도 목적지에는 이를 수도 있는 것은 미혹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미혹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미혹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길을 함께 가는 세 사람이 모두 길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을 공자는 인정했어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를 포함한 세 사람 중 누구도 스승이 될 자격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진리를 찾으려는, 혹은 세상 사람들의 통념에 호소해 지식인으로서 평판을 얻으려는 최초의 포퓰리스트 공자의 맨 얼굴은 이렇게 깔끔하게 폭로됩니다. 장자는 억압과 허영이 없는 세계, 대붕이 날아간 남쪽 방향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부의 지배가 더 강화되는 세계로만 가려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탄식합니다. “그런데 지금 온 세상이 미혹되었기 때문에 내가 설령 아무리 방향을 알려준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으니, 너무나도 슬픈 일 아닌가!” 파국으로 가는 사람들을 두고 홀로 남쪽으로 날아갈지, 그들을 끝까지 말릴지 고민하는 장자입니다. 너무나도 슬픈 장면입니다.

 

 

장자의 눈에 세상 사람들은 포퓰리즘의 저주에 사라잡혀 있지만, 그 저주로부터 나올 의지도 생각도 없습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1. 울타리의 유혹에 맞서서! / 43. 자유를 지켜보는 전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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