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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4.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원숭이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4.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원숭이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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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랑하는 마음의 은밀한 이중성

원숭이 이야기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노여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름과 내용이 어긋나지 않았지만 노여움과 기쁨이 작용한 것 또한 인시(因是).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그러므로 성인은 옳음과 그름으로 갈등을 완화하지만 자연스러운 물레[天鈞]’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한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제물론10

 

 

아침에 넷, 저녁에 셋에 대한 오해

 

인간에 대한 장자의 애정은 절절합니다. 정착국가를 구성하는 대다수 노동계급, 글을 모르던 대부분의 민중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공자맹자묵자한비자든 다른 제자백가들은 자기 글의 독자나 자기 말의 청자로 소수 지배계급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장자만큼은 달랐습니다. 그는 대인이 아니라 소인의 삶을 위로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소인의 삶을 찬양하기까지 합니다. 장자에게 소인들은 결코 작지 않고 대붕만큼 큰 존재였습니다. 단지 그들은 지배계급의 위세나 이데올로기 공세에 눌려 자신들이 왜소하다고 오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긴 다수의 민중이 대붕처럼 모두 날 아가버리면 영토국가 자체는 일순간에 괴멸할 겁니다. 자신은 모자란다는 자기비하, 자신은 무지하다는 자기멸시,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자기부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들은 억압사회를 개조하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떠날 수 있는 힘, 대붕의 힘을 되찾을 테니까요.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소인들에게 장자가 논문 형식의 글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은 우화들을 들려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자는 이야기의 힘을 알았던 겁니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그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기 마련입니다. 이 점에서 제물론편은 예외적입니다. 어느 정도 지적 훈련을 마친 독자들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으니까요. 분명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초로 만든 이야기일 겁니다. 구멍과 바람의 마주침을 다룬 바람 이야기도 그렇고, 문의 이미지로 타자와의 소통을 논의했던 도추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에서도 우화를 만드는 장자의 탁월한 능력은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람 이야기나 도추 이야기를 들으면 제자들은 스승 장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당혹스러워집니다. 빈 구멍이나 문은 비유일 뿐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구멍도 건축물도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빈 구멍이나 잘 열리는 문처럼 되는지 막연했을 겁니다. 바로 이 순간 바람 이야기나 도추 이야기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구 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멋진 우화를 장자는 만들어냅니다. 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민중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해력이 부족한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친절함입니다. 논리성이나 문학성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제물론편에 등장하는 소박한 우화,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관련된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맥에서 탄생한 겁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한 일이죠. 장자의 제자들만큼이나 우리도 바람 이야기나 도추 이야기를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 막연하니까요. 아이러니한 건 이 특이한 이야기마저 오해에 노출된다는 사실입니다. 장자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일 텐데요.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를 쉽고 생생하게 전달하려 했던 이야기가 어리석은 타인을 말장난으로 속이는 이야기로 변질되었으니까요. 그만큼 장자 읽기가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의 전언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저항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조삼모사 이야기로 부를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원숭이 이야기로 부르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자성어 조삼모사는 새 술을 담기에는 너무나 오염되고 너덜너덜해진 헌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저공(狙公)은 원숭이 키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는 원숭이를 뜻하는 말이니까요. 원숭이 이야기는 저공과 그가 키우던 원숭이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화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원숭이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이 저공과 원숭이들 사이의 간략한 일화라면, 두 번째는 이 일화를 장자가 철학적으로 평론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을 보죠.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노여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게 이야기 전부입니다. 저공이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했을 때, 원숭이들은 화를 내며 불만족을 피력합니다. 그러자 저공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어차피 저공은 하루 동안 원숭이들에게 일곱 개의 도토리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원숭이들이 하루에 받을 수 있는 도토리는 일곱 개가 전부였던 겁니다. 그런데 원숭이들은 저공의 새로운 제안에 만족을 표시하며 기뻐합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받거나,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받거나 하루에 일곱 개 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저공은 똑똑해 보이고, 이 사실을 모르는 원숭이들은 멍청해 보입니다. 혹은 저공은 사기꾼 같아 보이고 원숭이들은 순진해 보입니다. 바로 여기서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합니다. 이제 조삼모사는 어리숙한 사람을 속이는 말이나 행위를 의미하게 됩니다.

 

 

 

저공은 왜 도토리 일곱 개를 주려고 했을까?

 

문제는 조삼모사에 대한 고정관념이 원숭이 이야기의 두 번째 부분을 오리무중 상태로 던져 넣는다는 사실입니다. 원숭이 이야기의 두 번째 부분에서 장자는 저공을 성인(聖人)의 한 사례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기꾼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걸까요? 저공과 원숭이들 사이의 일화를 잘못 독해했기 때문입니다. 저공이 말재주로 순진한 원숭이들을 농락했다는 잘못된 이해, 조삼모사에 대한 통념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 입니다. 이제 2,000여 년간 켜켜이 쌓여 견고해진 이 인식론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시작해보죠. 먼저 우리는 저공이 왜 하루에 도토리를 일곱 개 주려고 결정했는지 추정해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도토리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기후변화는 무엇이든 도토리 품귀 현상이 있었던 셈이죠. 결국 저공은 도토리의 하루 할당량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품귀 현상이 있기 전에는 분명 하루에 일곱 개 이상의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겁니다. 편의상 열 개의 도토리를 주었다고 하죠. 계속 열 개씩 줄 수 있다면,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는 제안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분명 저공은 도토리 공급자가 다음 에 올 때까지 나누어 줄 수 있는 도토리 전체량과 매일 할당량을 계산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루 할당량 일곱 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공이 원숭이들을 아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료로 쓸 도토리가 부족하면 원숭이들을 처분하거나 아니면 노쇠한 원숭이들을 죽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저공은 한 마리의 원숭이도 가볍게 처분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나중에 시장에 내다 판다 해도, 원숭이들에 대한 저공의 사랑은 각별한 데가 있습니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는 처음 제안에도 저공의 애정이 녹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잠을 청하기 힘든 법이니, 저공은 저녁에 네 개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할당량이 일곱 개로 줄어든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숭이들은 저공의 따뜻한 애정과 불가피한 사정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공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는 저공이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는 약속을 어길 가능성을 헤아린 겁니다. 할당량이 일곱 개로 줄었다면, 일단 아침에 네 개를 먹는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입니다. 저녁에 배가 고프면 힘들 거라고 배려했던 저 공의 애정이 원숭이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공의 애정은 깊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걸 해주는 감정이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저 공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는 제안을 기꺼이 철회합니다. 원숭이들을 아끼지 않았다면 저공은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저 멍청한 것들에게 쓸데없는 제안을 했네. 가장 합리적인 제안을 거부하다니. 이제 내가 모든 걸 결정하고 통보해야지. 아니 통보할 필요도 없어. 그냥 도토리를 나눠 주면 돼. 배가 고프면 먹겠지 뭐.” 하지만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일방적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원숭이들을 아꼈던 겁니다. 그래서 저공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새롭게 제안합니다. 그러나 저공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녁에 세 개를 먹고 배가 부르지 않아 잠을 청하지 못할 원숭이들의 모습이 선했으니까요. 어쨌든 다행 히도 원숭이들은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저공과 원숭이들의 일화는 끝납니다. 이제 우리가 사유 실험을 할 차례입니다.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는 제안마저 원숭이들이 거부했다면 저공은 어떻게 했을까요? 두 번째 제안을 하도록 만들었던 원숭이들에 대한 저공의 애정을 잊지 마세요. 저공은 자신에 대한 원숭이들의 불신을 이해합니다. 그들은 가급적 빨리 도토리를 많이 먹는 쪽을 선호하는 겁니다. 저공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공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도 철회할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제안을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건넬 겁니다. “아침에 다섯, 저녁에 두 개를 주겠다.” 세 번째 제안에 원숭이들이 만족을 표할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이 세 번째 제안에도 화를 낸다면, 저공은 절망적으로 네 번째 제안을 할 겁니다. “아침에 여섯, 저녁에 하나를 주겠다.” 그런데 이 제안마저 원숭이들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침만 있고 저녁은 없다는 식입니다. 한숨이 나올 일이지만, 저공은 원숭이들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건넨 모든 제안에 깔려 있던 사랑을 이제 와서 부정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하루 할당량은 도토리 일곱 개입니다. 그러니 저공은 다섯 번째 제안, 최종 제안을 하겠죠. “아침에 일곱 개를 주고, 저녁에는 주지 않겠다.” 그러나 저공은 사랑에는 최종 제안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맙니다. “아침에 일곱 개를 주겠다는 제안을 원숭이들이 거부한다면, 저공은 원숭이들에 대한 사랑을 접어야 할지 기로에 서게 되겠죠. 우리를 사랑한다면 하루 할당량이 일곱 개라는 판단마저 버리라고 원숭이들은 저공을 압박하겠고요. 마침내 저공은 사랑의 관계에서 최종 제안은 사전에 결정될 수 없고 단지 사후에만 결정된다는 사실,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원숭이들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결국 저공은 최종적이기를 바라는 여섯 번째 제안을 하게 될 겁니다. “아침에 여덟 개만 주겠다.” 여기서 사유 실험은 마치도록 하죠. 여섯 번째 제안에 원숭이들이 기뻐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위시에서 인시로의 전환

 

사유 실험은 사유 실험일 뿐입니다. 세 번째나 네 번째 제안 이 최종 제안으로 확정될 수도 있고, 아니면 열 번째 제안이 최종 제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n번째 제안이 타자에 의해 최종 제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다행히도 원숭이 이야기에서는 두 번째 제안이 제공이 건넨 최종 제안이 됩니다. 무한에 이를 수도 있는 번째 제안이 다행히도 두 번째 제안으로 그치자 저공이 행복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 번째 제안이 거부당했을 때의 안타까움은 그야말로 사치였던 겁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제안이 이루어진 것보다 수 천배 다행스러운 일이니까요. 같은 제물론편에 등장했던 위시 이야기가 기억나시나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의 위시 (爲是)이것에 따른다는 뜻의 인시(因是)의 구분 말입니다. 원숭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저공의 두 제안이 위시입니다. ‘이것이다혹은 옳다고 저공이 생각한 것은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는 첫 번째 제안과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이니까요. 그러나 원숭이가 이것이라 생각한 것은 저 공의 두 번째 제안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입니다. 두 번째 제안에서 저공이 위시한 것과 원숭이가 위시한 것이 일치됩니다. 바로 이때 위시는 인시로 전환됩니다. 저공은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게 아니라 원숭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이름과 내용이 어긋나지 않았지만 노여움과 기쁨이 작용한 것 또한 인시(因是)”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노여움과 기쁨이 아니라 저공이 원숭이들의 노여움에 따르고 그들의 기쁨에 따르는 장면을 떠올리면 쉬운 이야기입니다.

 

이제 저공과 원숭이들 사이의 일화를 통해 장자가 사랑과 소통의 운동을 어떻게 일반화하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성인은 옳음과 그름으로 갈등을 완화하지만 자연스러운 물레[天鈞]’에 머문다.” 저공이 옳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제안이 원숭이들에 의해 그른 것이 되고 처음에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두 번째 제안이 원숭이들에 의해 옳은 것이 되는 역동적 과정을 떠올려 보세요. 바로 이것이 성인은 옳음과 그름으로 갈등을 완화한다고 말할 때 장자의 머릿속에 있던 상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공이 첫 번째 제안을 깔끔하게 마음에서 비워야만 두 번째 제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운다는 뜻의 ()’ 개념이나 잃는다는 뜻의 ()’ 개념이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타자가 예스라고 할 수 있는 제안을 한다는 것은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도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는 첫 번째 제안과 같은 운명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숭이들이 거부하면 저공은 두 번째 제안마저 비워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성인이 자연스러운 물레[天鈞]’에 머문다는 단서를 붙였던 겁니다. 여기서 물레로 번역한 ()’녹로(轆轤)’를 가리킵니다. 도자기 굽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레를 말합니다. 진흙 덩어리를 회전하는 물레 외곽에 두면 그 덩어리는 바깥으로 튕겨 날아가버립니다. 반면 물레 회전판 중앙에 놓이면 진흙 덩어리는 아무리 빠르게 회전해도 바깥으로 튕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물레 중앙은 좌도 우도 아니고 남도 북도 아니고 동도 서도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좌이면서 우이기도 하고 좌도 아니면서 우도 아닙니다. 남이면서 북이기도 하고 남도 아니면서 북도 아닙니다. 동이면서 서이기도 하고 동도 아니면서 서도 아닙니다.

 

돌아가는 물레로, 정확히는 회전하는 물레의 중심으로 장자는 대립적인 것들이 교차하는, 혹은 소통하는 장면을 구체화하려 합니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그르지 않기도 합니다. 주체이기도 하고 타자이기도 하고 주체가 아니기도 타자가 아니기도 합니다. 도추 이야기에 등장하는 문과 지도리와 유사한 비유입니다. 문이 열릴 때 주체가 나가고 타자가 들어올 수 있고, 열린 문에서 안과 밖의 구분이 무화되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세요. 문과 지도리의 이미지가 있는데도 원 숭이 이야기에서 장자가 물레 이미지를 다시 도입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장자는 n번째 제안을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역동적이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 원숭이들이 거부하면 저공의 제안들은 물레 중심에 놓이지 않은 진흙 덩어리처럼 바깥으로 튕겨나가야 합니다. 오직 저공이 위시한 것이 원숭이들이 위시한 것과 일치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결국 원숭이 이야기에서는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는 두 번째 제안만이 회전하는 물레의 중앙에 놓인 다행스러운 진흙 덩어리였던 셈입니다. 비운 마음은 죽은 마음이나 정적에 빠진 마음이 아닙니다. 그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한 마음, 역동적인 마음, 타자가 예스라고 할 때까지 새로운 제안을 하는 지치지 않는 마음이니까요. 겉보기에 저공은 두 가지 제안을 건넸고, 두 번째 제안으로 소통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제안도 언제든 튕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성인은 옳음과 그름으로 갈등을 완화하지만 자연스러운 물레[天鈞]에 머문다고 말하며 이것을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정의했던 겁니다. 물레는 강렬하게 돌고 있어야 진흙 덩어리를 튕겨 내거나 아니면 중앙에 품은 진흙 덩어리로 근사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원숭이 이야기는 사자성어 조삼모사의 저주로부터 풀려나게 됩니다. 저공은 간악한 사기꾼도, 재주로 타인의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꾼도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자에게 행하는 것이 사랑이고 소통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랑꾼이자 소통꾼이었으니까요.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3. 자유를 지켜보는 전사의 마음 / 45. 자유인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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