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선진시대 효의 담론화
『효경』이라는 책명과 내용이 인용된 최초의 사례
『효경』」이 선진문헌에서 독립된 책자로서 언급되고, 그 책의 내용이 정확하게 인용되어 있는 최초의 사례를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식람(先識覽)」 제4, 여섯 번째 편인 「찰미(察微)」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저 나라를 보지(保持)하는 데 있어 최상의 방책은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사태의 최초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방책은 벌어진 일이 결국 어떻게 결말지어질지를 예견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차선책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상황이라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다.
凡持國, 太上知始, 其次知終, 其次知中.
이 세 가지에 능하지 못하면 나라가 반드시 위태로워지고, 군주 자신도 궁색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효경』에 이르기를 ‘높은 자리에 올라도 위태롭게 처신하지 않으면 그 높은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있다. 돈이 집안에 가득 차도 그것이 넘치지 않도록 행동하면 그 부를 오래 지킬 수 있다. 부귀가 그 몸을 떠나지 않은 연후에나 능히 사직을 보전할 수 있고, 그 인민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 초나라는 바로 이것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三者不能, 國必危, 身必窮. 『孝經』曰: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 富貴不離其身, 然後能保其社稷, 而和其民人.” 楚不能之也.
‘찰미(察微)’라는 것은 사태가 발발하기 이전에 그 미세한 조짐[微]을 미리 살피고 간파[察]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실례로 든 역사적 사례는 초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대 전역(戰役)이었던 ‘계보지전(雞父之戰, BC 519, 魯 昭公 23년)’을 두고 한 말이었다.
초나라 변읍으로서 오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있었던 비량(卑梁)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비량의 처녀와 오나라의 변읍의 처녀가 함께 변경 뽕나무 숲에서 뽕닢따며 지들끼리 놀다 어쩌다가 비량의 처녀가 생채기를 입게 된다. 그래서 비량처녀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오나라 변읍동네에 가서 사과를 요구했는데, 오처녀 아버지가 애들 싸움에 뭔 어른까지 야단이냐고 불순하게 대했다. 비량처녀 아버지가 격분한 나머지 오처녀 아버지를 격살(擊殺)하고 돌아와 버렸다. 오처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다시 비량으로 가서 비량처녀 한 집안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자 비량의 군주는, “어찌하여 오나라사람들이 내 습성을 깔보고 쳐들어 와서 우리 읍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냐”하고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 변읍으로 가서 그곳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오왕 이매(夷昧, BC 543~527 재위)가 이 사실을 듣고 화가 치밀어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 비량으로 가서 그 성읍사람들을 전멸시키고 초토화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십 년을 끄는 대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초나라가 수치와 굴욕 당하는 패배를 맛보게 된다. 초나라의 평왕(平王, BC 528~516 재위)은 부인까지 빼앗기고 만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사태나 아프가니스탄사태도 그 심층에 있어서는 동일한 양상이라고 생각된다. 부시는 전혀 ‘찰미(察微)’의 덕성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오바마라도 그 미(微)를 살피고 또 살피어야 할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미(察微)」에서 이 계보의 전역을 사례로 들어 ‘지시(知始)’, ‘지종(知終)’, ‘지중(知中)’의 세 방책을 논의하다가 『효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효경』의 문장은 현재 금ㆍ고문의 「제후장」에 들어있는 원문 모습 그대로이다.
이설(異說)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주석가들이 여기 『효경』 운운하여 인용한 대목은 앞 문장에 대한 주석의 형태로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진창제陳昌齊 설) 말하기도 하고, 『효경』 인용 대목을 빼면 앞뒤가 더 매끄럽게 연결된다는 등(진기유陳奇猷 교석) 여러 다양한 가설을 펴고 있으나 후에 다시 상술하겠지만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문헌의 성격으로 보나(그렇게 사람들이 만지작거렸던 문헌이 아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내에 존재하는 「효행(孝行)」편에 또 다시 인용되고 있는 『효경』의 문장들을 보나 이러한 제설은 췌설(贅說)에 불과하다. 앞뒤의 연결도 초나라 군주와 오나라 군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의미맥락이므로 『효경』의 「제후장」의 의미맥락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쓰여졌을 당시 『효경』이 독립된 문헌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론의 여지가 없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찰미」 편 기사는 『효경』이 선진시대에 독립된 책자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부동의 확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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