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를 반박하는 순자의 명쾌한 논리
데카르트의 코기탄스(cogitans)로부터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monadology)에 이르는 모호한 선험적 명제들을 대하다가, 갑자기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의 ‘백지(white paper)’【록크는 『인간오성론』 속에서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그것은 1700년 삐에르 코스테Pierre Coste가 『인간오성론』을 불어로 번역할 때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의 라틴어 번역개념을 부과하여 날조한 개념이며 전혀 록크의 의도와 관련없다】를 대하는 느낌을 받는다. 록크는 『인간오성론』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백지로써 태어나며, 그 백지 이전의 감성에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백지 위에 무한히 다채로운 저작물을 그려넣는 것은 오직 경험(experience)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이 백지 위에 무한히 다채로운 추론과 지식의 저작물을 그려 넣었을까? 이에 대하여 내가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경험으로부터’라고 나는 말하겠다.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근거하는 것이며,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Whence has it all the materials of reason and knowledge? To this I answer in one word, from experience: in that all our knowledge is founded, and from that it ultimately derives itself. (Book I, Ch.1, Sec.2).
록크는 백지(白紙)라는 말을 통하여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그리고 스콜라철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속에는 본래적으로 어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도덕적 원리 같은 것이 구유되어 있다고 하는 모든 선험론적 주장을 통박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 이제 맹자(孟子)를 반박하는 순자(荀子)의 명쾌한 논리를 한번 들어보자
지금 사람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배고프면 배불리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습게 몸을 뎁히기를 원하고, 일을 많이 하여 피곤하면 쉬기를 원한다. 이것이 곧 사람의 성정이다(타고난 대로의 감정이나 생리의 경향성, 그것을 순자는 곧 본성이라고 규정한다).
今人之性, 飢而欲飽, 寒而欲煖, 勞而欲休, 此人之情性也.
지금 사람이 배가 고픈데도 윗사람을 보면 감히 먼저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하여 피곤한데도 감히 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대저 아들이 아버지에게 양보하고 동생이 형에게 양보하는 것과, 아들이 아버지 일을 대신하고 동생이 형 일을 대신하는 것, 이 두 가지 행동은 인간의 본성(性)에 반(反)하는 것이며 인간의 정리(情理)에 어긋나는 것이다.
今人飢, 見長不敢先食者, 將有所讓也. 勞而不敢求息者, 將有所代也. 夫子之讓乎父, 弟之讓乎兄; 子之代乎父, 弟之代乎兄, 此二行者, 皆反於性而悖於情也.
그러므로 효자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후천적 예의의 학습을 거쳐 수식된 질서이다. 그러니 성정을 솔직히 따르게 되면 사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양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 성정에 패역(悖逆)하는 것이다.
然而孝子之道, 禮義之文理也. 故順情性則不辭讓矣, 辭讓則悖於情性矣.
이러한 사실로써 인간의 문제를 살펴본다면, 인간의 본성이 본시 혐오스럽다(惡: ‘악’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善: 좋다)하다고 하는 것은 후천적 습득에 의한 작위[僞]일 뿐이다.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성오(性惡)」
이것은 순자(荀子)가 맹자(孟子)의 성선(性善)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는 성오(性惡)의 논리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순자(荀子)의 학설을 성악(性惡)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순자(荀子)는 ‘성악’을 말한 적이 없다. 맹자(孟子)의 선(善)도, 순자(荀子)의 악(惡)도, 어떤 윤리적 실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순자(荀子)의 ‘惡’는 ‘악’으로 읽지 말고 ‘오’로 읽어야 한다. 선진철학에 있어서는 조로아스터교ㆍ유대교ㆍ기독교의 윤리와는 달리 선ㆍ악이 실체화되지 않는다. 순자(荀子)는 인간의 본성이 호오(好惡)의 주체임을 말했을 뿐이다(「性惡」).
人之性惡, … 生而有疾惡焉.
‘인지성오(人之性惡)’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질오(疾惡)’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실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가능성을 태어난 대로의 본성에 다 부여해버리면 후천적 학습의 필요성이나 의미가 다 상실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진흙을 이겨 기와를 만드는 도자기꾼[陶人]이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어떻게 타고난 본성 그대로 도자기를 만든단 말인가? 어찌 목공이 나무를 깎아 기물을 만드는 것이 목공의 타고난 대로의 재주란 말인가? 성인이 예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도자기꾼이 진흙을 빚어 기와를 만들어내는 것과 똑같은 후천적 학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聖人之於禮義積僞也, 亦猶陶埏而生之也],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요ㆍ순이나 걸왕ㆍ도척이나 다 동일한 것이다[堯舜之與桀跖, 其性一也], 예의나 축적되는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인간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라고 해버린다면 요임금ㆍ우임금을 귀하게 여길 까닭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걸왕ㆍ도척ㆍ소인배들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들이 타고난 본성 그대로를 따르고[從其性], 자기 감정 흐르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며[順其情], 결국에 가서는 이익을 탐내고 타인의 물건과 행복을 다투어 빼앗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효와 관련하여 순자(荀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어찌하여 증삼(會參)과 민자건(閔子爲)과 효기(孝己: 은나라 고종高宗의 태자로서 효행으로 유명)만을 사적(私的)으로 사랑하고, 그 외의 뭇사람들은 다 제켜 두었을까보냐!
天非私曾ㆍ騫ㆍ孝己而外衆人.
그런데도 유독 이 세 사람만이 효의 실천에 있어서 홀로 돈독하여 효의 이름을 독차지한 것은 무슨 까닭이뇨?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삶의 과정을 통하여 예의의 실천에 극도로 헌신했기 때문인 것이다.
然而曾ㆍ騫ㆍ孝己獨厚於孝之實而全於孝之名者, 何也? 以綦於禮義故也. 「性惡」
순자(荀子)에게 있어서 효란 후천적 노력과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선천적 도덕원리의 자연스러운 발로가 아니다. 우리는 경험론자들의 논리가 합리론자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신화적 얼버무림이 없기 때문이다. 순자(荀子)의 논리야말로 오히려 공자의 적통일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도덕성을 더 합리적으로 발전시킨 사상가일 수가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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