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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제10장 『여씨춘추』를 논함 - 『효경』과 진(秦)제국의 탄생, 저자는 여불위의 식객이었다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0장 『여씨춘추』를 논함 - 『효경』과 진(秦)제국의 탄생, 저자는 여불위의 식객이었다

건방진방랑자 2023. 4. 1.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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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경과 진()제국의 탄생, 저자는 여불위의 식객이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추상적 가치로써 인욕을 절제시키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간세의 새로운 보편주의적 질서를 설파함으로써 로마제국을 압도하는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효경의 저자는 인간의 생리적 본능으로부터 고도로 추상화된 상징계의 도덕적ㆍ인문적 원리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라는 개념 하나로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효경의 저자, 그 엑스(x)는 누구일까? 나는 감히 단언한다. 아니, 단언할 수밖에 없다. 그 엑스는 여불위(呂不韋)의 식객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간백(簡帛)자료가 출토된 이후 중국 고경의 상한선을 마구 올려잡는 경향이 있으나 효경의 경우, 그런 방식으로 올리기에는 너무도 명백한 양식의 한계가 있다. 최근 곽점에서 출토된 죽간 중에 현행 예기속에 보존되어 있는 치의편의 부동전본(不同傳本)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치의편은 어떤 간략 주제를 전개하고 그 논리를 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마감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러한 양식이 효경과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효경치의가 동시대의 작품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효경치의의 양식은 취했으나, 치의의 잡다한 성격에 비해 아주 전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전체가 어떤 의도된 결구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치의보다는 후대에 성립한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치의에는 현실정치적 효과라는 것이 전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으나 효경은 효라는 일관된 주제를 위정(爲政)’과 결합하여 효치(孝治)’라는 정치적 개념을 창출해내고 있다.

 

효경은 분명 새로운 제국질서의 태동을 감지하면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앞서 어떠한 사상가가 집필한 작품이며,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서물로서 인용되었다는 것은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집한 학자군 속에 그 엑스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엑스가 증자학파 계열의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아사노 유우이찌(淺野裕一)는 증자문하의 사람이 전국말기에 공자르쌍띠망(ressentiment, 막연한 분노)’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자에게 왕자(王者)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위장공작의 일환으로 효경을 썼다고 말한다. 공자를 허구적인 공자왕조의 개종(開宗)으로서 떠받들기 위하여 만든 일종의 공자 해원(解寃)의 선전 작품이라고 혹평하고 있다(공자신화孔子神話6).

 

그러나 그의 시각은 너무 편협하다. 내가 논어한글역주에서 설파했듯이(1-147~156), 아사노는 르쌍띠망이라는 개념 자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부적절한 개념공자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그리고 공자와 효경이 르쌍띠망이라는 주제로 연결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효경증자(曾子) - 맹자(孟子) 계열의 유교를 적통으로 하면서, 순자(荀子), 법가, 도가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한 엑스가 시세의 풍운을 감지하면서 만든 걸작품이고, 그것이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성립의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한 대에 까지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나 그 후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효경만이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결국 동아시아문명을 효의 제국문명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효경의 저자가 산 시대가, 에피쿠로스(Epikuros, BC 341~270) 나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Zenon, BC 336~264)과 같은 사상가들이 산 헬레니즘의 시대와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더대제로 인하여 제국이 출현하면서 폴리스가 코스모폴리스로 확대되고, 동서문명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견유학파(Cynics), 스토아학파(Stoics), 에피큐로스학파(Epicurean), 회의학파(Sceptics) 등의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다양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이들의 아타락시아(ataraxia, 안정)와 같은 양생의 논리, 선악의 초월, 그리고 이성과 절제를 가르치는 로고스적 세계관은 서구사상사에서 최초로 인생론과 우주론이 본격적 결합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신흥 로마문명의 새로운 정신질서의 바탕이 되었다.

 

여불위(呂不韋)의 비견과 더불어 진제국문명이 탄생되어가는 과정이나,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결국 카르타고를 제압, 지중해 제해권을 거머쥐면서 새로운 제국을 형성해가는 과정은 맞물려있다. 효경의 탄생과 바울의 서한문(書翰文)을 동차원에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둘 다 가장 지속적인 동·서문명의 제국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아니 비교될 수 없다. (Xiao)에도 부활(Resurrection)에도 다 신화적 측면이 있고, 다 인문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부활은 건강한 인문의 기준이 흔들리면 항상 신화로 퇴행한다. 그러나 효에 있어서의 신화는 강요된 정치적 세뇌일 뿐이며, 그러한 세뇌가 쇠퇴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세기에 있어서는 가장 비폭력적이고 자발적이며 상식적인 인문질서를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보다 안전하게 지속적일 수 있는 의식형태라고 사료된다. 광명천지에서 부활의 신화는 호박꽃처럼 한 철일 뿐 견지되기 어렵다. 그것은 우신(愚信)이다. 종교의 제도나 경전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 합리적인 도덕질서를 창조하는 데는 효 이상의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에게 너무도 상식화되어 있고,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 실체로서 감지하지 않을 뿐이다.

 

 

오년상방여불위(五年相邦呂不韋)’ 청동과(靑銅戈)

청동시대가 시작된 후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무기는 과()였다. 은말주초(殷末周初)로부터 진한(秦漢)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병기(兵器)가 과였다. 우리가 쓰는 ()’이라는 글자에 ()’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도 과거 전쟁의 주무기가 과였음을 알 수 있다.

찌르는 용도만을 지닌 창모양의 것은 ()’라고 하는데 모에 비하여 과의 용도는 다양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돌출되어 있는 부분을 ()’이라고 부르고 자루 역할을 하는 부분을 ()’라고 한다. 원의 반대편에 직각으로 나와있는 것을 ()’라고 하는데, 내도 3면이 칼날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호부분에 구멍이 4개 나 있는데 내를 자루속으로 집어 넣고 그 구멍에 가죽끈을 통과시켜 단단하게 묶는다. 호와 원의 각도가 100°일때 가장 사람 목을 정확하게 벨 수 있다는 법칙을 고대인들은 발견했다.

지금 이 과의 배면에 오년상방여불위조조사도승즙공인(五年相邦呂不韋造詔事圖丞蕺工寅)’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이것이 여불위가 실제로 사용하던 과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오년(五年)’이라는 것은 진왕(秦王) ()5(BC 242)이며, ‘상방(相邦)’은 상국(相國), 즉 재상이라는 뜻이다. ‘조사(詔事)’는 과를 제조한 무기제조창의 이름이며, ‘()’()’은 제조한 사람의 이름이다. ‘()’()’은 이 두 사람의 직위를 나타낸다.

전문을 번역하면 이와같다: “BC 242년 재상 여불위께서 만드신 과, 조사도의 승 즙과 공 인이 들었다[五年相邦呂不韋, 造詔事圖丞蕺工寅].”

병기제조에 상국(相國)이 직접 관여하는 것만 보아도 진나라가 얼마나 무력에 힘쓴 나라인지 알 수 있다. 병기의 질도 탁월하다. 중국의 역사는 이와같이 사실(史實)을 전하는 유물들이 남아있어 그 실존성을 우리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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