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효도란 안색을 온화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2-8. 자하가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어른의 안색을 살필 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어른에게 구찮은 일이 있으면 제자가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술과 밥이 있으면 어른께서 먼저 잡수시게 하는 것만으로 일찍이 효라 할 수 있겠는가?” 2-8.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
앞의 2-7과 사실 그 주제의 맥락이 일치되는 것이다. 효(孝)의 본질이 단지 물리적 수고를 덜어드리거나, 음식을 먼저 드리거나 하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외면적 치레가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을 강력히 천명한 것이다. 자하(子夏)는 이미 1-7에 기출하였다. 그곳에도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 하여 ‘색(色)’자가 들어갔고, 여기서도 ‘색(色)’자가 들어있다. 그 뜻이 외면적으로는 다른 것 같아도 그 내면에서는 상통함이 있다.
여기서의 ‘색(色)’이란 주로 ‘안색’을 말하는데, 안색이란 단지 표정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나의 몸의 정감의 상태의 전체적 표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철학적 인간관을 전제로 해서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유기체적 함의를 지니는 말이다. 즉 색(色)이란 느낌의 복합적 실감(實感)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시각적 구성만을 의미하는 허감(虛感)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색난(色難)’의 해석을 둘러싼 고주(古注)와 신주(新注)의 대결이다. 고주는 색(色)의 주체를 부모로 보았고, 신주는 색(色)의 주체를 자식으로 보았다. 고주에 의하면 자식이 부모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되고, 신주에 의하면 부모를 공 양함에 자식이 항상 온화하고 공경스러운 안색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주의 경우, 자칫하면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안색은 역시 부모의 안색이고, 그 안색을 살필 줄 아는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내 중심이 아니라 부모님 중심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주는 역시 나의 실존의 도덕주의가 강화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색난(色難) | |
고주(古註) | 신주(新註) |
자식이 부모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어렵다. | 부모를 공양함에 자식이 항상 온화하고 공경스러운 안색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
그런데 자하(夏)가 효(孝)를 묻는 이 대화의 원문을 뜯어보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은 나와 있질 않다. 제자(弟子)와 선생(先生)이라는 말만 나와 있다. 고주ㆍ신주가 모두 ‘선생(先生)’을 ‘부형(父兄)’으로 풀고, 제자(弟子)를 문제(門弟)만에 한정된 뜻이 아닌 그냥 어린 사람이라고 풀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 역시 결코 애매하게 얼버무릴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공자의 대답으로 미루어 효(孝)가 꼭 부모-자식 간에만 한정된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원의적 맥락이 다시 한 번 정확히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효(孝)는 좁은 개념의 가족윤리의 울타리에 갇힌 개념이 아니라, 선생과 제자 사이에, 장자(長者)와 유자(幼者) 사이에 폭넓게 쓰인 어떤 덕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주사(酒食)’의 사(食)는 우리말로도 ‘식’으로 안 읽고, ‘사’로 읽는다. 거성(去聲)이며 정확하게 ‘밥’의 뜻이다. 증(曾)은 양평(陽平)이며 ‘청(ceng)’으로 발음된다. 구문의 맨 앞에 첨가되어 의미를 강화시키는 말이며, ‘내(乃)’로 훈(訓) 되어진다.
‘食’은 ‘사(嗣)’라고 읽는다. ○ ‘색난(色難)’이라는 것은 부모님을 섬길 때에 오직 나의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일컫는다. ‘사(食)’는 밥이다. ‘선생(先生)’은 부형(父兄)이다. ‘찬(饌)’은 마시게 하고 먹게 하는 것이다. ‘증(曾)’은 ‘일찍이[嘗]’과 같다. 대저 효자로서 깊은 사랑이 있는 자는 반드시 화기(和 氣)가 있고, 화기가 있는 자는 반드시 환한 빛이 있고, 환한 빛이 있는 자는 반드시 부드럽고 유순한 용모가 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섬길 때에는 얼굴빛이 유순한 것이 어려운 것이지, 그까짓 노고를 다하여 봉양하는 것은 효라 하기에 미흡하다. 옛 설(마융 주)에 부모님의 얼굴빛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통용될 수 있는 해석이다.
食, 音嗣. ○ 色難, 謂事親之際, 惟色爲難也. 食, 飯也. 先生, 父兄也. 饌, 飮食之也. 曾, 猶嘗也. 蓋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故事親之際, 惟色爲難耳, 服勞奉養未足爲孝也. 舊說, 承順父母之色爲難, 亦通.
○ 정자가 말하였다: “맹의자(孟懿子)에게 말씀하신 것은 실은 많은 대중을 상대로 하신 것이요, 맹무백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개인의 사람됨이 근심할 것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이요, 자유는 잘 봉양은 하지마는 혹 공경에 잘못됨이 있을까 염려해서였고, 자하는 강직하고 의로우나 온화하고 촉촉한 표정이 부족할까 걱정하셨기 때문이니, 각기 그 재질의 고하와 부족한 방면에 따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주제에 말씀이 같지 않은 것이다.”
○ 程子曰: “告懿子, 告衆人者也. 告武伯者, 以其人多可憂之事. 子游能養而或失於敬, 子夏能直義而或少溫潤之色. 各因其材之高下, 與其所失而告之, 故不同也.”
정자의 주석이 정석을 얻고 있다. 공자의 말씀의 위대성은 그 첫째가 일상성이요, 그 둘째가 평범성이요, 그 셋째가 상황이다. 일상의 생활사 속에서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하고, 평범한 이야기 가운데서 비범한 진리를 설파하고, 상황상황에 맞게 변조하여 방편적으로 진제를 드러낸다. 내가 공자의 언어를 째즈라 말하는 것이 곧 정자가 갈파하는 바 공자의 로기온의 상황성에 있는 것이다. 째즈는 악보가 코드만 그려져 있을 뿐 멜로디가 표시되어 있질 않다. 따라서 연주할 때마다 그 멜로디는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앙상블이 척척 들어맞는다. 16분의 1 음표마저 세밀하게 악보대로 쳐야 하는 클래식 과는 전혀 연주방법이 다르다. 신코페이션, 인버젼, 텐션의 변주가 상황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다. 공자의 마음에는 효에 관한 어떤 코드가 있다. 그러나 그 멜로디는 묻는 자의 인격역량과 또 물을 때의 심경과 또 그 역사적 정황에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공자는 분명 클래식 아티스트가 아닌 째즈 아티스트였다. 북경올림픽 개막식에 표현된 공자의 모습도 그렇게 째지(jazzy)한 그 무엇이었고 콘템포러리한 해석을 허용하는 그 무엇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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