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禮)로 섬기고,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라
2-5. 맹의자가 효를 물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거슬림이 없는 것이 외다.” 2-5.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번지가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그에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맹손씨 가 나에게 효를 물었는데, 나는 그냥 거슬림이 없는 것이라고만 대답했단다.”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樊遲曰: “何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살아계실 때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 지내는 것이다.” 子曰: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
효에 관한 테마
앞의 편해(篇解)에서 말했듯이 1장부터 4장까지가 본편의 강령에 해당 되는 것으로, 공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는 어떤 지침으로서 초기 공자학단 내에서 암송되었던 공자의 말씀 모음이다. 정치, 학문, 덕, 예, 군자 등의 테마가 최초의 4장에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장으로부터 다음의 여덟 번째 장에 이르기까지는 효(孝)에 관한 단일한 주제의 단편들이 집약적으로 콜렉션되어 있다. 이것은 ‘효(孝)’를 중시하는 증자학파에 의하여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것은 「안연」 1~3이 인(仁)에 관한 물음, 즉 ‘A가 인(仁)에 관해 물었다[A問仁]. 그래서 공자가 그에 대답하였다[子曰]’라고 하는 어떤 단일 주제에 관한 물음을 기록한 양식과 동일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이 「위정(爲政)」편의 5~8장과 하론(下論) 「안연(顔淵)」편의 1~3장은 성립한 시기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동일그룹에 의한 같은 양식의 편집이 분리되어 각기 다른 편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4장의 강령 속에 직접적으로 효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5~8장의 파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5장은 효가 ‘예로써 섬김’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결국은 강령 속에 있는 제3장의 테마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주제로 묶인 로기온그룹들이 앞에 나온 강령의 테마를 각기 전개해나가고 있는 것이 「위정(爲政)」편의 특징이다.
「위정(爲政)」 5~8 | A문효(問孝), 자왈(子曰): |
「안연(顔淵)」 1~3 | A문인(問仁), 자왈(子曰): |
여기서 우리는 공자를 ‘째즈의 명인’이라든가, ‘선(禪)의 조형’이라고 규정한 서막의 논의를 한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째즈는 같은 주제에 대해 동일한 궤적의 멜로디를 반복하지 않는다. 선문답은 문답의 순간순간의 상황에 따라 변조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방편설법(方便說法)’이라는 말이 곧 그러한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자는 효(孝)에 대해서나, 인(仁)에 대해서나 어떤 정답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 주제의 의미를 발현시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재구성이 없이는 공자의 말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환(三桓)에 대해
이 장에는 세 사람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첫째 인물이 우리의 주인공 공자고, 둘째 인물이 맹의자(孟懿子, 멍이쯔, Meng Yi-zi)라는 삼환(三桓)가문의 대부(大夫) 중의 한 사람이고, 셋째 인물이 공자의 말년제자 번지(樊遲, 환츠으, Fan Chi)라는 재미있는 캐릭터의 한 인물이다. 우선 효(孝)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맹의자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삼환(三桓)을 이해해야 하고, 삼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배경을 훑어내려야 할 것 같다. 사마천은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를 다음과 같은 탄식으로 끝맺고 있다.
노나라의 역사를 개관해 보건대 그 고등한 의례의 측면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장에서 벌어진 일들은 어찌 그다지도 슬픈 패륜의 이야기들이란 말인가?
至其揖讓之禮則從矣, 而行事何其戾也?
『춘추』는 노나라의 은공(隱公) 원년(BC 722)의 기사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애공(哀公) 14년(BC 481) ‘봄, 서쪽지방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춘(春), 서수획린(西狩獲麟)]’이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12대 242년간의 편년체 역사다【그 뒤에 붙은 애공(哀公) 하편은 공자의 제자들이 이어서 쓴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을 잡아죽인 사건은 매우 불길한 사건이다. 공자는 획린(獲麟)과 더불어 절필(絶筆)했다. 죽기 2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절필의 의미로 ‘획린(獲麟)’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춘추라는 ‘봄ㆍ가을’로 이어지는 시간의 무대 위에 등장하는 노나라의 역사는 매우 슬픈 역사다. 인간의 욕망과 죽음과 사랑이 원칙없이 뒤얽힌 비극의 역사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환(三桓)이라는 세 권세가문이 국군(國君) 위로 군림하는 권력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환(三桓)’은 본시 ‘환공(桓公)의 세 아들’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춘추』의 모두(冒頭)를 장식하는 은공(隱公)은 노(魯)나라 건국초대의 국공(國公)인 백금(伯禽)으로부터 세어보면 13대째에 해당되는 임금이다. 이 은공이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이었고, 이 은공의 비극으로부터 희공(僖公)에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가 삼환(三桓)의 등장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은공의 아버지는 혜공(惠公)이었다. 혜공은 후대의 은공이 된 식(息)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은공 식(息)은 천첩(賤妾)의 소생으로 적자(嫡子)가 아니었다. 서자(庶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혜공의 후사를 잇는 적통의 태자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차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송(宋)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송녀(宋女)는 엄청난 미녀였다. 이 송나라 여인 이 노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만 부친 혜공이 자기 며느리 될 사람의 미모에 홀리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 전에 자기가 차지해버렸고, 이 송녀(宋女)에게서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그 이름이 윤(允)이다. 그래서 이 송녀(宋女)를 정부인(正夫人)으로 승격시키고 새로 낳은 아들 윤(允)을 태자로 삼았다. 마침 혜공은 전 정실부인에게서는 아들 후사가 없었고, 또 마침 전 부인이 사망한 상태였던 것 같다.
드디어 혜공이 세상을 뜨자, 후사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연히 태자 윤(允)이 임금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중론이 이 장서자(長庶子)인 식(息)에게로 쏠렸다. 그래서 중지를 모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바로 은공(隱公, 인꽁, Yin Gong)이다. 결국 은공은 자기 부친 혜공의 의지에 반하여 군주의 지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고 이 은공이라는 인물은 퍽으나 착했던 사람 같다. 그래서 자기는 태자 윤(允)이 장성할 때까지 섭정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태자는 어찌 보면 이복동생이지만, 실은 자기의 부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의 자식이다. 다시 말해서 이복동생이면서 친자식과도 같은 기묘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항상 이런 상황에는 악인(惡人)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은공 11년 겨울의 일이다. 노나라 군주의 일족이었던 공자 휘(揮)라는 사람이, 은공에게 찾아와 귀띔을 한다. 중론이 이제 다 은공에게 모아진 이런 상황에서, 태자 윤(允)을 살려두는 것은 후환을 남겨두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태자 윤(允)을 죽이겠으니 그 보수로 자기에게 재상(宰相)자리를 달라고 했다. 마음이 착한 은공은 자기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생각이 없다고 했다. 윤이 어렸기 때문에 자기가 대신 임금노릇을 했을 뿐이며 이제 윤이 장성하였으니 시골 토구(菟裘)의 땅에 초막을 짓고 노년을 준비할 것이며 윤에게 정권을 넘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휘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일단 발설을 한 이상, 그 말이 태자 윤의 귀에 들어가면 자기 신변이 위태로워지리라는 공포감에 곧바로 윤에게 달려가 말했다: “은공이 이제 섭정을 거두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당신의 신변을 생각하십시오. 그대를 위해 은공을 살해하겠습니다[隱公欲遂立, 去子, 子其圖之. 請爲子殺隱公].” 그러자 그만 윤은 그 음모를 허락하고 말았다.
은공이 종무제(鍾巫祭)【종(鍾)이 지명이라면 종 땅의 무제. 하여튼 무당제사의 일종】를 지내고 그 제례와 관계된 신하, 위씨(氏)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날 밤 휘는 자객을 위씨집으로 보내어 은공을 시해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윤(允)이 은공에 뒤이어 즉위하였는데 이가 곧 환공(桓公, 후안공, Huan Gong)이다. 그러니까 환공은 자기를 위기에서 보호해준 은인이며, 형이며, 아버지뻘인 은공을 시해하고 군위(君位)에 올랐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 속에 노나라 『춘추』의 무대는 막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사기(史記)』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를 중심으로 기술】.
이렇게 해서 임금이 된 환공은 행복할 리가 없었다. 환공은 즉위한 지 3년이 지나 결혼한다. 부인을 이웃 강대국인 제나라에서 취했는데, 이 여자는 제나라의 국군인 양공(襄公, 시앙꽁, Xiang Gong)의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전개되는 모든 노나라의 비극은 제나라 양공의 여동생이며 노나라 환공의 부인인, 이 문강(文姜)이라는 이름의 여인 한 몸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이 문강은 자기 오빠와 근친상간의 애절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환공부인 문강은 결혼 3년 후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아들의 생일이 환공과 같았다. 그래서 동(同)이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다. 이가 곧 훗날의 장공(莊公, 주앙꽁, Zhuang Gong)이다. 그런데 결혼 후 15년 후, 환공 18년 봄, 환공은 부인과 함께 제나라를 방문하려 하였다. 노나라의 대부 신수(申繻)가 극구 말렸지만 환공은 결국 제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문강은 자기 오빠 제 양공(襄公)과 얼싸구나 좋다하고 간통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를 눈치 챈 환공은 부인에게 화를 내니, 부인이 제 양공에게 고자질을 하였다. 제 양공은 환공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제나라의 미주(美酒)로 환공을 만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환공을 껴안아 수레에 올려놓게 만들었는데, 이때 힘이 장사인 제나라의 공자 팽생(彭生)보고 환공을 껴안으면서 그의 늑골을 으스러뜨려 버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수레에 눕히면서 수레 속에서 암살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환공의 일생은 덧없이 끝났다. 그리고 제나라 사람들은 팽생을 잡아죽이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고 말았다. 태자 동(同)이 즉위하니 이가 곧 장공(莊公)이다. 환공의 부인 문강은 귀국(歸國)을 하지 못하고, 제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자기 아들 장공의 치세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노(魯)ㆍ제(齊)간에 전쟁이 없었고 한 30여 년간 국정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장 공 말년에 또 다시 비운의 씨앗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장공은 환공의 아들이다. 그런데 장공에게는 세 동생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세 동생은 제나라 여자 문강(文姜)의 소생이 아닌 측실(側室)의 소생일 것이다. 이 세 아들의 출생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진(陳)나라 여인의 소생으로 사료된다. 그 맏아들이 경보(慶父, 칭후우, Qing-fu)요, 둘째 아들이 숙아(叔牙, 수야, Shu-ya)요, 막내가 계우(季友, 지여우, Ji-you)다. 막내 계우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좌전』 민공(閔公) 이년조(二年條)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성계(成季, 게우)가 태어나려고 할 때, 환공은 복초구(卜楚丘)의 아비를 시켜 점을 치게 하였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남자입니다. 그 이름은 우(友)라 하지요. 공(公)의 우측에 있으며, 주사(周社)와 박사(亳社) 사이에서 공실(公室)을 보좌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계씨가 망하면 노나라는 창성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 태어나고 보니 손에 무늬가 있었는데 우(友)자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이름 지었다[成季之將生也, 桓公使卜楚丘之父卜之, 曰, 男也. 其名曰友. 在公之右, 間于兩社, 爲公室輔. 季氏亡則魯不昌. …… 及生, 有文在其手曰友. 遂以命之].”
『열국지』에 보면 경보와 숙아는 장공의 이복형제로서 한 어머니에서 난 서자 들이었는데, 경보는 장공보다 나이가 많은 서형이었고 숙아는 서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우(季友)는 동복동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문강(文姜)이 환공과의 사이에서 낳은 또 하나의 아들인 셈이다. 그래서 장공은 친동생 계우를 각별히 신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마다 주장이 달라 그 계보를 명료하게 확정짓기는 어렵다. 이름으로 볼 때, 이 세 사람은 한배에서 태어난 사람들 같다. 또 「세가」는 그런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모두 장공의 동생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여튼 이 세 아들, 경보(慶父), 숙아(叔牙), 계우(季友)의 자손들을 각기 맹손씨(孟孫氏, 경보의 자손들), 숙손씨(孫孫氏, 숙아의 자손들), 계손씨(季孫氏, 계우의 자손들)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세 집단을 우리가 삼환(三桓)이라고도 부르고, 삼가(三家), 삼경(三卿), 삼손(孫)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삼가(三家) 중 계씨(季氏) 집안이 가장 막강했으므로 상경(上卿)이라 특칭하기도 한다. 이들은 환공(桓公)의 본가(本家)가 아닌 별가(別家)인 셈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장공(莊公) 말년부터 전개되는 삼환(三桓)의 농정(弄政) 추태의 복잡한 양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장공은 제나라 여자를 정실부인으로 취하였는데 그 이름이 애강(哀姜)이다. 애강은 문자 그대로 슬픈 운명의 여인이었다. 애강은 문강과 정을 통한 문강의 오빠 제양공(齊襄公)의 딸이다. 문강은 자기 정부 제양공의 딸을 자기 아들과 기어이 결혼시키고 만 것이다. 장공의 입장에서 보면 애강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의 딸인 셈이다. 그래서 그녀를 그리 가까이 하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 도 애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하여튼 애강은 이후에도 경보와 간통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애강의 뒤를 이어 애강의 친정동생 숙강(叔姜)이 노장공의 잉첩(媵妾)【시집가는 귀족 여자에게 딸려가는 여인】이 된다. 그런데 숙강은 장공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그 맏아들의 이름이 개(開, 카이, Kai)【계(啓)라고도 한다】였다. 그러나 장공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맹녀(孟女 혹은 맹임孟任)였다. 장공은 대(臺)를 쌓아 올리는 공사를 하러 대부(大夫) 당씨(黨氏)의 저택을 방문하였다가 미모의 딸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그녀를 부인으로 삼겠다고 그 아비에게 약속하고 서로 팔뚝을 베어 피를 내어 굳게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 당씨의 딸 맹녀에게서 반(斑, 빤, Ban)【반(般)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장공이 후계자로 삼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 맹녀의 아들 반이었다.
장공이 32년이라는 기나긴 재위 끝에 드디어 죽음에 직면한다. 병상에서 둘째 동생 숙아(叔牙)에게 상담한즉, 후계자는 제일 큰 동생 경보(慶父)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계일급(一繼一及)’이라는 상속제가 노나라의 불문율이라는 것이다[一繼一及, 魯之常也]. ‘일계일급’이란 아버지의 사후에는 장자(長子)가 대를 잇고, 장자(長子)의 사후에는 동생이 대를 잇는 상속제인 것이다. 후사는 마땅히 경보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공은 이런 숙아(叔牙)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막내 동생인 계우(季友)에게 상담한즉, 그것은 당연히 장공이 원하는 대로 반(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숨을 다하여 반을 세우는데 진력하겠다고 맹세했다[請以死立斑也]. 그러자 장공은 계우에게 숙아 놈이 경보를 군위에 올려놓으려고 한다고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계우는 장공의 명령을 받아 숙아를 대부 침무씨(鍼巫氏)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 침계(鍼季)로 하여금 그에게 짐(鴆)이라는 새의 자색 깃털독이 들어간 술[鴆酒]을 마시도록 협박케 하였다: “이것을 마시면 후손의 제사를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후손이 없게 될 것이다[飮此則有後奉祀. 不然, 死且無後]. 숙아는 마침내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이렇게 해서 숙아는 죄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훗날에 후손을 세워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것이다. 계우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킨다. 나중에 그의 아들을 세워 숙손씨(叔孫氏)로 삼아 일대부가(一大夫家)를 이루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둘째동생 숙아는 이렇게 제일 먼저 무대 뒤로 사라졌다.
장공 32년 8월 계해일(癸亥日), 장공이 죽었다. 그러자 계우는 약속대로 반을 군주로 옹립하였고, 반은 시상(侍喪)하면서 당씨(黨氏)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 반은 두 개월도 못가 암살되어버리고 만다. 문제는 왕위를 놓친 맹손(孟孫) 경보(慶父)의 장난이었다. 경보는 이전부터 자기 형 장공의 부인인 애강과 통간 해온 사이였다. 애강은 장공이 처음부터 자기를 경원시하자 허우대가 크고 풍채 좋고 사내답게 생긴 경보에게 추파를 던져 외로움을 달랬던 것이다. 경보는 애강의 동생 숙강에게서 낳은 아들 개(開)를 옹립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공이 죽자, 경보는 반과 노나라의 대부 양씨(梁氏)의 딸을 두고 삼각관계에 있던 말사육사이며 장사인 낙(犖)을 시켜 반을 살해토록 지시한 것이다. 낙은 옛날에 양씨의 딸과 놀이를 하다가 공자 반에게 들켜 죽도록 곤장을 맞았던 쓰라린 경험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낙은 경보의 사주를 받고 당대부집으로 잠입하여 반을 살해했다. 그러나 낙 또한 당씨 일가의 가병(家兵)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히 죽었다. 경보는 반의 죽음의 죄를 모조리 죽은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모른 체 했다. 반은 덧없이 거세되고 계우는 모친의 친정이 있는 진(陳)나라【송(宋)의 서쪽에 있다】로 망명하였다. 경보는 마침내 장공의 아들 개(開)를 옹립하였다. 이가 곧 민공(閔公)이다【민공의 본명은 개(開)가 아니라 계(啓)다.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는 한(漢) 경제(景帝) 계(啓)의 휘를 피하여 개(開)로 한 것이다. 그리고 『춘추』에서는 민공(閔公) 이라고 했고, 「세가」는 민공(湣公)이라 했다】.
민공 2년, 경보와 그의 형수 애강과의 통간이 아주 빈번해졌다. 경보는 장공이 살아있을 시절부터 형수와 통간해왔는데 이제 노국의 최고 실력자가 되고 보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애강은 자기 애인인 경보가 직접 군주가 되기를 희망했다. 경보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 숙아의 주장대로 자기야말로 ‘일계일급一繼一及)’의 상속법에 의해 군주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경보는 민공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복의(卜齮)라는 대부를 시켜 민공을 습격케 하였다. 복의는 추아(秋亞)라는 자객을 노나라 궁궐의 측문 무위(武闈)에 매복시켰다가 민공을 시해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민공은 햇수로는 2년이지만 재위기 간 불과 반년만에 저승의 객이 되고 만다. 그러나 경보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진나라로 망명한 계우가 이 소식을 듣고 주(邾)나라로 가서 암살당한 민공의 동생 신(申)을 옹립하여 일종의 망명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노나라 사람들에게 신(申)과 자기를 모셔갈 것을 권유한다. 물론 계우는 제나라의 후원까지 다 확보해놓고 있었다. 이에 노나라사람들은 대부 복의(卜齮) 일가를 몰살하고 대세를 그르친 경보마저 주살하려고 하였다. 이에 경보는 거(莒) 나라로 도망갔다. 이 틈에 계우가 신(申)과 함께 귀국하여 그를 옹립하니 이 신 (申)이 곧 희공(僖公)이다.
정부 경보마저 잃어버린 애강은 두려워서 주(邾)나라로 달아났다. 애강은 주(邾)나라에 가서 당시 그곳에 있었던 계우를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우는 애강을 만나주지를 않았다. 계우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신(申)을 데리고 노 나라로 입국하여 그를 희공으로 옹립했던 것이다. 공자 계우는 사신을 통해 거(莒) 나라로 뇌물을 보내 경보를 주살시킬 것을 요구했다. 거나라는 경보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경보는 거나라를 떠나 주나라를 거쳐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의 관리들은 경보의 나쁜 소행을 알고 입국을 허락치 않았다. 공자 경보는 문수(汶水)가에 머물렀다. 때마침 제나라에서 계우의 특사로 다녀오던 대부 해사(奚 斯)가 경보를 만나보고 경보에게 귀국을 권면했다. 경보는 해사를 통해 동생 계우의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해사는 귀국하여 희공과 계우에게 경보의 사정을 얘기했다. 희공은 경보를 용서하고자 했으나 계우는 준엄한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해사에게 이른다: “문수에 가서 경보에게 내 말을 전하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오히려 뒤 이을 자손을 세워 대대로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분부를 받고 해사는 문수가로 갔다. 그러나 정이 많은 해사는 경보에게 차마 그런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사는 경보가 있는 집 앞에 당도하여 그냥 소리높이 통곡했다. 경보는 해사의 통곡소리를 듣고 띠를 끌러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것이 노나라의 역사를 기나긴 시간 동안 피로 물들여야 했던, 정 많고 욕심 많았던 경보라는 사나이의 최후였다. 이로써 삼환(三桓)의 이야기는 슬픈 서막을 내린다. 결국 계우는 자기 두 형을 자살의 독배를 마시도록 한 비정과 비운의 사나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계우는 자기 두 형과는 달리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명분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했기에 그는 이러한 패밀리 비운의 노도 속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패자가 된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주(邾)나라에 있던 애강을 처치하고자 하였다. 선대의 양공의 이복동생 문강(文姜), 그리고 그 딸 애강(哀姜), 이 두 여자를 둘러싸고 일어난 노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말끔히 청산함으로써 노나라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하고 제후국에 대한 패자의 위신을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환공의 브레인인 관중(管仲)은 애강의 문제를 은밀히 다룰 것을 요청했다. 출가외인인데 그들의 문제를 제나라가 직접 관여하여 처리한 인상을 준다면 새로운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제환공은 수초(竪貂)를 주(邾) 나라로 보냈다. 주에 당도한 수초는 애강을 찾아가 노나라로 같이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애강은 노나라로 돌아가려고 수초를 따라 나섰다. 애강이 이(荑, 제나라 지명)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해가 저물어 애강은 관사에 들었고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였다. 수초가 애강에게 정중하게 고한다: “부인께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제나라 사람이든 노나라 사람이든 누구나 다 아는 일이외다. 이제 부인께서 노나라로 돌아가시면, 무슨 면목으로 역대 임금의 신위를 대하시렵니까? 손수 목숨을 끊으사 지금까지의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리이다.”
애강은 문 닫고 구슬피 통곡했다. 밤새 애강의 울음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첫 닭이 울고 울음소리가 정적에 묻혔을 때 그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스스로 목을 졸라 맨 것이다. 노희공은 이 소식을 듣고 친히 이 땅에 이르러 애강의 관을 영접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애강을 후히 장사지내었다. 애강은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뻘이었다. 모자의 정은 가히 끊을 수 없다하고 시호를 애(哀)라고 내렸다. 그래서 그녀를 세칭 애강이라고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희공은 8년이 지난 후에 애강의 신위를 아버지 장공의 신위 곁에 모셨다. 장공의 저승생활에 부인이 없었던 것이다. 애강은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이로써 한 많은 피의 역사 ‘경보의 난(慶父之亂)’이 막을 내렸다. 장공이 죽 은 8월로부터 그 다음해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태가 일단락을 고하고 장공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희공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계손씨는 노나라의 최고실력자로 부상케 된 것이다. 희공은 계우를 비(鄪)읍 땅을 주어 상상(上相)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계우는 이를 사양했다: “신은 경보ㆍ숙아와 함께 환공의 아들이로소이다. 신은 사직을 위해 숙아를 짐살(鴆殺)하고 경보로 하여금 스스로 목매게 했습니다. 대의를 위해 형제를 죽인 것은 부득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 이 두 사람은 후사를 잊지도 못하고 있는데 신만 홀로 외람되게 영화와 벼슬을 누리고 녹읍을 받는다면, 장차 지하에 돌아가 무슨 면목으로 아버님을 뵈오리까?”
노희공은 계우의 말에 감동하여 그의 말대로 경보와 숙아의 후사를 세웠다. 공자 경보의 아들, 공손(公孫) 오(敖)로써 경보의 뒤를 잇게 하고 성을 맹손씨(孟孫氏)로 고쳐 성읍(成邑 혹은 郕邑)의 녹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공손(公孫) 자(玆)로써 공자 숙아의 뒤를 이어 성을 숙손씨(叔孫氏)로 고쳐 후읍(郈邑)의 녹을 받게 했다. 그리고 계우는 비읍(鄪邑 혹은 費邑)의 녹을 받는 동시에 문양 (汶陽, 원양, Wen-yang)【비읍과 독립된 또 하나의 읍이라는 설과, 읍이 아니고 문수(汶水)의 북녘 땅이라는 설이 있다】의 전답을 더 받고 성을 계손씨(季孫氏)로 고쳤다. 그리고 계 우는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희공 원년의 일이다. 그 후로 계(季)ㆍ맹(孟)ㆍ숙(叔) 세 집이 정(鼎)의 세 발처럼 노나라의 정권을 잡았다. 그들 세 가문을 세상에서 삼가(三家) 또는 삼환(三桓)이라 불렀다.
이것이 공자가 태어나기 약 백 년 전의 노나라 상황이다. 희공 이후 노국의 역사는 문공(文公)ㆍ선공(宣公)ㆍ성공(成公)ㆍ양공(襄公)으로 이어진다. 이후의 상속은 비교적 평온하게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삼한(三桓)의 대두로 공가(公家)가 이미 실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 본장에서 등장하는 맹의자(孟懿子)는 공자시대의 노나라의 맹손씨(孟孫氏) 대부가문의 수장격의 인물인데, 공자(孔子)가 50대에 대사구(大司寇)로서 노나라 정치의 중책을 맡고 있었을 때, 같은 동료의 대신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공자의 삶에서 직접 관계되는 맹손씨(孟孫氏)의 족장계보는 3대(代)에 걸치고 있다.
조(祖) | 맹희자(孟僖子) / 중손확(仲孫玃) *맹이자(孟釐子)라고도 쓴다 |
부(父) | 맹의자(孟懿子) / 중손하기(仲孫何忌) |
자(子) | 맹무백(孟武伯) /중손체(仲孫彘) |
손(孫) | 맹경자(孟敬子) /중손첩(仲孫捷) |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앞서 서막에서 인용했듯이, 그 조(祖) 맹희자(孟僖子)【맹이자(孟釐子)라는 시호도 통용된다】가 병들어 죽기 전에 두 아들, 맹의자(孟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에게 유언을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맹희자(孟僖子)는 공자를 ‘성인지후(聖人之後)’라 규정하고, 공자가 17세의 소년이지만 예(禮)의 달자(達者)임을 들어, 자기가 세상을 뜬 후에는 반드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吾卽沒, 若必師之.
그 후 맹희자(孟僖子)가 죽자, 맹의자(孟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은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가 주(周)나라 수도 낙양(洛陽)에 유학을 가서 노자(老子)를 만나 예를 물은 사건도, 맹의자의 동생인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수레 하나, 말 두 필, 시자 한 명을 대어줄 것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공자의 주나라 유학의 비용을 대고 제자로서 동반한 사람이 바로 맹희자의 아들이며 맹의자의 동생인 남궁경숙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주희설에 의하면 남궁경숙은 맹의자의 형. 5-1】.
그런데 이러한 사마천의 「세가」 기록은 『춘추좌씨전』 등의 기록과 연대적으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어떤 양식적ㆍ설화적 기술일 뿐,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맹의자ㆍ남궁경숙 두 형제는 노나라에서 권문의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공자라는 탁월한 인물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의 입장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어떤 양식적 사실이다.
어기지 말라
다산(茶山)은 이러한 양식적 사실에 기초하여, 이 장의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즉 여기서 ‘무위(無違)’라고 한 공자의 말의 내면에는, 아버지 맹희자가 아들 맹의자에게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우라고 한 유훈을 어기고 실행치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의 논조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장의 논리의 맥락을 그러한 「세가」의 양식적 기술의 인과적 연속성 속에서 규정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산의 반박적 논조를 취하지 않는다.
공자의 맹손가(孟孫家)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우선 공자가 삼환(三桓) 가문 중에서 이 맹손씨 가문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앞서 우리는 서막에서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핍양성(偪陽城)의 북문(北門)을 공격할 때 갑문(閘門)을 위로 치켜올린 무용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때 숙량흘은 진근보(秦堇父), 적사미(狄虒彌) 두 장수와 함께 맹헌자의 막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맹헌자(孟獻子)는 맹희자(孟僖子)보다 삼대(三代) 위의 당주(當主)였던 것이다【맹경보(孟慶父)를 제1대로 보면, 제5대가 맹헌자(孟獻子)요, 제8대가 맹희자요, 본장의 주인공인 맹의자는 제9대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공자의 아버지대부터 이미 공씨들은 맹손씨(孟孫氏)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맹희자가 죽으면서 그 아들 맹의자와 남궁경숙으로 하여금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유시를 내렸다는 사건도 공자와 맹자와의 어떤 밀착된 관계를 시사하는 양식적 기술일 수가 있다. 맹자와 남궁경숙이 실제로 공자의 문하생으로 공자교단에 입문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삼환(三桓) 중에서 맹손씨(孟孫氏)는 세력이 가장 약했다. 그리고 계손씨(季孫氏)의 막하에는 양호(陽虎)라는 막강한 인물이 있었다. 그렇다면 맹손씨(孟孫氏)도 양호(陽)에 필적하는 어떤 인물을 자기의 총참모장으로 거느리고 싶어했을 것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공자와 맹의자(孟懿子)는 결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결탁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양식적 설화가, 맹의자가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는 역사적 기술로 둔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기술은 결코 역사적 사실일 수가 없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맹의자의 이름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맹의자야말로 공자의 삼환(三桓) 무장해제의 개혁에 가장 강렬하게 반발한 수구세력이었고, 결국 공자는 맹의자 때문에 실각하여 14년 유랑의 길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논어』 전체를 통틀어서도, 공자와 맹자와의 관계는 단지 이 장에서 맹의자가 공자에게 효(孝)를 물었다고 하는 단 한 번의 기술에 그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심각한 관계도 시사되어 있질 않다. 이것은 공자와 맹손(孫)씨와의 관계가 매우 오묘한 애증의 복합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의 교단은 맹손씨들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유지되어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맹자』 등의 기술로 시사되어 있다고 한다면, 공자와 맹손씨와의 관계는 역시 삼환(三桓) 중에서는 가장 밀접한 관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자의 적통임을 자처하는 맹자(孟子)도 이 맹손씨(孟孫氏)의 혈통에서 배출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본 장에서 맹의자가 공자에게 효(孝)를 물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번지가 수레를 몰았다’고 하는 기술로 미루어 볼 때, 맹의자가 제자로서 공자를 찾아와서 물은 사건이 아니다. 공자가 맹의자라는 권력자에게 불려가서 그곳에서 질문을 받았다고 하는 상황이 더 적확한 기술이 될 것이다. 공자로서는 결코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우 퉁명스럽게 ‘무위(無違)’라는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무위(無違)’는 문자 그대로 ‘어김이 없다’, ‘거슬림이 없다’는 뜻이다. 양백준(楊伯峻)은 무위(無違)의 ‘위(違)’ 자체가 ‘배례(背禮)’의 의미를 함장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위례(違禮)’의 축약형태일 뿐이라고 고증하고 있으나, 그렇게 처음부터 문의(文義)를 규정짓고 들어가는 것은 별 재미가 없다. 왕충(王充)은 『논형(論衡)』 「문공(問孔)」(공자에게 묻는다) 편에서 ‘무위(毋違)’라고 공자가 말한 뜻은 본시 ‘예를 어기지 말라[毋違者禮也]’는 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다만 ‘어기지 말라’고만 말하고 ‘예를 어기지 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孔子言毋違, 不言違禮], 의도적으로 맹의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공자의 애매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의자는 그것을 ‘예를 어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길이 없었고, 다만 상식적으로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양씨(楊氏)는 이러한 왕충의 논의에 기초하여 『좌전』 등의 용례를 들어 ‘무위(無違)’는 처음부터 예절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키에 왕충의 공자비판은 맥락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문공(問孔)」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냥 말 트집을 잡기 위한 비판일 뿐이며 어떤 날카로운 논리적 지적이 결여되어 있다. 전후 맥락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이입이 없는 공허한 언어들의 남발인 것이다. ‘무위(無違)’를 단순히 ‘무위례(無違禮)’의 불친절한 축약형태로 간주한다면, 공자와 번지의 대화는 단순히 맹의자와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축약 형태를 다시 반복하여 상술한 것에 불과하게 되고, 그렇다면 이 장의 대화는 두 장면사이에 전혀 텐션이 배제되어버리고 다이내미즘이 상실된다. 후자(공자-번지)는 전자(맹의자-공자)의 단순한 부연설명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공자가 맹의자(孟懿子)에게 ‘무위(無違)’라 말한 것을, 후에 다시 그것을 번지에게 거론하여 부연설명한 것은, 번지가 맹의자와 가까운 사이고 해서 맹의자가 나중에 번지에게 공자가 말한 것을 재차 물을 것에 대비하였다고 해설한다[樊遲與孟孫親狎, 必問之也]. 또는 맹의자에게 공자가 ‘무위(無違)’라고 퉁명스럽게 말할 당시, 번지가 공자 곁에 있었기 때문에 공자는 필히 맹의자가 그 말을 못 알아들어 나중에 제자인 번지에게 그 뜻을 다시 물으리라고 전제하고, 귀가길에 수레 모는 번지에게 그 내용을 재차 일러둔 것이라고 해설한다[孟孫問時, 樊遲在側. 孔子知孟孫不曉, 後必問樊遲, 故後遲御時, 而告遲也. 「侃疏」]. 과연 그랬을까? 물론 상상은 자유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휴먼 드라마의 복선들이 얽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복선들의 맥락을 우리는 다 밝혀낼 수는 없다. 나의 입장은 매우 상식적이고 소박한 것이다. 나는 공자가 맹의자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하나 던져놓고 그것이 마음에 걸려 그것으로 인해 생길 오해나 후환이 두려워 제자 번지에게 그 정답을 각인시켜놓는 그러한 사소한 심려의 인간으로서 공자의 상을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위(無違)’는 일차적으로 ‘거슬림이 없다’, ‘어김이 없다’, ‘위배함이 없다’는 뜻이 분명하다. 효(孝)에 대한 물음에 이러한 대답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는 것’, ‘부모의 심지에 거슬림이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다. 공자가 맹의자와의 관계에서 왜 이러한 말을 던졌는지 그 구체적 맥락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대답은 결코 긍정적인 맥락에서 던져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맹의자(孟懿子)가 그의 부친 맹희자의 유훈이나 권고를 충분히 따르고 있지 않은 데 대한 경고일 수도 있고, 맹 의자의 인품 됨됨이 이러한 단순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논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공자의 대답은 간결했고, 무맥락적이었다. 그렇게 간결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맹의자의 처소를 떠났다. 그리고 번지가 모는 수레에 몸을 실었다. 옛날에도 전차용 수레와 승객용 수레는 확연한 구분이 있다. 전차용 수레는 뚜껑이 없다. 그리고 마부의 자리와 전사의 자리가 한 곳에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승객용 수레는 마부의 자리와 승객의 자리가 확연한 구분이 있으며, 승객의 자리는 밀실처럼 의자가 있는 방으로 되어 있으며 마부[御者]와는 작은 미닫이 창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공자는 덜커덩 덜커덩 맹손씨(孟孫氏)의 성읍에서 곡부 읍내로 돌아오는 길에 뒷자리에 홀로 외롭게 앉아 사색에 잠기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회상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너무 맹의 자에게 각박하게 말을 내뱉었는가? 나의 퉁명스러운 그 한마디를 맹의자가 이해했을까? 이해했을 리가 없지 ……’ 그리곤 창문을 열고 말을 몰고 있는 번지에게 말을 건네었을 것이다.
“야! 번지야. 오늘 맹손씨가 말이다. 나에게 효가 무어냐고 물었느니라. 그런 데 말이다. 내가 그냥 ‘거슬림이 없는 것이다’라고만 내뱉고 말았느니라.”
무언가 께림직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공자의 어조를 번지는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번지는 묻는다.
“거슬림이 없다니 그 말은 도대체 뭘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번지라는 인물
여기 등장하는 번지(樊遲)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번지가 공자보다 36세 나이가 어린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46세 연하로 기술되어 있다. 앞서 얘기했지만 대체로 사마천의 기록보다 왕숙의 기록이 공씨가문(孔氏家門)에 내려오는 제자원적(弟子元籍)의 원양(原樣)에 가깝다. 「열전」의 ‘삼십육세(三十六歲)’라는 것은 고자(古 字)인 ‘사십육’을 잘못 베낀 것으로 사료된다. 옛 글자는 오늘의 자체(字體)와 달라 삼(三)과 사(四)가 작대기 수의 차이에 불과하다. 사가 삼으로 쉽게 오독될 수 있다. 『좌전』 애공 11년 기사로 미루어 볼 때도 36 연하라는 상황은 부적절하다. 잘못 베낀 것이다. 그리고 『공자가어』의 「72제자해」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만 되어 있다.
번수는 노나라 사람이며 그의 자는 자지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며, 약관의 나이에 계씨에게 벼슬하였다.
樊須, 魯人, 字子遲. 少孔子四十六歲. 弱仕于季氏.
그런데 사마천은 이러한 간략한 정보에 만족하지 않고 『논어』에 나오는 번지 이야기를 장황하게 편집하여 늘어놓았다. 사마천은 편집의 귀재였다. 그러나 번지에 관한 한,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은 별로 신빙성 있는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
『춘추좌씨전』 애공(哀公) 11년 봄의 기사에는, 제나라가 ‘식(鄎) 땅에 있었던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노나라를 쳐들어 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노나라는 계손씨(季孫氏)가 주동이 되어 필사적으로 제나라와 교(郊)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때 염구(冉求)가 좌사(左師)의 장수가 되고 그 막하에서 번지(樊遲)가 우(右)를 맡아 출전한다. 그때 계손씨(季孫氏)가 번지가 너무 어리지 않냐[須也弱]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염구(염유)는 걔는 어려도 일단 싸움판에 나가면 명령하는 대로 다 해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就用命焉]고 대답한다. 이 장면의 대화로 우리는 번지의 나이가 「72제자해」의 기록과 보다 부합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번지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제자다. 그러니까 번지는 공자의 말년의 매우 어린 제자이며, 이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공자 나이 70세 전후로 잡는다면【이때도 맹의자는 맹손가의 당주(當主)였다】 번지의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였다. 번지라는 캐릭터는 『논어』에서 비교적 그 이미지가 명료하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번지는 노나라 사람이니까, 공자말년 교단에서도 친근한 지역의 토백이출신이다. 그리고 그는 신체적으로 단련된 사람이었으며 빠릿빠릿했고 특히 말 모는 재주가 비상했다. 그러니까 요새말로 하면 ‘탁월한 드라이버(an excellent driver)’였다. 번지는 염구의 똘만이로서 일찍이 계씨문하에서 얼씬거렸다. 번지는 염구의 배려로서 공자의 쇼퍼 격으로 취직한 젊고 힘센 아이였다. 번지와 같은 인물의 특징은 매우 명료하다. 신체적으로는 단련되어 있고 성실하지만, 성격이 매우 단순하며 아둔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좀 골이 빈 순진한 청년이었다. 공자는 번지를 대단하게 여긴 적이 없다. 그러나 번지를 귀엽게 생각했고 항상 쇼퍼로서 측근에 두었다. 자가용 운전수의 장점은 신분은 비록 크게 차이지지만 고귀한 사람을 항상 가까이서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할 때에는 말벗이 된다는 것이다. 번지는 말년공자의 ‘우발적인 말벗’이라는 이미지를 『논어』 속에서 지니고 있다. 그런데 번지같이 순진한 골빈당의 특징은 말이 항상 핀트가 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핀트가 틀려있다는 것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엄청난 이야기들을 전후맥락 없이 던진다는 것이다. 즉 배움의 단계를 권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을 때, 공자는 그 질문의 전후맥락을 따져서 자상하게 답해주질 않았다. 그렇게 답해주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지(知)가 무엇입니까?” “인(仁)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지나가는 천문학자에게 갑자기 “우주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물론 천문학자가 우주의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런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선(禪) 문답 외에 무슨 얘기가 가능할 것인가?
공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들었을 때, 순진한 번지는 고통에 빠진다. 그리고 공자의 대답을 주변 동료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이 크게 깨닫고 기뻐 날뛰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아둔한 모습을 개탄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는 더욱 더 스트레스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오! 가련한 번지!
그래서 번지는 공자에게 배우고 깨우치기는 틀렸다 생각하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또 다시, 바보스럽게도, 공자에게 농사짓는 법을 묻는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질문에 공자는 대답한다: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吾不如老農].” 도무지 핀트가 틀린 것이다. 공자가 평생 쌓아온 배움의 길이, 겨우 이제 와서 농사법이나 가르쳐주는 일이란 말인가? 이제 와서 치세의 대본(大本)을 버리고 가색(稼穡)의 말엽(末葉)이나 가르쳐달란 말인가? “수(須)야! 너는 정말로 소인이로구나[小人哉, 樊須也]!”【「자로(子路)」 4】 오! 가련한 번지!
사실 이 장의 대화에서, 번지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질의자로서의 역할 이상을 맡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공자가 맹의자와의 대화의 장면을 수레 속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황간이 소(疏)한 것처럼 공자가 맹의자를 만날 당시 번지가 공자 곁에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번지는 사실 공자와 맹자의 대화에 있어서는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
번지에게 전한 효의 본질
“거슬림이 없다니 그 말은 도대체 뭘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여기서 퍼뜩 공자의 침잠된 사유를 스치는 번개와도 같은 깨달음이 공자를 엄습한다. 분명 맹의자는 효(孝)에 대한 나의 ‘무위(無違)’란 대답을 상투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부모님께 순종하라! 부모님의 심지를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말아라! 부모님의 유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말아라! 여기 ‘무위(無違)’의 인간관계는 수직적이며 일방적이다.
부(父) | ||
무위↓(無違) | ||
자(子) |
공자는 자기의 이러한 언급이 자기의 인(仁)의 사상과는 다른 억압구조로서 오해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과연 부모에게의 거슬림이 없는 무조건의 복종이 효(孝)란 말인가? 효는 수직관계의 단순한 복종으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무위(無違)’라는 자신의 발설을 새롭게 재정의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도둑놈이래서 자식에게 도 둑질하라고 가르친다면 그 도둑질함에 ‘무위(無違)’하는 것이 효(孝)란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무위(無違)란 무엇인가? 무위(無違)란 절대적인 복종이나 무조건적인 따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無違)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님 이 살아계실 때 예(禮)로써 섬기며, 돌아가시면 예(禮)로써 장제(葬祭)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일관되게 예(禮)로써 섬기는 것을 무위(無違)라고 재정의한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이 윤리에 어긋날 때, 우리는 얼마든지 불복종할 수 있다. 그러나 불복종에는 하나의 단서가 있다. 불복종조차도 예(禮)로써 해야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이 꼭 ‘무례(無禮)’함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요즈음의 젊은이들이 크게 혼동하는 문제였고, 공자 당시의 사람들의 오해였다. 생(生)과 사(死)를 일관하는 것은 오직 예(禮)이다. 그 예(禮)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무위(無違)’의 본뜻이라고 공자는 갈파한 것이다. 이것은 번지에게 공자가 자신의 새로운 깨달음을 전한 것이다. 그것은 번지를 통하여 맹의자에게 다시 전하려 함이 아니요, 바로 번지를 통하여 수천여 년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전한 것이다. 효(孝)의 본질은 복종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예(禮)로써 섬김에 있는 것이다.
여기 공자의 독백 중에 ‘맹손문효어아(孟孫問孝於我), 아대왈(我對曰)’에서 ‘아(我)’는 일차적으로 동사의 목적이나 전치사의 목적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주어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문장이 아(我)로 끝났기 때문에, 그것을 오(吾)로 바꾸어 받지 않고 그냥 아(我)로 연결하였다. 주어로서 공자시대에 아(我)와 오(吾)가 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맹의자(孟懿子)’는 노나라 대부 중손씨(仲孫氏)이다. 이름이 하기(何忌)이다. ‘무위(無違)’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孟懿子, 魯大夫仲孫氏, 名何忌. 無違, 謂不背於理.
번지는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이 수(須)이다. ‘어(御)’라는 것은 공자를 위하여 수레를 몬다는 뜻이다. ‘맹손(孟孫)’은 곧 ‘중손(仲孫)’이다. 부자께서는 맹의자가 그 뜻을 깨우치지 못하고 더 질문도 하지 못하였으니, 본지를 잃어버리고 부모의 명령만 따르는 것을 효로 여길까 두려워, 번지에게 다시 말씀하여 그 본지를 밝히신 것이다. 살아있을 때 섬기고 돌아가셨을 때 장사 지내고, 또 제사 지내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처음과 끝이 모두 구비된 것이다. ‘예(禮)’라는 것은 리(理)의 절도있는 질서이다. 사람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예로써 하고 구차히 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존경하는 자세는 지극한 것이다. 공자 당시에는 삼가(三家)가 예를 참월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써 경계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혼연하여 또한 오로지 삼가를 위하여서만 말씀하신 것 같지 아니 하니, 이 때문에 오히려 공자의 말씀은 성인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樊遲, 孔子弟子, 名須. 御, 爲孔子御車也. 孟孫, 卽仲孫也. 夫子以懿子未達而不能問, 恐其失指, 而以從親之令爲孝, 故語樊遲以發之. 生事葬祭, 事親之始終具矣. 禮, 卽理之節文也. 人之事親, 自始至終, 一於禮而不苟, 其尊親也至矣. 是時三家僭禮, 故夫子以是警之. 然語意渾然, 又若不專爲三家發者, 所以爲聖人之言也.
○ 호인(胡寅, 1098~1156)이 말하였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함에, 그 마음만은 비록 끝이 없으나 그 분수는 한계가 있으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데도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불효에 속하는 것이다. 이른바 예로써 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에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인 것이다.”
○ 胡氏曰: “人之欲孝其親, 心雖無窮, 而分則有限. 得爲而不爲, 與不得爲而爲之, 均於不孝. 所謂以禮者, 爲其所得爲者而已矣.”
호인의 말이 절실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동방사회가 효를 중시한 것은 도덕적으로보다는 심미적으로 더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부모님을 분수에 맞게 지극히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는 시절이 되니,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이 마음의 안타까움을 어찌하리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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