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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9. 안연은 바보가 아닌 진정한 학인(學人)이었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9. 안연은 바보가 아닌 진정한 학인(學人)이었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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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안연은 바보가 아닌 진정한 학인(學人)이었다

 

 

2-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회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하였으나, 내 말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아 그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물러가고 나서 그의 사적 생활을 살펴보니 역시 나를 깨우치기에 충분하다.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도다!”
2-9.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안회는 공자의 데미안, 그가 인()하다고 심복(心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수제자 안회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염()논어곳곳에 스미어 있다. 그 안회에 대한 공자의 최초의 탄성이 바로 여기 이 구절이다.

 

안회(顔回)는 성()이 안()씨요, ()이 회(). ()는 자연(子淵), 그래서 안연(顔淵)이라고도 부른다. 공자와 동향의 노나라 사람으로 어머니 안씨녀(顔氏女)와 같은 일족의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서막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와 같다. ‘()’이라는 성은 아마도 무녀의 얼굴화장 또는 시신의 얼굴분장(cosmetics)과 관련된 직업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OA 273). 안회에 대해서는 나는 함 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논어의 구절을 통하여 그 인품을 독자들이 스스로 간파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나는 안회의 나이를 열전의 기록대로 30세 연 하로 본다.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1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안회의 나이 스물아홉이 되어 이미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31세로 요절하였다. 공자는 말하였다: “내가 회를 얻게 된 후로는 제자들과 날로 친밀해졌다.”

年二十九而髮白, 三十一早死. 孔子曰: “自吾有回, 門人日益親.”

 

 

나는 본 장을 심히 좋아한다. 공자의 인간미, 제자를 사랑할 줄 아는 스승의 정도가 충분히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 ()’는 분명 공()과 대비되는 말이다. 공자의 학단 내에서 공()이란 제자가 스승 공자를 만나는 시간을 말한다. ()란 제자가 물러나 문인(門人) 자기들끼리 대화하고 토의하며 노는 시간을 말한다. 다산(茶山)이 인용하는 순왈(純曰)’()은 에도 중기 코분지가쿠하(古文辭學派)의 거장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1680~1747)의 이름이다. 자는 덕부(德夫). 소라이의 직전제자로서 그 학풍을 계승하였다의 내용이 이에 합치한다.

 

 

사라는 것은 공과 대비되는 것이다. 공문 제자들이 공자에게 나아가 배우는 것을 공()이라 하고, 그 외로 붕우들끼리 서로 더불어 하는 것을 사()라 하는 것이다.

私者, 公之對. 孔門弟子, 以進見孔子爲公. 其他朋友相與謂之私.

 

 

그러니까 공자와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세미나를 할 때에는 안회는 일체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가 하는 말들에 도무지 거역하는 안색이 조금도 없고, 모든 것을 따르기만 하는 듯이 보였다. 그것을 불위(不違)’라 표현했다. 공자는 이러한 안회의 태도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복종적이기만 한 제 자의 태도를 좋게만 생각지 아니 하는 공자의 태도야말로 공자의 깨인 인품을 잘 드러내준다. 그래서 공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안회! 이 녀석 바보자식이구먼! 안회는 소리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그가 제자인 친구들과 담소하고 삶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살펴보게 되었다. 제자들끼리 자체로 하는 세미나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 역족이발(亦足以發)’의 발()을 고주는 발명대체(發明大體)’라 했고, 신주는 위발명소언지리(謂發明所言之理)’라 했다. ‘발명(發明)’이란 요즈음의 함의 대로 발명한다(to invent)’는 뜻이 아니다. ‘발명(發明)’이란 촉발하여 밝힌다는 뜻으로 ‘to elucidate’ 정도의 뜻이다. 고주는 공자의 도의 대체를 발명한다고 했고, 신주는 공자가 공()적 세미나에서 한 말의 핵심을 안회가 사()적 세미나에서 주변의 제자들에게 정확히 발명하고 있더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나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공자 자신의 말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 공자의 안회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 공자와 안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감의 어떤 상태를 기술하는 말인 것이다. 즉 나와 말할 때는 그가 묵묵히 따르기만 해서 바보스럽게 느꼈는데, 그가 사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오히려 역으로 나를 깨우치고 계발[]시키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공자는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제자의 실천을 통해 역으로 촉발 받고 계발 받고 그것의 참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의 언행을 관찰하여 제자에게서 배울 줄 아는 열린 마음을 지닌 공자의 인간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숙연한 스승의 상을 발견하게 된다. 유교의 본질이 이러한 개방성(Openness)에 있다고 하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사복음서보다 먼저 성립한 원시기독교의 경전인 도마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상에는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예수는 결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오직 인간 개개인의 스스로의 발견과 깨달음에 촉발적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상은 요한복음에 오면 철저히 로고스기독론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각색된다. 영지주의의 건강한 상식적 평등성이 초월적 수직성으로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공자와 안회 사이에는 일체 신화적 수직관계가 없다. 공자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의 아들처럼 떠받들어지는 스승으로서의 이미지도 공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안회에게 끊임없이 계발과 감동을 주는 존경스러운 스승으로서의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안회는 공자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 앞에서 말을 삼가며 묵묵히 공자의 사상에 따라 실천하고 살 뿐이다.

 

안회가 공자라는 스승에게 그토록 철저히 순종한 것을 우리는 단순히 안회의 충직한 인품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안희 자신의 내면의 삶의 자세와 사상에는 소위 우리가 후대에 도가라고 규정하게 된 무위론(無爲論)적 측면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슬기롭다, 안회여! 한 바구니의 밥과 한 바가지의 냉수로 보잘것없는 식사를 하며 누추한 뒷골목에서 아랑곳없이 산다. 사람들은 그 누추함과 삶의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오히려 그러한 삶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누추함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줄 안다. 슬기롭도다! 안회여!” (옹야9).

 

유위를 거부하는 무위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안회가 즐거움을 발견했던 그러한 일상적 삶의 모습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은 삶의 소박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부귀와 영화의 초월은 결국 가치적 하이어라키(hierarchy, 위계질서)의 초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초월까지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한 안회의 철학 속에서는 공자라는 스승의 말씀을 따르고 거역하고 지지고 하는 세속적 판단 그 자체가 초월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안회는 공자의 인()의 사상을 그러한 무위자 연(無爲自然) 심도에서 이해한 성스러운 인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안회의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은 결국 선종(禪宗)의 바리공양의 소박함으로까지 내려온다. 그런데 또 이러한 선종의 의발(衣鉢) 전수가 신유학의 도통론(道統論)으로 둔갑되는 아이러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서글프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예수도 철저한 무소유를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샌달 없이는 다니기 어려운 갈릴리의 척박한 대지 위를 그냥 맨발로 다니라 했고, 뱀이 많아 지팡이가 필요한데도 지팡이조차 들지 말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배낭이나, 여벌의 속옷조차 몸에 지니지 못하게 했다(10:9~10, 9:3; 10:4). 무소유의 실천이 없이는 진정한 나눔이 불가능하고, 진정한 나눔이 없을 때는 천국은 도래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무소유사상은 기독교에서 사라지고 그것은 법정 스님의 수필 속에서나 만나는 한가로운 이야기처럼 왜곡되어 버렸다. 그리고 예수의 무소유사상은 철저히 현세의 축복으로 오석(誤釋)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현세의 축복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안회의 일단사, 일표음을 실천할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인간의 축복은 오로지 하늘나라(이상세계)에서 있을 뿐이라고 선포했던 것이다. 선종의 의발전수가 주자학의 도통론으로 둔갑되어 조선조의 숱한 선남선녀를 죽였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론이 세속의 축복으로 둔갑되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세적ㆍ물욕적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나는 묻는다. 연약한 자! 인간이여. 너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공자는 말한다.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회야불우(回也不愚)!

 

 

()’는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안()이고 자가 자연()이다. ‘불위(不違)’라고 하는 것은 그 알아듣는 의취가 서로 어긋남이 없어 들어 접수기만 하고 질문이나 힐난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안회가 한가히 홀로 거처하여 나아가 뵙고 청문치 아니 할 그러한 때를 일컫는 것이다. ‘()’은 말한 바의 이 치를 계발받아 깨우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 孔子弟子, 姓顔. 字子淵. 不違者, 意不相背, 有聽受而無問難也. , 謂燕居獨處, 非進見請問之時. , 謂發明所言之理.

 

나 주희가 나의 선생님께 일찍이 다음과 같이 들은 적이 있다: “안자(顔子)는 깊게 침잠하고 흠이 없이 순결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성인이 될 수 있는 몸의 조건을 이미 구비한 자였다. 부자의 말씀을 들으면 묵묵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융섭하여 닿는 곳마다 막힘이 없이 환하게 깨달아 스스로 조리(條理)가 있었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같이 이야기를 해도 다만 어기지 않음을 볼 뿐이어서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가 물러간 뒤에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일상생활의 동ㆍ정(動靜)과 어ㆍ묵(語默) 지간에 부자의 도를 발명키에 충분하였다. 허심탄회하게 공자의 말씀에 말미암아 행동하며 아무런 의혹의 구석이 없었다. 그런 뒤에야 공자는 안회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愚聞之師曰: “顔子深潛純粹, 其於聖人體段已具. 其聞夫子之言, 黙識心融, 觸處洞然, 自有條理. 故終日言, 但見其不違如愚人而已. 及退省其私, 則見其日用動靜語黙之間, 皆足以發明夫子之道, 坦然由之而無疑, 然後知其不愚也.”

 

 

신주는 역족이발(亦足以發)’()’을 안회의 사생활에 있어 공자의 말씀을 발현한다는 뜻으로 푼다.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만, 나는 그 ()’이 공자 자신을 계발시킨다고 해석하였다. 아무래도 모든 후대의 주석은 공자를 신격화하는 어리석은 전제가 있어서, 공자가 제자에게서 계발 받는다는 식의 해석을 금기로 삼는다. 그러나 이 구어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분명 나를 계발시키기에 족하도다!’라는 탄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교학상장(敎學相長)’예기』 「학기(學記)에 있는 말로 유학의 정신을 대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서로를 계발시킨다는 뜻의 리버럴한 정신 이야말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위대한 측면일 것이다.

 

여기 주자가 나의 선생님이라고 인용한 사람은 주자가 24세 때 두 발로 걸어가 배움을 청한 연평(延平)의 사람 이통(李侗, 리통, Li Tong, 1093~1163)을 가리킨다. 이통은 자()가 원중(愿中)이며 남검주(南劍州) (劍浦) 연평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유학문헌에서는 연평선생(延平先生)이라고 호칭된다.

 

이통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던 사상가인 나종언(羅從彦)에게 배웠다. 나종언에게 배울 때 동문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 주송(朱松)이었는데 주송의 아들이 바로 주희이다. 그러니까 주희는 동문 친구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나종언은 또 같은 남검(南劍) 지역에 살고 있었던 양시(楊時)에게 배웠다. 양시야말로 낙양에서 이정선생에게서 배운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민학(閩學)의 창시자였다. 정주의 학문이 양시(楊時)로 인하여 복건성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양시가 복건의 고향으로 갈 때 정호(鄭顥)오도가 남쪽으로 간다[吾道南矣]!”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통(李侗), 이 세 사람이 모두 남검(南劍), 현재 복건성의 한 중앙에 있는 남평시(南平市)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검삼선생(南劍三先生)’이라고 부른다. 나종언까지는 낙양에 올라가 정이에게 직접 배운 경력이 있다. 그러니까 주자는 정문에서 본다면 사전제자(四傳弟子)가 된다二程-楊時-羅從彦-李侗-朱熹.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주자의 학문의 연원은 이통에 있다. 주자는 19세 때 진사에 급제했는데 급제 후에도 그는 불교의 학문에 심취해있었고 불학의 위대한 논리에 흠모의 정을 품고 있었다. 사실 불교의 화려한 논리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에너제틱한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매력적인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통은 어떤 사람인가? 그 또한 24세 때 동군(同郡)에 하락지학(河洛之學)의 적통을 이은 나종언이란 사상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 누년(累年) 동안 그의 가르침을 얻는다. 그에게서 춘추, 중용(中庸), 논어, 맹자의 학을 전수받는다. 그는 종언에게서 정좌라는 실제수양법을 배웠다. 정좌를 통해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희노애락이 미발(未發)한 상태의 ()’에 도달함으로써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통은 종언에게서 몇 년 수학한 후, 이 수양법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하여 산전(山田)에 퇴거(退居)하면서 세상 과의 인연을 사절하고[謝絶世故] 40여년 동안을 일체의 잡념이 없이 공부만 하면서 빈한한 생활을 즐기며 이연자적(怡然自適)하는 삶을 살았다. 일체의 세속적 인연은 끊었지만 배우기 위하여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온화한 얼굴로 문답에 응했다 한다. 주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소감을 직접 회상한 자술(自述)주자어류(朱子語類)104, 38조에 실려있다.

 

 

후에 나는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의 주부로 부임해 갔다. 때는 내 나이 245세쯤 되었을까, 이통 선생을 처음 찾아뵐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불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나의 관심사에 관하여 떠벌였다. 그런데 이 선생은 단지 선()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나는 건방지게도 이 선생이 불학방면으로 이해가 부족하신 분이라 생각하고 재차 삼차 따지며 질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선생은 원래 사람됨이 간결하고 중후한 분이라서 말을 별로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단지 성현의 말씀을 잘 읽어보는 게 좋겠다고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방편적으로 선에 관한 공부는 접어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 심중에서는 불학이란 본시 자유자재로운 것이니만큼 성인의 책을 읽어도 성인의 사상으로 불교를 해석해도 그만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성인의 책을 읽고 또 읽고, 하루 읽고, 또 하루 읽고, 그러는 중에 성현의 언어가 점점 재미가 있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 석씨(釋氏)의 설들을 생각해보니 점점 파탄이 생겨나고 온갖 구멍이 줄줄 새어나게 되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後赴同安任, 時年二十四五矣, 始見李先生. 與他說, 李先生只說不是. 某却倒疑李先生理會此未得, 再三質問. 李先生爲人簡重, 却是不甚會說, 只敎看聖賢言語. 某遂將那禪來權倚閣起. 意中道, 禪亦自在, 且將聖人書來讀. 讀來讀去, 一日復一日, 覺得聖賢言語漸漸有味. 却回豆看釋氏之說, 漸漸破, 漏百出!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주자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대하(大河)의 최초의 시원(始元)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사실 주자는 이통을 만나기 전에는 선()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통을 만나 그의 인품과 그의 훈도를 통하여 불학을 떠나 유학의 본령에 전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연평 선생이 세상과 절연하고 묵좌징심(默坐澄心)’하여 미발지전(未發之前)’으로 돌아간다 하는 태도에는 선미()가 없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주자의 제자가 주자에게 묻자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배우는 자들은 이연평 선생의 삶의 태도를 불교적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나도 어려 뭘 몰랐을 때는 역시 선()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오직 이 선생님께서 선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극언하셨기 때문에 내가 정신차리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유교경전을 자세히 탐구하면서 유교의 맛이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교의 맛이 일촌이 길어지게 되면 불교의 맛이 일촌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불교의 맛은 다 쫄아들어 남김없이 소진되어 버렸다. 필경 불학에는 옳다고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先生云: “學者不須如此. 某少時未有知, 亦曾學禪, 只李先生極言不是. 後來考究, 却是邊味長. 才道邊長得一寸, 那邊便縮了一寸, 倒今鎖鑠無餘矣. 畢竟佛學無是處.” (어류104, 39).

 

 

주자는 이통 선생을 만난 후에 비로소 학문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及見李先生後, 方知得是恁地下工夫]. 주자행장이나 연보에 의하면 그는 24세 여름에 이통을 처음 만났고 그 뒤로도 계속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그리고 34세 때(1163) 이통 선생은 세상을 뜬다. 그러니까 주자는 24세로부터 34세까지 10년간 이통의 열렬한 제자였다. 이통은 죽기 몇 달 전에도 무이(武夷)에 있는 주희를 두 번이나 찾아왔다. 이통은 정주학의 실천에만 힘을 썼고 새로운 학설을 세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체 저술이나 문장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주희는 그와 문답한 내용을 편찬하여 연평답문(延平答問)을 지었다. 우리는 오직 주자어류속에 있는 연평에 대한 언급과 연평답문(延平答問)을 통하여 이통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통은 책을 안 쓰는 사람다웁게 말을 싫어하고 사색을 중시하며, 진리는 오직 가슴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한 가지 사태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붙들고 오래오래 그 이치를 궁구하다보면 그것이 가슴에 쌓여 어느 날에는 확연히 씻은 듯 통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도저히 문자로써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그는 불교와 유학의 차이도 리일(理一)’분수(分殊)’의 문제의식으로 접근한다. 불교는 리일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총체적 진리를 깨우치는 데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학의 본령은 리일(理一)’보다는 분지수(分之殊)’, 즉 개별적 사태의 다양하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즉 본체론적 깨달음보다는 현상론적 구체성과 다양성 속에서의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거에 깨우치는 공허한 선을 버리고 일용지간에서 착실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좌(靜坐)하여 희노애락이 발현되기 이전에 중()의 상태에 도달하여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것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았다. 모든 윤리도덕의 근원인 천리는 인심(人心)에 내재하는 것이므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힘으로써 그것을 체인(體認)할 수 있다. 그는 맹자가 말하는 존야기(存夜氣)’양기지법(養氣之法)’을 제창하여 궁리진성(窮理盡性)’에 도달하려 하였다. 천하에 세 근본이 있다. ‘부생지(父生之), 사교지(師敎之)’ 이 중에 하나라도 결하면 근본이 서질 않는다. 그가 살았던 당세(當世)는 이 삼강(三綱)이 부진(不振)하고 의리(義利)가 불분(不分)하여 리()만 쫓고 의()를 저버리는 소인배만 등용되어 상하에 간격이 생겨 군주가 날로 고립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사태와 별 차이가 없다.

 

하여튼 20대의 청년 주희의 모습을 우리는 이통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주자학이 형성되어 가는 계기도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 주희가 젊은 날의 기억을 더듬어 이 논어의 구절에 관하여 나의 선생님 이통은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하고 그 말씀의 내용을 담박하게 기술하는 태도가 참으로 아름답다 할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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