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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3. 말을 곱게 하고 얼굴색을 예쁘게 하는 게 나쁘다고?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3. 말을 곱게 하고 얼굴색을 예쁘게 하는 게 나쁘다고?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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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말을 곱게 하고 얼굴색을 예쁘게 하는 게 나쁘다고?

 

 

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 잘하고 표정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
1-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유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문이 양화(陽貨)17에 중출(重出)하고 또 공야장(公冶長)24에도 나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Q라는 자료가 공유되었던 것처럼, 어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조형적 파편이 있고, 그 조형적 파편이 학이(學而)편 기자에게, 양화편 기자에게 공야장(公冶長)편 기자에게 각각 공유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논어의 편집과정에서는 이러한 발상은 별로 적합한 것 같지가 않다. 각 복음서는 한 사람의 작가가 실히 존재하며 그 작가가 예수의 생애를 자기나름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확고히 재구성한 드라마이다. 따라서 성문화된 원초자료의 공유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논어의 각 편은 드라마도 아니며, 공자 말씀의 Q자료적 꼴라쥬일 뿐이며, 또 한 사람의 작가나 편집자를 확고하게 상정하기가 곤란하다.

 

논어에 있어서, 이러한 공통자료의 출현은 성문화된 자료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송(傳誦)과정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이 정당할 것 같다. 공자가 말년에 노 나라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45년 동안 하도 이런 얘기를 자주 많이 했기 때문에 여러 제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그것을 쉽게 다양하게 전송했다는 뜻이다. 편집과정에서 전송자들이 자주 생각해낼 수 밖에 없었던 테마였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 교언영색은 공자가 싫어한 것이었다.

 

()을 설명하는데 본()이니 도(), ()니 제(), ()니 용()이니 하는 개념적 장치를 공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공자의 로기온의 특징은 비개념적이며, 상황적이라는 데 그 파워가 있다. 후대 제자들의 말은 씹으면 씹을 수록 입안이 텁텁해지고 기분이 나뻐지는데, 공자의 말은 씹으면 씹을수록 입 안에 군침이 계속 솟아나고 생기가 돈다. 앞의 편해(篇解)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학이(學而)편의 편집자는 인()이라는 공자사상의 핵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교언영색을 선택했다. 2의 텁텁함을 말소시키는 탁월한 선택이라 할 것이다.

 

공자의 교언영색에 대한 혐오는 단순히 일상적인 감정의 발출이 아니다. 그것은 공자의 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인식론적 틀이다. ‘교언(巧言)’이란 문자 그대로는 교묘한 말이다. ‘영색(令色)’이란 문자 그대로 요염한 안색정도의 의미가 된다. ()은 때때로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미’, ‘분위기’, ‘발출되는 표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공자를 유가 즉 유교철학이라고 하는 선입적 편견 속에서 해석하는데 익숙해있다. 공자는 유()일 뿐, 단 한 번도 유교(儒敎)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을 말했고 삶을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자라는 인간의 생각 속에는 유()ㆍ불()ㆍ도()의 모든 면모가 엿보인다. 그에게는 양묵(楊墨)도 맹순(孟荀)한비(韓非)도 다 들어있는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터무니없는 분별심 속에서 공자를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교언영색을 싫어했던 공자

 

교언영색은 분명 ()’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인(鮮矣仁)’이란 표현은 본시 인선의(仁鮮矣)’를 도치시킨 것으로 (, 드물다)’이라는 술어를 강화시킨 것이다. ()은 소()와 성모(聲母)를 같이 하고 있다. 통자(通字)이다. ()은 교언이나 영색으로는 절대 잡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덕목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나 타낸 것이다. 언어적 표현의 교묘함에 대한 깊은 저주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도경의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라 말한 것과 대차가 없다. ()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우주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일상적 삶의 느낌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치고 인한 자가 드물다!

 

교언영색에 대한 공자의 혐오감은 바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외치는 대승불학의 ()’의 정신의 조형적 가치관을 형성한 것이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는 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소피스트를 공자는 기피한다. 이인(里仁)3에서 공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오직 인한 자래야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 무엇을 미워하는가? 그것이 바로 교언영색인 것이다.

 

공야장(公冶長)4에 보면 혹자가 공자의 제자 염옹(冉雍, 르안 용, Ran Yong: 仲弓을 말한다)을 평가하여 그는 ()하되 말재주가 없다[不佞].”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공자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며 상기된 모습으로 외친다: “그 놈이 인()한 지는 내가 알 바 없으되 도대체 말재주라는 것을 어디에다 써먹겠는가[不知其仁, 焉用佞]?” 염이 인하다는 것을 공자는 함부로 허여할 수 없다. 인은 너무도 본질적인 인간의 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속적 평가에 있어서 그가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함[]과 말재주없음[不佞]()’라는 연결사에 의하여 같이 병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인한 자가 말재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인하다고 평가를 하는 동시에 말재주가 없다고 유감을 표명할 수 있단 말가?

 

도대체 말재주(=巧言)’를 어디다 써먹겠다는 거냐! 이 바보 같은 놈들아! 그렇게도 내가 말하는 인의 의미를 못알아 듣느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명저 트락타투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지어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remain silent.

 

 

전통적으로 이 말은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즉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말하게 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배제시키고자 하는 반형이상학적(anti-metaphysical) 명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쓰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것이다. 내가 말하는 우주는 사실의 체계뿐 아니라 가치의 세계를 포괄한다. 상징적 표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신비적 직관의 세계까지를 포섭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세계를 배제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명료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자는 그의 주장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묵살하려 함이 아니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현묘한 세계를 더욱 현묘하게 인식하려는 것이다. 공자가 교언영색을 혐오한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계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교언영색의 혐오는 공자의 사상의 가장 근원적인 기저를 형성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그럴듯하다는 뜻이고, ‘()’은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이다. 그 말을 그럴듯하게 하고 그 모양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외모를 치장하는 것을 지극하게 하고, 힘써 타인을 즐겁게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니, 그런즉슨 사람의 욕심이 방자하게 되고, 본심의 덕이 망가지는 것이다. 성인은 말씀하시는 방식이 박절하지 않다. 그냥 곧바로 (드물다)’라고만 해버리면 인한 자가 절대 없다라는 뜻이 되어버릴 것이니, ‘선의인(鮮矣仁)’하고 돌려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교언영색을 깊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교언영색이 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곧 인을 아는 것 이라 말할 수 있다.”

, . , 善也. 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 務以悅人, 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聖人辭不迫切, 專言鮮, 則絶無可知, 學者所當深戒也.

程子曰: “知巧言令色之非仁, 則知仁矣.”

 

 

주자어류20에 관계된 글을 찾아 번역을 보강하였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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