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모는 자식이 병들지나 않을까 근심한다
2-6. 맹무백이 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 2-6.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
맹무백은 누구인가?
맹무백(孟武伯, 멍 우뿨, Meng Wu-bo)은 맹의자(孟懿子)의 아들이다. 무(武)는 시호(諡號)이고, 백(伯)은 맏아들을 뜻하니 맹무백은 용맹스럽고 강강(剛强)한 맹의자의 맏아들일 것이다. 중손(仲孫) 체(彘)이다. 앞서 번지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애공(哀公) 11년(BC 484, 공자 68세) 제나라가, 노나라가 거년(去年)에 식(鄎)【몽음현(蒙陰縣)의 북(北)에 있는 제나라 땅이다】을 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노나라를 침공한 사건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좌사(左師)를 이끈 장수는 염구(冉求)였고, 우사(右師)를 이끈 장수는 맹유자설(孟孺子泄)이라는 이름의 사나이였다. 이때, 맹유자(孟孺子)란 정식 이름이라기보다는, ‘맹손씨네 어린애’라는 정도의 의미로 친근하게 부른 표현에 불과하다. 바로 이 맹손씨네 어린애 설(泄, 시에, Xie) 이 훗날의 맹무백(孟武伯)이다【설(泄)은 그의 자(字)이다】. 어려서부터 무용에 뛰어났다. 3년 후 애공(哀公) 14년 추팔월신축(秋八月辛丑), 그 아버지 맹의자(孟懿子)가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맹손씨(孟孫氏)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이때 공자의 나이 71세였다. 그렇다면 이 장의 대화는 공자의 나이 71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맹무백은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라이벌이며 제자이기도 한 맹의자라는 친구의 어린 아들이다. 이 「위정(爲政)」편은 재미있게도 아버지 맹의자의 효에 대한 질문과, 그 어린 아들 맹무백의 효에 대한 질문을 병치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늙은 동료 맹의자가 죽기 전, 그의 뒤를 이을 전도가 창창한 청년에게 공자가 타이르는 느낌의 말이 여기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6장에서는 5장의 숨은 맥락에 얽혀있는 꼬임 같은 것이 별로 개재될 이유가 없다. 아버지 같은 대철인(大哲人)이 전도가 창창한 아이에게 따사로운 온정과 충심으로 타이르는 내용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부모유기질지우(父母唯其疾之憂)’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매우 애매한 구조를 하고 있어 이 말만으로써는 그 정확한 의미를 규정할 수가 없다. 『논어』의 구문 중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하나의 좋은 예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의 ‘기(其)’라는 지시대명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맥락의 변화가 일어난다. 전체 의미의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왕충의 해석과 다산의 반박
제일 먼저, 한대(漢代)의 왕충(王充, 왕 츠옹, Wang Chong, AD c.27~100)은 이것을, 자식은 부모를 섬길 적에 모든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직 부모님께서 병을 않으실까를 걱정해야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무백이 부모(맹의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걱정을 하므로 오직 부모의 질병만을 걱정하라[武伯善憂父母, 故曰唯其疾之憂]는 맥락으로 해석한 것이다. 왕충(王充)의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아버지 맹의자는 예를 잘 어기는 나쁜 사람이고 아들 맹부백은 부모님 걱정을 잘 하는 어리석은 녀석이라서 공자는 무백에게 부모님 아픈 것만 걱정하라고 타일렀다는 것이다. 왕충은 공자가 보다 본질적으로 맹의자의 위례(違禮)를 깠어야 했다고 비판한다. 계씨는 혹독하게 까면서 맹씨들에게는 매우 온건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좀 구린 데가 있다는 것이다. 왕충(王充)의 문공은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의 맥락 속에서 공자의 언어를 비판하고 있다. 한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정현의 주석을 포함해서 한대의 해석체계가 오히려 단장취의에 그칠 때가 많다. 자식이 부모를 걱정한들, 너무 많이 걱정한다 해서 불효(不孝)가 될 일이 있을까? 오직 부모가 병들 때만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인가? 다산(茶山)의 반박이 너무도 직절(直截)하다.
나는 이를 논박하여 말한다.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놈은 불효자일 뿐이다.
駁曰, 非也. 然則不孝子也.
아마도 이런 류의 해석을 좀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늙으셨고 봉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을 생각할 적에 먼저 빌어야 할 것은 부모님의 건강이다라는 식으로,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전혀 공자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해석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서 ‘기(其)’는 결국 ‘부모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는 왕충(王充)의 졸렬한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진사이(仁齋)는 이러한 왕충 류의 해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부모님께서 이미 연로하셨고 봉양해드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병에 걸리시게 되면 효를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다. 무백에게 고해주신 말씀의 뜻이 절절하다[父母已老, 則侍養之日旣少. 況一旦染病, 則雖欲爲孝, 不可得也. … 告武伯者, 其意切矣].”
고주의 해석
다음으로, 우리는 고주(古注)에 인용된 후한(後漢) 마융(馬融)의 설을 들 수 있다. 전문장의 주체를 자식으로 설정하고, ‘기(其)’는 단지 질병을 강조하는 수식어가 된다. 신체적으로 아픈 것 이외로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효성스러운 자식은 함부로 나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단지 질병이 있고 난 연후에만 부모로 하여금 걱정하시도록 하게 할 뿐이다.
言孝子不妄爲非. 唯有疾病, 然後使父母之憂耳.
즉 효자는 병 이외로는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릴 수 있는 나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不妄爲非]. 그러나 병은 불가항력적인 사태이므로(전염병 등의 사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린다는 것이다.
이 고주의 맹점은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린다’는 사태를 전제로 이 효(孝)에 관한 문장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 끼쳐드릴 일이 태산 같은데 왜 하필 불가항력적으로 걱정 끼쳐드리는 사태만을 꼬집어 말했을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병이라는 것 자체가, 특별한 전염병 같은 사례를 제외하곤 대부분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몸을 잘못 굴려 서 생긴 것이며, 대부분이 잘못된 내 생활의 탓인 것이다. 따라서 병 그 자체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의 책임소관이며, 병 그 자체가 곧 불효다. 옛날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면, 그것 자체를 불효자라 개탄했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당당히 걱정 끼쳐드릴 만한 예외적 사태라 할 수 있으리오?
신주의 해석
제3의 해석으로 우리는 주자의 신주(新注)의 입장을 들 수 있다. 신주는 ‘기(其)’를 부모로 보거나, 추상적 병에 대한 강조로 보지 않고, 곧바로 ‘자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전 문장의 주어를 ‘부모’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해석은, 엄마, 아버지는 오직 자식이 병들 것만을 걱정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이 병만 안 걸렸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애절한 심정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자식 된 맹무백이 효(孝)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장자(長者)로서 그 입장을 바꾸어 부모의 마음을 술(述)한 것이다. 다산의 말대로 이 신 주의 해석이야말로 이 구절의 정답이다.
주자의 새로운 설이야말로 문리에 통하지 않는 바가 없거늘, 후유들이 애써 비방을 가하고 있으니, 참 망령될 뿐이로다. 『논어고금주』
朱子新說, 未嘗不通. 後儒力加非毁, 妄矣.
맹무백은 본시 호용(好勇)의 인간이다. 따라서 자기 몸을 해칠 수 있는 행동을 잘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서 동료 맹의자(孟懿子)의 마음을 대변해주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을 할 당시,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나, 자식과 같은 안회顔回)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자는 그 자신의 실존적 아픔을 토로한 것이다.
자식을 낳아본 이의 절절한 메시지
이러한 문맥을 떠나서도, 이 ‘부모유기질지우(父母唯其疾之憂)’라는 한마디는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슴에 절절히 와닿는 말일 것이다. 보통 때,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이 장미빛이고 행복한 단란함에 젖어든다. 그러나 일단 자식이 아파 보라! 모든 것이 캄캄해지고,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삶의 보람이 없어지고, 자신의 희비(喜悲)는 사라지고 오로지 자식의 병의 치유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야말로 자식이 병만 안 걸려주어도 그 이상의 효도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효(孝)에 관하여 부모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든가 군(君)에 대한 수직적 충성을 말한 적이 없다. 자식에 대한 강요 이전에, 이러한 부모의 자연스러운 애틋한 정감을 들어 자식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주어를 바꾸어 효(孝)를 가르쳐주는 공자의 마음이야말로 전통적 화성을 마음대로 인버젼(inversion)시키는 째즈 아티스트의 여유로움이다. 주자의 집주에:
옛 주석에 사람의 자식된 자는 능히 부모로 하여금 자식이 불의에 빠지는 것을 근심케 하지 말고, 오직 자식의 질병을 근심케 하여야 효가 될 수 있다. 하였으니 이 역시 통한다.
舊說, 人子能使父母, 不以其陷於不義爲憂, 而獨以其疾爲憂, 乃可爲孝, 亦通.
이것은 주자가 마융(馬融)의 주석을 다시 한 번 완곡히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의에 빠진다[함어불의(陷於不義)]’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이 ‘불의(不義)’라는 말의 해석은 세대간에 따라 체험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하는 젊은이를 그 부모는 ‘불의에 빠져있으니’ 불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불의(不義)’의 ‘의(義)’는 가치 술어이며, 이 가치술어는 해석에 따라 자의적인 맥락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함어불의(陷於不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명제가 결코 효(孝)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명제를 떠나 ‘인간이 신체적으로 아프다’고 하는 상황은 참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인 상황이며, 여기에는 가치적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보편적인 정감의 명제인 것이다. 나의 신체를 아프게해서 부모님의 마음까지 아프게 해드리는 상황이 없도록 조심하는 마음, 이것이 곧 효(孝)의 본질이라고 갈파하는 공자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유교의 본질이 이성주의적 도덕의 논리적 강요가 아닌, 인간의 본연적인 정감에의 호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인간됨의 밑바탕을 버리고 무엇을 말하리오! 칸트의 정언명령 이전의 어떤 스스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공자는 묻고 있는 것이다.
무백은 맹의자(孟懿子)의 아들이다. 이름이 체(彘)이다. 이 장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건마는 자식이 아플까 항상 염려하는 그 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자식된 지는 이것을 체득하여, 부모의 마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으면 자기 몸을 지키는 자세가 스스로 삼가지 아니 함을 용납치 않게 될 것이다. 어찌 효가 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구설에 사람의 자식된 자는 부모로 하여금 불의한 데 빠져 걱정을 끼쳐드리는 일이 없이 단지 질병으로만 근심케 해드릴 뿐이라면 가히 효라 할 수 있다고 한 것도 통한다 할 것이다.
武伯, 懿子之子, 名彘. 言父母愛子之心, 無所不至, 惟恐其有疾病, 常以爲憂也. 人子體此, 而以父母之心爲心, 則凡所以守其身者, 自不容於不謹矣, 豈不可以爲孝乎? 舊說, 人子能使父母不以其陷於不義爲憂, 而獨以其疾爲憂, 乃可謂孝. 亦通.
희주에 관해서는 이미 논술하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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