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仁)하지 않으면 예악(禮樂)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3-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예인들 무엇하리오? 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악인들 무엇하리오?” 3-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
전통적으로 비교적 논란의 대상이 될 바가 없는 아주 평범한 공자님의 말씀에 속하는 장구이지만, 나는 이 장을 심히 좋아한다. 공자의 사상을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초기 파편의 전송으로 간주하며, 또 공자의 생각의 철학적 구조를 잘 나타내는 심오한 표현으로 해석한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예(禮)와 악(樂)은 이미 「학이(學而)」 12 유자(有子)의 말을 해설할 때 자세히 말했던 것이다. 이 편의 일관된 주제의식인 예(禮)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통적으로 예(禮)라고 하는 것은 악(樂)을 동반치 아니하고서는 성 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실 악(樂)이라는 주제는 크게 보면 예(禮)에 포괄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음양론적 세계관이 정립된 후에는, 예(禮)와 악(樂)은 음양론적으로 대립되는 어떤 상생상보(相生相補)의 두 극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극의 설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장의 언어가 전국후기에 윤색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보았으나, 최근 죽간문헌의 발견은 그러한 안일한 생각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예기』의 각 편의 성립시대가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의 통념보다 상한선이 높게 설정되기 때문이다. 예(禮)ㆍ악(樂)의 문제는 공자 생애에 있어서 매우 리얼한 문제였고, 그것이 인(仁)과의 관련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공자의 매우 오리지날한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악(樂)은 하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요, 예(禮)란 땅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악은 인간의 허령한 상초적 상상력에 속하는 것이요, 예란 인간의 구체적인 하 초적 질서감에 속하는 것이다. 악은 신(神)을 거느리고 천(天)을 따르고, 예는 귀(鬼)를 거느리고 지(地)를 따른다. 악은 신(神)의 세계요, 예는 귀(鬼)의 세계다. 악은 혼(魂)의 세계요, 예는 백(魄)의 세계다. 악은 정(情)의 불가변자(不可變者)요, 예는 리(理)의 불가역자(不可易者)다. 악은 부드러운 정감의 소산이요 예는 딱딱한 이지의 소산이다. 따라서 악은 위동(爲同)이요, 친화를 위해 있는 것이다. 예는 위이(爲異)요, 변별을 위해 있는 것이다. 동(同)하면 상친(相親)케 되고, 이(異)하면 상경(相敬)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由中出유출)이요, 예는 인간의 외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것(自外作자외작)이다. 그러므로 악은 정(靜, 고요한 것이요, 예는 문(文, 질서정연)한 것이다. 우리의 총결론은 이러하다. 대악(大樂)은 필이(必易)요, 대례(大禮)는 필간(必簡)이다. 위대한 음악은 반드시 쉬워야 하고, 위대한 예법은 반드시 간결해야 한다. 악은 천지지화(天地之和) 예는 천지지별(天地之別)이다. 예는 우리에게 질서의 아름다움을 제공하고 악은 우리에게 생명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樂者樂也].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예악(禮樂)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 최종적인 인성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인(仁))’이라고 공자는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禮)를 예다웁게, 악(樂)을 악다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이요,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仁)이다. 그렇다면 인(仁)이란 무엇인가?
‘여례하(如禮何)?’ ‘여악하(如樂何)?’를 보통 주석가들은, 사람으로서 인(仁)한 사람이 아니라면 예(禮)와 악(樂)이 있어도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길이 없다는 식으로 푼다[言雖欲用之, 而禮樂不爲之用也]. 다시 말해서 예와 악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자격자는 반드시 인인(仁人)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苞氏曰, 言人而不仁, 必不能行禮樂也. 『古注』].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을 보다 추상적으로 해석한다. 인간으로서 인(仁)의 덕성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면 예와 악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탄식, 예와 악의 실내용이 공허해지고 만다는 개탄으로 푸는 것이다. 즉 여기서 공자는 예악(禮樂)의 본질은 바로 인간의 인(仁)함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仁)의 본질이 결여된 예악(禮樂)은 형식화되고 제식화될 뿐이며, 형해화되어 빈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악(樂) | 예(禮) | |
우주론 | 천(天) | 지(地) |
양(陽) | 음(陰) | |
신(神) | 귀(鬼) | |
혼(魂) | 백(魄) | |
인성론 | 상초(上焦) | 하초(下焦) |
정(情) | 리(理) | |
유중출(由中出) | 자외작(自外作) | |
동어내(動於內) | 동어외(動於外) | |
사회론 | 동(同) | 이(異) |
친(親) | 경(敬) | |
화(和) | 별(別) | |
정(靜) | 문(文) | |
화(和) | 절(節) | |
영(盈) | 감(減) | |
필이(必易) | 필간(必簡) |
그렇다면 인(仁)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문제의 아이러니는 공자가 그토록 인을 말하면서도, 인을 한 번도 규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은 홍운탁월(烘雲托月)의 세계일 뿐이요, 그 자체로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개념적 언어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감이요, 직감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논어』를 선(禪)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말할 때부터 이미 나는 인(仁)은 정의할 수 없는 것(the Undefinable)이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예와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 실체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도를 감행해볼 수가 있다.
의가(醫家)나 속(俗家)에서 쓰는 말로 ‘행인(杏仁)’이라는 말이 있다. 행인(杏仁, Semen Armeniacae)이란 장미과(Rosaceae)에 속한 낙엽교목인 살구나무의 성숙한 과실인 살구의 미고(味苦)한 종자(種子)이다. 윤하약류(潤下藥類)로서 지해정천(止咳定喘)하고 윤장통변(潤腸通便)하는 작용이 있는 소독(小毒性)의 좋은 약재이다. 그런데 왜 씨라는 표현에 ‘인’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을까? 도인(桃仁), 사인(砂仁), 욱리인(郁李仁), 마자인(麻子仁), 과루인(瓜蔞仁), 익지인(益智仁), 산조인(酸棗仁), 백자인(柏子仁), 의이인(薏苡仁) 등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씨를 모두 ‘인(仁)’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인(仁)을 부정하면 ‘불인’이라는 단어가 된다. 그런데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의가(醫家)에서 잘 쓰는 말인데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식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비’나 ‘무감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마비란 느낄 수 없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불인(不仁)이란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인(不仁)의 뜻에서 인(仁)의 의미를 역산(逆算)해낼 수 있다. 인(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느낄 줄 아는 상태’이다. 씨란 곧 느낌의 집결체이다. 씨란 전 우주를 느낄 줄 아는 생명의 축소태이다. 그것은 느낌을 지시하는 정보의 축약태이며, 그 정보란 나와 타자 사이의 교섭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정보는 고정불변한 결정론적 체계가 아니라 모든 상황적 변수를 지시해나갈 수 있는 역동적 교섭의 체계이다. 그것은 영원한 느낌의 가능태이며, 이성적 완결태가 아니다. 나는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의미를 ‘씨’라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씨’의 용법이 공자 당대의 용법이었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씨’의 의미가 후대에 형성된 것이라 해 도, 그것은 곧 공자가 말하는 인의 의미가 구상화되어간 역사적 과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이라는 것을 이해한 후대인들의 해석의 구조를 ‘씨’라는 한 마디는 매우 적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을 미학(美學)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학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esthetics’(혹은 aesthetics)라고 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학문은 어원적으로 느낌(sensation)을 뜻하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에 의해서는 진리(aletheia)의 자격이 없는 매우 저급한 인식으로 소외되었던 인간의 느낌이다. 그러나 아토미스트(원자론자들은 이 ‘아이스테시스’를 인식의 물리적 근거로서의 ‘접촉’의 의미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sensation)의 파토스(pathos)가 되었다가 다시 그 감성에 의하여 촉발되는 영혼의 파토스로 발전한다.
이 느낌 즉 감성의 의미를 지니는 ‘esthetics’에 부정사 ‘an’을 첨가하면 ‘anesthesia’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무감각 상태’를 뜻하며 곧 현대의학술어로 ‘마취’의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東)ㆍ서(西)의학ㆍ철학의 용어에 나타나고 있는 사유의 보편적 구조에 다시 한 번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대 희랍인에 있어서의 미학과 마취의 관계와, 고대 중원사람들에 있어서 인(仁)과 불인(仁)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인식체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仁), 느낌 | 불인(不仁), 마비 |
esthetics 아름다움의 느낌 | anesthesia 마취 |
씨는 이 세계를 느낄 줄 안다. 그것이 불인(不仁)하면 씨가 아니다. 그것은 사멸해버린 물질일 뿐이다. 인(仁)은 느낌이다. 느낌은 생명의 기반이요 확증이다. 그러나 인(仁)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바로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 성이다. 감성은 이성과 대립되거나, 이성적 판단의 단순한 원초적 자료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인들에게 감성이란 이성보다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것이다. 이성이란 궁극적으로 감성이 추상화된 어떤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이란 고도의 부정성이다. 고도의 부정성은 에러의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것이며 생명의 보편적 기반이 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보다 원초적인 생명의 보 편적 기반을 공자는 ‘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 느낌 (Cosmic Feeling)이며, 심미적 느낌(Aesthetic Feeling)이다. 느낄 줄 아는 자래야 비로소 인(仁)할 수 있는 것이다. 인(仁)은, ‘Benevolence’로 번역되는 따위의, 인자함의 규범적 윤리덕성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 이전의 느낌(Primordial Feeling)이다. 그것은 심미적 세계를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윤리는 아름다움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리는 맹자(孟子)의 말대로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규범적 윤리이기 전에 우주와 인간에 대한 아름다움의 느낌이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아름다움에 대하여 차마 어떻게 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우주 자체가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에로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 또한 그 우주의 에로스적 충동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요새말로 단적으로 표현하라면, ‘심미적 감수성(Aesthetic Sensitivity)’이라 서슴치 않고 답할 것이다. 심미적 감수성은 원초적인 것이며 상황적인 것이며 포섭적인 것이며 유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고정불변의 선험적 체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자를 가리켜 ‘째즈 아티스트’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이불인(人而不仁), 여례하(如禮何)? 인이불인(人而不仁), 여악하(如樂何)?’라는 본 장의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을 발견한다. 인(人)【공자시대의 발음은 njin으로 재구성된다. 리 황꿰이(李方桂)의 재구음에 의거함】과 인(仁)【njin으로 재구】은 발음상 펀(pun)의 의미가 겹쳐있다.
그리고 ‘이(而)’라는 접속사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상반되는 의미체계를 접속시키는 아이러니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면서 인(仁)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예(禮)인들 무엇하며, 악(樂)인들 무엇하랴! 즉 인간에게 심미적 감수성이 확보될 수가 없다면 예악(禮樂)은 작동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예악(禮樂)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음악의 거장에게 중요한 것은 악보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 아니다. 그러한 이성적 인식을 감성적으로 처리해나가는 상황적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기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심미적 감수성이었다. 예(禮)도 마찬가지다. 예(禮)의 복잡한 절차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나 메모리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禮)를 인간세에 구현하는 감성적 처리방식이 인(仁)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禮)는 고정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항상 순간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에 대처하는 질서적 감각이다. 예(禮)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며, 누우스(nous)가 아니다. 따라서 불인(不仁)하면 예악(禮樂)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공자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의 도덕은 예술적 도덕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예술을 빼놓은 도덕적 형태만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仁)을 허여(與)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안회(顔回) 만이 그가 인(仁)하다고 부르고 싶었던 유일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공자와 안회의 영혼은 서로의 심미적 감수성을 통해 교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정부가 말하였다: “사람으로서 인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망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예악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본장은 예악을 쓰고자 해도, 그 예악이 전혀 쓰여질 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游氏曰: “人而不仁, 則人心亡矣, 其如禮樂何哉? 言雖欲用之, 而禮樂不爲之用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인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리(正理)이다. 정리를 상실하면 질서도 없어지고 조화도 없어진다.”
○ 程子曰: “仁者, 天下之正理, 失正理則無序而不和.”
이씨가 말하였다: “예악이란 훌륭한 사람을 만날 때만 제대로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아니라면, 비록 옥소리와 비단줄이 서로 얽히며 교감하고, 종과 북이 우람찬 소리를 낼 수 있다 한들, 과연 이것들이 뭔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편의 편집자가 이 말씀을 「팔일(八佾)」과 ‘옹철(雍徹)’ 다음에 편집해 넣은 것은 아마도 예악을 참람되이 쓰는 자들 때문에 발하신 것이라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李氏曰: “禮樂, 待人而後行, 苟非其人, 則雖玉帛交錯, 種鼓鏗鏘, 亦將如之何哉? 然記者序此於八佾ㆍ雍徹之後, 疑其爲僭禮樂者發也.”
여기 이씨의 편집의도에 관한 언급은 매우 예리한 지적이다. 1ㆍ2ㆍ3장은 본편의 총론격의 로기온모음이며, 서로 유기적 연관성이 있다. 3장은 계씨와 ‘삼가(三家)’가 모두 예악을 말하기 이전에 ‘인간실격(人間失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씨가 ‘예악은 대인이후행(待人而後行)’이라고 한 것도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요즈음의 상황에 비추어 말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오케스트라 단원과 악기가 준비되어 있어도 위대한 지휘자가 없으면 위대한 음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기실 『논어』의 많은 말들이 매우 전문적인 음악평론이다.
이씨는 일반 사서에 잘 안 나오는데, 『송원학안(宋元學案)』 「귀산학안(龜山學案)」에 실려있다. 이씨는 북송의 이욱(李郁, 리위, Li Yu, 1086~1150)이다. 자가 광조(光祖)인데 서산에 오래 은거하였기에 그를 보통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고 부른다. 주자가 태어난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인 복건성 서북 소무(邵武) 사람으로 원우당인인 이심(李深)의 아들이며, 양귀산의 사위이다. 인(仁)이 곧 인심(人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것이 공문의 주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실천하 기 위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는[湛心] 공부를 18년간이나 했다. 그리고 그는 고경(古經)의 독서를 강조했다.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오히려 무미(無味)한 곳에서 생각을 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자는 이욱의 학문에 선미(禪味)가 짙다고 평하였다. 저서에 『역전(易傳)』, 『참동계(參同契)』, 『논맹유고(論孟遺稿)』 등이 있다.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5. 오랑캐 나라에 임금 있는 것과 중국에 임금 없는 것에 대해 (0) | 2021.05.27 |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4. 예(禮)의 근본을 묻다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2. 삼가(三家)가 옹(雍)이란 천자의 음악으로 제사를 마치다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 계씨, 팔일무를 추게 하다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편해 (0) | 2021.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