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노나라가 참람되이 천자의 제사인 체(禘)제사를 지내다
3-10.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체제사에서, 강신주를 따르는 절차 이후로는, 나는 현행의 체제사를 보고 싶지 않다.” 3-10.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
사실 이 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해석에는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장 그 자체는 문법적으로는 의미가 명료하다. 고주에 따라 그 뜻을 새기면 다음과 같다.
체(禘)라는 것은 왕자(王者)의 대제(大祭)다. 이것은 군주가 선조의 위패들을 모신 태묘에서 철에 따라 지내는 대제인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종묘대제(宗廟大祭)야말로 체(제사의 한 전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종묘의 정시제(定時祭)는 춘하추동 사계절의 시작과 납일(臘日)에 지내었다. 체제 사는 원래 천자만이 지낼 수 있었던 제사였는데, 노나라는 주공(周公) 단(旦)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태묘에서 체제사의 격식을 차리는 것이 주(周) 성왕(成王) 시절부터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례의 원래 의미는 상실되어 갔고 그 후 노나라에서 지낸 체제사는 무엇인가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그 격식도 많이 비하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사가 아닌 제사에 도체의 격식을 마구 쓰는 그런 사태가 목도되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체제사의 대중화현상이기도 했지만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명백히 비하요 참월이요 타락이었다.
모든 제사는 영신(迎神)ㆍ오신(娛神)ㆍ송신(送神)이라는 디프스트럭쳐(deep structure)를 벗어나지 않는다. 영신(迎神)은 청신(請神)이라고도 하고, 강신(降神)이라고도 한다. 신을 청하는 것이다(Invitation). 오신(娛神)은 모신 신을 대접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다(Entertainment). 오신은 반드시 기원(Supplication)을 곁들인다. 그리고 기원이 끝나면 신을 다시 배웅(Seeing-off)하는 제식을 하는데 그것이 곧 송신(送神)이다.
영신(迎神) | 오신(娛神)ㆍ기원(祈願) | 송신(送神) |
Invitation | Entertainment-Supplication | Seeing-off |
여기 관(灌)이라는 것은 신을 부르는 최초의 제식이다. 이것은 강신주(降神酒)를 땅이나 지푸라기에 붓는 제식이다. 이때 쓰이는 강신주를 울창주(鬱鬯酒)라고 하는 것이다. 울창(鬱鬯)이라는 것은 모두 향기와 관련된 의미다. 창(鬯)의 자형은 향초를 술독에 담은 모습이다. 그 향초를 보통 울초(鬱草)니 울금초(鬱金草)니 말하지만, 이것은 울창백초(鬱草百草)의 화(華)를 합양(合釀)한 것이다. 곡류로는 보통 찰기장[黍]을 쓴다. 그러니까 서주(酒)이다. 울(鬱)이란 자형으로 볼 때 창(鬯)의 술과 숲이 합쳐진 모습이다. 즉 창의 향기가 흩어지지 않고 빽빽하게 서려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현대어에서 ‘울분(鬱憤)’이니 ‘울결(鬱結)’이니 ‘억울(抑鬱)’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원래는 모두 술의 향기가 뭉쳐 흩어지지 않는 모습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은 대기오염이 하도 심해서, 그리고 술의 분향(芬香)이 하도 하질(下質)이래서, 사람들이 울창의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할 기회가 없지만, 옛날에 대자연의 정취 속에서 울창주를 지푸라기에 배게 만들어 그 향기가 은은히 퍼지는 울울한 기색은 신이 하강하는 모습을 연상하고 감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는 다음과 같은 오묘한 구절이 있다.
지극히 공경스러운 곳에는 맛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그 그윽한 향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至敬, 不饗味而貴氣臭也.
여기 공자의 어조는 매우 단호하고 강렬하다. 당대의 체제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나는 체제사에 있어서, 이 울창주를 지푸라기에 깔린 땅에 붓는 최초의 강신(降神) 제식단계 이후로는 도무지 관람하고 싶지를 않다. 이것은 곧 공자의 두뇌 속에는 체제사의 원형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灌)’ 이후의 체제사의 진행방식은 도무지 공자의 상식으로는 허용될 수가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공안국(孔安國)은 관(灌)의 예식 이후에 전개된 체제사의 내용이 노(魯)나라에서는 자기네 희공(僖公)을 높이어 먼저 제사지냄으로써 『예기』 「왕제(王制)」에서 규정하고 있는 소(昭)ㆍ목(穆)의 차례를 어지럽히는 전도된 역사(逆祀)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기에 공자가 이를 보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旣灌之後, 別尊卑, 序昭穆, 而魯爲逆祀, 躋僖公, 亂昭穆, 故不欲觀之矣], 나는 결코 공자의 분노는 단순히 그러한 위패의 차서(次序)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 제례의 내용에, 예를 들면, 희생이나 음악이나 춤 등의 과정에 있어서 잔인하거나 월권하는 행위가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다산의 『고금주(古今注)』에 매우 상세하다.
다산은 「교특생(郊特牲)」에 ‘춘체이추상(春禘而秋嘗)’【봄에 드리는 것이 체(禘)요, 가을에 드리는 것이 상(嘗)】이라 말한 것을 인용하여 체(禘)를 해설하고 있으나【「제통(祭統)」에는 체(禘)가 여름제사로 되어있다】, 여기 공자가 말하는 체(禘)는 「왕제(王制)」나 「교특생(郊特牲)」, 「제통(祭統)」, 「중니연거(仲尼燕居)」에서 말하는 계절적인 구분 속의 체(諦)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대제(大祭)일 수도 있다. 체(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그것은 조상신의 차원을 넘어선 상제(上帝)에 대한 제사일 수도 있으며, 그것은 제천(祭天)의 대전(大典)일 것이다.
‘禘’는 대계(大計) 반이다. ○ 조백순이 말하였다: “‘체(禘)’라는 것은 왕자(王者=천자)의 대제(大祭)이다. 왕자는 이미 시조의 묘를 세우고, 또한 시조가 나온 본원인 하느님(제帝)【이것은 후대의 제왕의 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야훼’와도 같은 천제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우리의 상식적 ‘제’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제 본래 은나라 사람들의 하느님이었다】을 추존하여, 하느님을 시조의 종묘에서 같이 제사지낸다. 이렇게 하여 시조를 하느님과 같이 배향[配향, 짝짓다]하는 것이다. 성왕(成王)은 주공이 주나라 건국에 큰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노나라에 중제(重祭, 중요한 제사)를 내려주었다. 그러므로 주공의 묘에 체(禘)를 얻게 된 것이다. 문왕으로 하여금 주공이 나오게 된 하느님으로 삼고, 주공을 문왕 하느님에게 짝지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시 제대로 된 예가 아니다.”
禘, 大計反. ○ 趙伯循曰: “禘, 王者之大祭也. 王者旣立始祖之廟, 又推始祖所自出之帝, 祀之於始祖之廟, 而以始祖配之也. 成王以周公有大勳勞, 賜魯重祭. 故得禘於周公之廟, 以文王爲所出之帝, 而周公配之, 然非禮矣.”
‘관(灌)’이라는 것은 방금 제사를 지내려하는 그 처음에 울창의 술을 사용하여 땅에 부어 신을 강림케 하는 것이다.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이 신이 강림하는 이때만은 성의가 흩어지지 않고 긴장감이 있어서 봐줄 만한데, 처음 순간이 지나면 점점 풀어지고 나태해져서 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대 저 노나라의 체제사는 본시 예에 맞는 것이 아니라서 공자로서는 본래 보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사마저 개판으로 치르는데 이르면 실례 중에 또 실례(失禮: 예를 잃는다. 예에 어긋난다)를 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탄식을 발하신 것이다.
灌者, 方祭之始, 用鬱鬯之酒灌地, 以降神也. 魯之君臣, 當此之時, 誠意未散, 猶有可觀. 自此以後, 則浸以懈怠而無足觀矣. 蓋魯祭非禮, 孔子本不欲觀, 至此而失禮之中又失禮焉, 故發此歎也.
설명이 쉽고 잘 되어있다. 고대의 ‘제’라는 개념을 잘 파악해야 한다. 본시 지상의 제왕(帝王)과는 관련없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은나라 말기에 오면 임금의 이름에, 제(帝乙)이니 제신(帝辛)이니 하여, 제자가 나타나는 현상은 지상의 임금을 신격화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신이 곧 주(紂)이니 은나라도 지상의 임금을 신격화하면서 멸망한 것이다.
조백순(趙伯循)은 조광(趙匡)이다. 생졸연대가 미상이나 당(唐)나라 대력(大曆, 766~779) 연간에 활약한 인물이다. 자(字)가 백순인데 ‘백순(伯楯)’으로도 쓴다. 산서성 하동(河東) 출신이다. 담조(啖助)에게 사사(師事)하였고, 『춘추좌씨전』이 좌구명(左丘明)의 작품일 수가 없다고 구하여 고경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고증학적 시각을 제공하여, 송학의 선구를 이루었다.
○ 사현도가 말하였다: “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라의 도를 보려고 기나라를 갔는데도 기나라가 증거를 대주지 못하였고, 내가 상나라의 도를 보려고 송나라를 갔는데도 송나라가 증거를 대주지 못하였다’ (「팔일(八佾)」 9).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나라도 도를 보려고 하나 유왕(幽王, BC 781~771)【서주를 멸망시킨 마지막 왕】과 여왕(厲王)【유왕의 전전대 왕으로 포학치오(暴虐侈傲키가 그지 없었다. 민심이 크게 이반되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다】이 다 망쳐놓았으니, 그나마 노나라를 버리고 딴 곳에서 고찰할 길이 없다. 그러나 노나라의 교체(交禘)는 예가 아니니, 주공의 도가 쇠퇴한 것이다’(『예기』 「예운」). 기나라와 송나라를 살펴보니 이미 그 모양이었고, 또 지금 노나라의 형편을 살펴보니 또 이 모양이었으니, 공자께서 이 때문에 깊게 탄식하신 것이다.”
○ 謝氏曰: “夫子嘗曰: ‘我欲觀夏道, 是故之杞, 而不足徵也; 我欲觀殷道, 是故之宋, 而不足徵也.’ 又曰: ‘我觀周道, 幽ㆍ厲傷之, 吾舍魯何適矣. 魯之郊ㆍ禘非禮也, 周公其衰矣!’ 考之杞ㆍ宋已如彼, 考之當今又如此, 孔子所以深歎也.”
사량좌(謝良佐, 1050~1103)의 해설이 정곡을 얻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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