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가족이 아니고서야 적당선이 필요하다
4-26 자유가 말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너무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붕우간에 너무 자주 충고하면 멀어지게 마련이다.” 4-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
이것은 물론 자유(子游)의 말로서 기록된 것이며, 「이인(里仁)」편에서는 이질적인 성격의 것이다. 원래 이인」편에 속하지 않는 파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제18장의 주제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 장은 18장을 보완하는 성격이 있다. 그리고 공통되는 주제가 「안연(顔淵)」 23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이 말은 비록 자유의 말이긴 하지만, 공자가 평소 자기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항시 말했던, 제자들이 자주 들었던 말씀이었을 수가 있다. 그래서 부록격으로 「이인」편의 성격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첨가한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부모(父母)와 나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의(義)라는 명분으로 단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우(君友)와 나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그것은 의(義)라는 명분에서 어긋나면 단절되는 것이다.
‘삭(數)’은 단지 ‘자주’라는 부사적 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간한다’, ‘번쇄하게 이것저것 말한다’는 동사적 용법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삶의 지혜에 관한 것이다.
정의라 해서 아무 때나 다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善)이라 해서 아무 때나 언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타인의 부정의와 불선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이밍의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선 인간세에서는 나의 정의로움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길이 없다. 정의 그 자체가 관계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윗사람을 섬김에 나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야 하고, 친구를 인도함에 나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쳐야 한다. 타인은 궁극적으로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내가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하나의 독단이 요 환상이다. 이것이 모든 전도주의(evangelism)의 환상인 것이다. 인간의 개선은 그 주체의 깨달음의 계기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간언이란 기껏해야 상대방의 주체적 자각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나는 함구해야 한다. 쓸데없이 계속 지껄이면 말하는 자가 경박하게 되고, 듣는 자가 염증을 낼 뿐이다. 그러한 자들은 정의를 빙자하여 영화를 구하려다 오히려 욕을 당하게 되고, 우의를 빙자하여 친함을 구하려다 소원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數’은 색각(色角) 반이다. ○ 정이천이 말하였다: “‘삭(數)’은 번삭(번거롭게 자주함)의 뜻이다.”
數, 色角反. ○ 程子曰: “數, 煩數也.”
호인이 말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간하는 말이 나라에 행하여지지 아니 하면 마땅히 떠나야 하고, 벗을 인도함에 선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아니 하면 마땅히 중지해야 한다. 번독(煩凟)함에 이르게 되면 말하는 자가 경박하게 보이고 듣는 자가 염증을 낸다. 이 때문에 영화를 구하다가 도리어 욕을 당하고, 친함을 구하다가 도리어 소원해지는 것이다.”
胡氏曰: “事君諫不行, 則當去; 導友善不納, 則當止. 至於煩瀆, 則言者輕, 聽者厭矣, 是以求榮而反辱, 求親而反疏也.”
범순부가 말하였다: “군신의 사이와 붕우의 사이는 모두 의로써 합하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가치관이 적용된다.”
范氏曰: “君臣朋友, 皆以義合, 故其事同也.”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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