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 형의 딸과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다
5-1A, 공자께서 공야장을 평하여 이르시기를 “사위삼을 만하다. 비록 그가 오랏줄에 묶여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하시고,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5-1A.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
공야장(公冶長)은 성이 공야(公冶)고 이름이 장(長)이다【‘장(萇)’으로 쓰기도 한다】. 공자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나, 기실 그 인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 주자의 주가 정설일 것이다[長之爲人, 無所考].
‘위(謂)’라 한 것은 단순히 ‘일컫는다’는 뜻이 아니고, 인간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깊숙이 내포되어 있다. ‘처(妻)’는 자기 딸을 시집보낸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가처야(可妻也)’는 ‘내 딸을 시집보낼 만하다’는 뜻이지만, ‘사위 삼을 만하다’로 번역하였다. ‘류설(縲絏)’의 ‘류(縲)’【현재음은 ‘누’】는 죄인을 묶는 데 쓰는 검은 색의 포승이다[縲, 墨索也]. ‘설(絏)’은 ‘묶는다’는 뜻이다[絏, 攣也].
공야(公冶)라는 성(姓)으로 보아, 공야장(公冶長)은 공가(公家, 궁정)에서 야금술에 관계된 직종에 근무하는 장인집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야장은 특수한 재능을 가진 장인출신임이 분명하다. 당시 장인의 신분이 높을 수는 없었겠지만 조선왕조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천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내에 거주하는 국인(國人)들의 상당수가 장인들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야 장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공자는 그의 옥살이가 그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非其罪也]. 그리고는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요새 말로 하면, 공자는 자기 딸을 이공계 사람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딸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아무리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딸을 사랑하는 심정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지, 사랑하는 딸을 옥살이하고 있는 죄수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은 결단력 있는 행동이다. 공자가 자기 딸을 시집보낼 즈음의 처지는 결코 그 사회적 지위가 낮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자의 딸은 귀한 집의 규수였을 것이다. 그러한 딸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청년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이 부귀를 만끽하는 폐쇄적인 써클 내에서만 혼사를 일삼는 세태를 반추해볼 때 참으로 생각해볼 것이 많은 처사이다. 공자는 진리 앞에서 엄정한 보편주의를 실천하는 과감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이러한 고사를 통해 리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선생이 경신년(庚申, 1860)에 득도하고 신유년(辛酉, 1861) 6월부터 포덕(布德)을 시작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두 여비(女婢)를 해방시켜주고,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 사람은 양딸로 삼은 것이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그냥 쉽게 들을 수는 있지만, 막상 반천(班賤)의 구분이 극심하던 당대의 가치관 속에서 그리 쉽사리 실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공자가 자기 딸을 억울한 죄수에게 시집보낸 것이나, 수운이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뜻을 펴기로 작심한 후에 솔선수범하여 노비를 며느리로 삼은 것이나 다 상통하는 성인의 법도이다.
「공야장(公冶長)」편에 수록되어 있는 이러한 류의 이야기들은 실상 공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신빙성이 높은 파편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사(家事)라든가, 사람 이야기라든가, 사건들은, 그것의 전달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소문으로서 전파력이 강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추상적 교훈은 당대 당장에 정확히 기록이 안 되었다면, 인간의 기억력 속에 그 원형 이 보존되기 어렵다. 상당 부분이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공자의 이름을 빌어 날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도 대부분 동일한 운명의 소산이다. 그러나 공자가 자기 딸을 죄수에게 시집 보냈다더라는 따위의 사건의 기술은 비교적 사실적 근거가 있는 풍문으로서 전파력이 강한 것이다. 날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날조의 가능성이 적다는 역설 또한 훌륭히 성립한다. 그래서 나는 「공야장(公冶長)」편을 공자 당대의 생생한 장면을 보존한 비교적 가치 있는 문헌으로 중시한다.
황간(皇侃)의 소(疏)에는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공자 당대의 소문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한위소설(漢魏小說)류의 꾸며낸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小說, 작은 이야기)의 성립연대가 상당히 고대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가치가 높다.
공야장(公冶長)의 명(名)은 지(芝)요, 자(字)는 자장(子長)이라 한다【명은 장(長), 장(萇)으로도 쓰였고, 자도 자장(子長) 외로 자지(子芝), 자지(子之)가 쓰인다】. 그런데 『논석(論釋)』이라고 하는 책에는 이 사건에 관한 자세한 내막이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고 황간은 말한다. 공야장이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올 때의 일이었다. 공야장은 본시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특수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 두 나라의 경계지역에서 공야장은 새들이 서로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계(淸溪)로 가자! 그곳에 시체가 하나 있단다. 그 죽은 사람 고기 먹으러 가자!”
그리고는 한참을 걷다가 길거리에서 통곡을 하고 있는 한 노파를 만났다. 공야장이 궁금해서 물었다.
“웬일이요?”
“아 글쎄 우리 아이가 며칠 전 집을 나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질 않고 있소. 필시 이놈이 죽었을 꺼라우, 시체가 어디 있는 지라도 찾았으면 좋겠건만……[兒前日出行, 于今不反, 當是已死亡, 不知所在].”
이 소리를 듣고 새가 말하던 것을 기억해낸 공야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아까 새들이 서로를 부르며 청계로 가서 고기를 먹자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우, 아마 그 시체가 할머니 아이일지도 모르겠수[向聞鳥相呼, 往淸溪食肉, 恐是嫗兒也].”
할머니가 청계로 가서 보니 과연 그 아들이 있었는데 숨을 거둔지 오래였다. 노파가 촌사(村司)에게 보고하니, 그 촌사는 어떻게 시체를 발견했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노파는 공야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여차여차해서 그 소재를 알 수가 있었다고 들은 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 촌관(村官: 촌사村司와 동일인)이 소리치며 말했다.
“감히 누굴 우롱하는 것이냐? 공야장 그 놈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연고로 시체의 소재지를 파악했단 말인가?[治長不殺人, 何緣知之]?”
그리고는 공야장을 감옥에 감금시켰다. 원님이 공야장을 심문하였다. “무슨 원한이 있길래 사람을 죽였느냐?”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새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외다[解鳥語, 不殺人].”
심문이 성립되지 않자 원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내가 너를 시험해보리라! 네가 진정코 새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입증이 되면 널 놓아주겠다. 새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널 사형에 처하리라[當試之. 若必解烏語, 使相放也. 若不解, 當令償死].”
원님은 공야장을 60일 동안 감금하였다. 60일 감금이 끝나는 마지막 날 참새들이 감방 창문턱에 모여 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짹짹짹짹, 흰 연꽃 물가에 구루마가 뒤집어졌다. 기장과 좁쌀 가마가 다 엎으러졌대는구나, 황소 뿔이 부러졌다. 엎으러진 것 다 담을 수도 없구. 야! 친구들 불러 날아가서 실컷 쪼아 먹자꾸나![唶唶嘖嘖, 白蓮水邊, 有車翻, 覆黍粟, 牡牛折角, 收斂不盡, 相呼往啄].”
원님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파견해 조사해보니 과연 공야장의 말대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 뒤 또다시 돼지의 말과 제비의 말을 해석하는 일을 시험해보고, 결국 공야장을 무죄로 석방시켰다. 『공자가어』에는 공야장이 노나라 사람으로서 치욕을 잘 인내하는 성품의 소유자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제일 마지막의 ‘이기자처지(以其子妻之)’의 ‘자(子)’라는 용법은 고문에 속하는 용법이다. 자(子)를 지금은 모두 아들 자(子)로 훈하고 있으나, 『시경』에서는 자(子)가 대체적으로 ‘새악시’, ‘처자’, ‘처녀’의 의미로 쓰인다. ‘지자우귀(之子于歸)’라는 표현은 ‘저 새악시 시집가네’의 뜻인데 관용구처럼 반복되어 출현하고 있다. 본 장이 고문을 전승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야장(公冶長)」의 제1장은 기실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장을 두 장으로 나누어 번호를 매긴다. 그래서 「공야장」편은 28장이 된다. 그러나 주자는 두 개의 사건을 한 장으로 묶었고 따라서 공야장편은 27장이 된다. 나는 주자의 편장을 따르므로 이장을 둘로 나누지는 않는다. 대신 5-1A, 5-1B라는 번호를 썼다.
‘처(妻)’는 거성이다. 이하의 용례도 다 같다. ‘縲’는 력추(力追) 반이다. ‘絏’은 식렬(息列) 반이다. ○ ‘공야장(公冶長)’은 공자의 제자이다. ‘처(妻)’라는 것은 아무개를 부인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류(縲)’는 검은색의 포승이요. ‘설(絏)’은 결박이다. 옛날에 옥중에서 죄인을 검은색 포승으로 구련(拘攣: 묶어 구속하다)하였다. 공야장의 사람됨에 관하여서는 상고할 자료가 없다. 그러나 부자께서 딸을 시집보낼 만하다[可妻也]라고 칭찬하셨으니 반드시 취할 것이 있는 인물일 것이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이 비록 일찍이 류설(縲絏)의 상태에 빠져있었지만 그 사람의 죄가 아니 니, 참으로 사위 삼는 데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대저 죄가 있고 없고는 그 자신에게 딸린 것이니, 어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가지고 그 영욕을 삼겠는가!
妻, 去聲, 下同. 縲, 力追反. 絏, 息列反. ○ 公冶長, 孔子弟子. 妻, 爲之妻也. 縲, 黑索也. 絏, 攣也. 古者獄中以黑索拘攣罪人. 長之爲人無所考, 而夫子稱其可妻, 其必有以取之矣. 又言其人雖嘗陷於縲絏之中, 而非其罪, 則固無害於可妻也. 夫有罪無罪, 在我而已, 豈以自外至者爲榮辱哉?
공야장을 비롯해서 공자의 아들, 부인, 사위 등 가족에 관한 정보가 최소한 『논어』속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후대의 공문학단 내에서도 그들에 관한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공자는 가족관계를 일부러 배제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가족권위주의나 가족편애주의 같은 협애한 가치에 얽매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자라는 인간의 훌륭한 측면이다.
5-1B. 공자께서 남용을 평하여 이르시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형벌은 면할 인물이다” 하시고, 그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5-1B.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버려질 수가 없는 인물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최소한 형벌을 면할 정도의 인품과 세태를 바라보는 형안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은, 한 인물의 평가로서는 결코 낮은 평가가 아니다.
남용(南容)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인 남궁도(南宮縚)라는 설 과, 맹손(孟孫)씨의 일족인 남궁(宮宮) 즉 맹자(孟懿子)의 형인 남궁경숙(南宮敬叔)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주자는 후자의 설을 취하고 있고 고주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다. 남궁도(南宮縮)는 『공자가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궁도는 자가 자용이다. 지혜롭게 스스로 세상을 대처해나가는 인물이다. 세상이 맑으면 버려지지 아니하고, 세상이 혼탁해도 물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南宮韜, 字子容, 以智自將. 世淸不廢, 世濁不洿. 孔子以兄子妻之.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30에는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남궁괄은 자가 자용이다. 그가 어느날 공자에게 물어 말하였다. “예는 활쏘기에 능하였고, 오는 땅위에서 배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장사였는데도 제 명대로 죽지를 못하였고, 우와 직은 몸소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았어도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이오니까?” 공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자용이 나가자 비로소 공자는 말문을 열었다: “군자로다! 저 사람은. 으뜸가는 덕을 갖춘 자로다! 저 사람은.” 그리고 또 말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형륙은 면하리라.” 그가 『시경』을 읽다가 대아(大雅)의 ‘백규지점(白珪之玷)’이라는 대목에 오니까 세 번을 반복해서 외웠다. 이에 공자는 그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南宮括, 字子容. 問孔子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而有天下?” 孔子弗答. 容出, 孔子曰: “君子哉若人! 上德哉若人!” “國有道, 不廢: 國無道, 免於刑戮.” 三複白珪之玷, 以其兄之子妻之.
사마천의 기록은 실제로 『논어』에 나오는 파편들을 꼴라쥬해서 거기에 자신의 픽션을 약간 가미한 정도의 느낌 이상의 실제정보가 없다. 그의 정보는 단지 ‘남궁괄(南宮括), 자자용(字子容)’이라는 여섯 글자에 국한되는 것이다. 『시경』의 구절을 운운한 대목은 원래 「논어」 「선진(先進)」 5에 본 장의 기록과 같은 맥락에서 수집된 듯한 파편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남용이 매일 즐겨(세 번) 반복해서 대아의 백규 구절을 외우니 공자께서 그의 형의 말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11-5).
南谷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獻之.
『시경』 대아(大雅)에 「억(抑)」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위(衛) 나라의 무공(武公)이 나이가 5세가 되도록 장수한 인물이었는데 자신을 경계하고 타인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전체가 12장으로 되어 있는 긴 시인데, 그 중 제5장의 마지막 4구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白圭之玷 | 백옥의 흠은 |
尙可磨也 |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거니, |
斯言之玷 | 내 말의 흠은 |
不可爲也 | 갈아 없앨 수 없어라. |
‘백규(白圭)’란 백옥으로 만든 규(圭)이다. 규라는 것은 홀(笏)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중요한 제식에 쓰였다. 제후가 신분의 고하에 따라 차등이 있는 기다란 옥을 두 손으로 받들고 천자를 알현하였다. 천자가 제후를 봉(封)할 때도 수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백규에 난 흠은 갈아 없앨 수 있지만 인간의 말의 흠은 일단 발설되면 갈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경계를 나타낸 좋은 시구라고 생각된다. 남용은 이 시구를 계속 암송할 정도로 공자가 말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삼갈 줄 아는 진솔한 인품의 사나이였기 때문에, 공자가 그 형의 딸을 시집보낼 수 있었다는 고사를 「선진(先進)」 5는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삼복(三復)’의 ‘삼(三)’이란 숫자는 실제로 의미가 없다. ‘늘상’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새기는 것이 좋다】.
그런데 주자의 집주는 이 ‘남궁’이라는 인물에 관한 제설들을 종합하여 맹희 자의 아들인 남궁경숙으로 인식되게끔, 문맥을 몰아간 느낌을 우리에게 던진다.
남용은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맹씨이지만 남쪽 궁에서 살았기 때문에 남 궁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도요, 또한 괄로 부르기도 한다. 자가 자용이다. 그리고 경숙은 시호이다. 맹의자(孟懿子)의 형이다.
南谷, 孔子弟子. 居南宮. 名縚, 又名适, 字子容, 諡敬叔, 孟懿子之兄也.
주자의 설에 따르면 남용은 남궁경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용은 바로 맹희자가 죽기 직전에, 두 아들을 놓고 공자에게 배우라고 유훈을 남겼을 때의 한 사람이 될 뿐더러, 공자에게 유학비용을 대어 주나라의 수도 낙양에 같이 유학 가서 노자의 문하에서 배운 인물이다. 그렇다면 맹의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 동안에 ‘양녕대군’ 정도의 느낌이 드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자의 형이란 숙량흘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난 맹피(孟皮)라는 인물이며, 그는 선천성 기형의 절름발이(가자瘸子, 병족病足)였다. 그렇다면 절름발이 맹피의 딸을 삼환(三桓)의 일가인 맹손(孟孫)의 대부(大夫)급의 남궁경숙에게 시집보냈다는 이 사건은 심상치 않다. 결론적으로 남용을 남궁경숙으로 간주한 것은 두 사위를 드라마틱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후대 주석가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남용은 남궁경숙일 수 없다. 남용은 평범한 공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황간은 공야장과 남용의 평가에 우열이 있다는 당대의 설을 소개한다. 그리고 남용의 평가가 공야장의 평가보다 높기 때문에 공자가 자기 자신의 딸은 낮은 사람에게 보내고, 형의 딸은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성실하고도 겸손한 배려를 한 것이라고 당대의 사람들이 견해를 펴지만, 그런 견해는 무근거한 것이라고 황간은 비판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말한다. 공야장과 남용 사이에서 승부를 가릴 아무 것도 없다.
侃謂二人無勝負也.
주자 또한 이 우열론을 인용하면서, 공자가 그 따위 유치한 배려에 신경을 쓸 위인이 도무지 아니라고 논박한다. 그렇게 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분별적 시각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공자에게는 감옥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낮잡아 뵌다든가 하는 따위의 사심이 일체 있을 수 없다. 딸을 시집보내는 일은 단지 딸의 재질을 헤아려 그에 맞게 배필을 찾았을 뿐이라는 정이천의 말을 인용 한다[況嫁女, 必量其才而求配, 尤不當有所避也]. 사회적 평가를 가지고서 인간의 본연을 평가하지 않는 공자의 내면적 도덕성이 가족관계에 있어서까지 실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평이하게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이 장을 해석하는 정도일 것이다. 내가 생각컨대, 형 맹피는 이미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형의 딸의 혼사를 주관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대 소가의 일들을 자기 일처럼 살피는 자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의 해석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논어』의 중요한 관용구가 하나 등장하고 있다. ‘방유도(邦有道) … 방무도(邦無道) …’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려서 『논어』를 배울 때 선생님들께서 ‘방유도(邦有道) … 방무도(邦無道) …’라는 표현이 유가철학의 도피주의적인 나약함을 나타내는 구문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시는 말씀을 들어왔다. 그러나 나라에 도가 있으면 참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거나 기피해버린다면, 진정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일까? 세종대왕 때는 나아가 벼슬하고 연산군 때는 전부 초야로 도망가는 것이 공자가 말하고 있는 슬기로운 지식인의 모습인가?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상식적 반문은 『논어』의 현실적 맥락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당시의 ‘방(邦)’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국가(nation state)’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방(邦)’은 나와 절대적이고도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 혈연공동체적인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이나, 정약용에게 있어서 조선왕조는 비교적 그러한 숙명적 관계의 관계항들이다. 그러나 공자 당대의 방(邦)이란 당대의 사(士)들에게는 얼마든지 선택의 여지가 가능한 가상적 개념의 무엇이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조차도 자유로운 이민을 통해 삶의 터전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일이 가능했다. 당대의 부국강병이란 곧 이러한 부동인구를 긁어모음으로써 인구증대를 획책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자 당대에는 산아제한은커녕, 인구증대가 부국강병의 최고목표였다. 인구 노동력만 있으면 개간할 수 있는 땅은 무한대로 확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유사(遊士)였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방(邦)에 대한 고착적 충성심이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다. 전라도관청에서 일하기가 힘들어서 경상도관청으로 옮겼다 해서 그를 매국노라 말할 수 없다. ‘방유도(邦有道) … 방무도(邦無道) …’는 그러한 정도의 맥락밖에는 없다. 문제는 방(邦)을 운영하는 치자의 철저한 책임이 더 가혹하게 요구되는 도덕성의 맥락인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이 관용구적 용법의 일곱 가지 용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방유도(邦有道), 불폐(不廢); 방무도(邦無道), 면어형륙(免於形戮).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형벌은 면할 것이다(남용에 대한 평가. 「공야장(公冶長)」 1).
2. 방유도(邦有道), 즉지(則知); 방무도(邦無道), 즉우(則愚).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게 보인다(영무자에 대한 평가. 「공야장(公冶長)」 20).
3. 천하유도(天下有道), 즉현(則見); 무도(無道), 즉은(則隱). 방유도(邦有道), 빈차천언(貧且賤焉), 치야(恥也); 방무도(邦無道), 부차귀언(富且貴焉), 치야(恥也).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빈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공자가 평소 소신을 말함. 「태백」 13).
4. 방유도(邦有道), 곡(穀); 방무도(邦無道), 곡(穀), 치야(恥也).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녹만 챙겨먹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을 먹는 것, 이 모두가 다 수치스러운 일이다(원헌原憲이 수치스러운 일을 물은 것에 대한 공자의 대답, 「헌문」 1).
5. 방유도(邦有道), 위언위행(危言危行); 방무도(邦無道), 위행언손(危行言孫).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말을 정직하게 하고 행동을 정직하게 한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행동은 정직하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라(공자의 평소 신념 피력. 「헌문」 4).
6. 방유도(邦有道), 여시(如矢); 방무도(邦無道), 여시(如矢).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도다(사이에 대한 평. 「위령공」 6).
7. 방유도(邦有道), 즉사(則仕), 방무도(邦無道), 즉가권이회지(則可卷而懷之).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 속에 감추어 두는구나!(거백옥蘧伯玉에 대한 평. 「위령공」6),
출처 | 대상 | 邦有道 | 邦無道 |
중용10 | 자로 | 不變塞焉 | 至死不變 |
중용27 | 其言足以興 | 其黙足以容 | |
진심상42 | 以道殉身 | 以身殉道 | |
계씨2 | 禮樂征伐自天子出 | 禮樂征伐自諸侯出 | |
공야장1 | 남용 | 不廢 | 免於刑戮 |
공야장20 | 甯武子 | 知 | 愚 |
태백13 | 전체 | 見 | 隱 |
貧且賤焉, 恥也. | 富且貴焉, 恥也. | ||
헌문1 | 전체 | 穀, 恥也. | 穀, 恥也. |
헌문4 | 전체 | 危言危行 | 危行言孫 |
위령공6 | 史魚 | 如矢 | 如矢 |
蘧伯玉 | 仕 | 可卷而懷之 |
노자(老子)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진실로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어떻게 작위를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천하신기(天下神器), 불가위야(不可爲也)]’(29장). 천하[=방邦]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작위의 대상이 아니라는 노자의 말과, 방(邦)에 무도(無道)하면 숨으라[은隱]는 공자의 말은 같은 지혜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세상은 내가 주도하여 움직이고 만들어지는 그런 그릇이 아니다.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으려는 자는 놓칠 것이다[위자패지(爲者敗之), 집자실지(執者失之)]. 방(邦)에 도가 없는데 어찌 나 홀로 도를 세우리오? ‘가권이회지(可卷而懷之)’할 뿐이다. 여기 회지(懷之, 가슴에 품는다)라는 말은 진리의 바른 척도를 가슴에 품고 때를 기다릴 뿐이라는 뜻이다.
‘남용(南容)’은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맹씨지만 남쪽 궁[南宮]에서 살았기 때문에 남궁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도(縚)이다. 또한 괄(适)로 부르기도 한다. 자(字)가 자(子容)이며, 시호가경숙(敬叔)이니, 맹의자의 형이다. ‘불폐(不廢)’는 반드시 기용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언행을 삼갔으므로 질서있는 조정에서는 쓰임을 당하고, 난세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일은 또한 제11편, 「선진(先進)」에도 보인다.
南容, 孔子弟子, 居南宮. 名縚, 又名适. 字子容, 謚敬叔. 孟懿子之兄也. 不廢, 言必見用也. 以其謹於言行, 故能見用於治朝, 免禍於亂世也. 事又見第十一篇.
○ 어떤 이가 말하였다: “공야장의 어짊이 남용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성인께서 자기의 딸은 공야장에게 시집보내고 형의 딸은 남용에게 시집보냈으니, 이는 대저 형에게는 후하게 하고 자기에게는 박하게 하신 것이다.”
○ 或曰: “公冶長之賢不及南容, 故聖人以其子妻長, 而以兄子妻容, 蓋厚於兄而薄於己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이런 관점은 자신의 사심(私心)의 수준으로 성인의 경지를 규찰(窺察)한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혐의스러운 자를 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속이 부족한 것이다. 성인의 마음은 스스로 지공(至公)하시니 어찌 혐의스러운 자를 피하고 지지고 할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여식을 시집보내는 일은 반드시 딸의 재질을 헤아려 그 배필을 구하는 것이니, 더욱이 피하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공자의 이 사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나이의 차이나 혼사 시기의 선후나, 이런 정보가 전혀 없다. 단지 혐의를 피했다고 하는 것만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은 크게 옳지 못하다. 혐의를 피하는 정도의 일은 보통 현명한 사람이라도 안 하는 일인데 하물며 성인께서 그따위 일에 마음을 쓰셨겠는가!”
程子曰: “此以己之私心窺聖人也. 凡人避嫌者, 皆內不足也, 聖人自至公, 何避嫌之有? 況嫁女必量其才而求配, 尤不當有所避也. 若孔子之事, 則其年之長幼, 時之先後皆不可知, 惟以爲避嫌則大不可. 避嫌之事, 賢者且不爲, 況聖人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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