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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2. 자천을 군자라 칭찬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2. 자천을 군자라 칭찬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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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자천을 군자라 칭찬하다

 

 

5-2. 공자께서 자천(子賤)을 평하여 말씀하시었다: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의 전통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성을 취했겠는가?”
5-2. 子謂子賤,“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자천은 누구인가? 공자가 말년에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목격한 노나라의 훌륭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젊고 유능한 판관과도 같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3는 자천에 관해 매우 간결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복부제는 노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천이다. 공자보다 49세 연하이다. 그는 벼슬하여 선보의 재가 되었다. 재주와 지략이 있었으며, 인자스럽고 사람을 아끼었다. 백성들을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공자는 그를 크게 평가하였다.

宓不齊, 魯人, 字子賤. 少孔子四十九歲. 仕爲單父宰. 有才智, 仁愛, 百姓不忍欺, 孔子大之.

 

 

그런데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2749세 연하를, 30세 연하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여기저기의 문헌의 내용을 짬뽕해놓고 있다.

 

 

복부제는 자가 자천이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이다. 공자는 자천을 평하여, ‘군자다웁다!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덕을 어디서 취할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말하였다. 자천은 선보의 재상이 되었다. 지나는 길에 공자에게 들려 정황을 아뢰었다: “선보라는 나라에는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이들이 저에게 어떻게 다스리는 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가 떠난 후 공자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애석하도다! 복부제가 다스리는 곳이 너무 작다. 다스리는 곳이 강대한 곳이었다면 거의 이상에 가까운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텐데.”

宓不齊, 字子賤, 少孔子三十歲. 孔子謂子賤, “君子哉! 魯無君子, 斯焉取斯?” 子賤爲單父宰, 反命於孔子, : “此國有賢不齊者五人, 敎不齊所以治者.” 子曰: “惜哉! 不齊所治者小, 所治者大則庶幾矣.”

 

 

브룩스는 이 자천이라는 인물이 결코 공자의 제자가 아니며, 자기의 세력권이 아닌 어떤 라이벌 그룹에서 배출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노무군자자(魯無君子者)’노나라에 만약 나 말고도 많은 훌륭한 인물이 없었더라면과 같은 식의 의미로 풀고 있다. 그러나 자천(子賤)에 대한 공자의 높은 평가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제자원적을 만들 때 자천을 공자의 제자 속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천이 명지방관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고사가 여러 문헌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2편에는 같은 선보(單父)의 명재상이었던 무마기(巫馬期)와 자천()의 고사가 대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천은 선보를 다스렸다. 그는 앉아 가야금을 타서 울리면서도 그 몸은 당 밑으로 내려오질 않았다. 그렇지만 선보는 잘 다스려졌다. 무마기는 별이 떴을 때 출근하여 별이 떴을 때 퇴근하였다. 낮ㆍ밤을 가리지 않고 한시도 쉼이 없었다. 그리고 몸소 다 돌아다녔다. 그의 노력으로 선보 또한 다스려졌다. 무마기는 자신이 고통스러운 까닭을 복자천에게 물었다. 자천은 대답하였다: “나의 치세방법은 사람에 맡기는 것이요, 그대의 치세방법은 힘에 맡기는 것이다. 힘에 맡기면 수고스럽고 사람에 맡기면 한가롭다.” 복자천은 군자다. 사지를 편안하게 하고 이목을 온전하게 하고 심기를 평안하게 가지니 백관이 모두 의롭게 다스릴 뿐이다. 그는 대세의 법칙에 맡길 뿐이다. 무마기는 그렇지를 못하다. 삶을 피폐롭게 하고 정력을 낭비한다. 수족을 괴롭히고, 정령을 번거롭게 한다. 비록 다스려지기는 해도 이르지 못 함이 있는 것이다.

宓子賤治單父, 彈鳴琴, 身不下堂, 而單父治. 巫馬期, 以星出以星入, 日夜不居, 以身親之, 而單父亦治. 巫馬期問其故於宓子. 宓子曰: “我之謂任人, 子之謂任力. 任力者故勞, 任人者故逸.” 宓子則君子矣. 逸四肢, 全耳目, 平心氣, 而百官以治義矣, 任其數而已矣. 巫馬期則不然, 弊生事精, 勞手足, 煩敎詔, 雖治猶未至也.

 

 

이 고사는 또 같은 내용이 유향의 설원(說苑)에도 실려있다. 사실이 내용은 노자가 말하는 함이 없음의 정치’[무위지치(無爲之治)]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마도 자천(子賤)에 관한 고사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보다 도가적으로 각색되었을 것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공자와 자천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와 유사한 대화가 또 실려있다. 자천이 선보를 잘 다스리니 백성이 잘 따랐다. 공자가 그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하고 물으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가 아버지처럼 섬기는 자는 셋이고, 형처럼 모시는 자가 다섯이고, 벗으로 사귀는 자가 열둘이고, 스승으로 삼는 자가 한 사람입니다.

所父事者三人, 所兄事者五人, 所友者十有二人, 所師者一人.

 

 

결국 자천의 위대함은 임인(任人)’ 한마디에 있다. 사람을 믿고 맡길 줄 안다는 것이다. 도가적 무위의 개념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용인(用人)의 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장의 본지는 이러한 객관적 사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출에는 반드시 축적된 역사의 배경이 있게 마련이며, 돌출한 한 인재의 출현의 배경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의 숨은 공로가 쌓여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것은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의 축적이다. 공자는 그것을 사문(斯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노나라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군자자(魯無君子者)’()’는 가정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그리고 사언취사(斯焉取斯)’에서 앞의 사()는 자천(子賤) 그 사람을 받는 지시대명사이며, 뒤의 사()는 그 사람이 구현하고 있는 덕성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上斯斯, 此人;下斯斯, 此德].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어떻게’ ‘어디서의 뜻으로, 이유를 탐색하는 의문사이다. 선보(單父)는 지금 산동성(山東省)의 선현(單縣)이다. 관습상 단보로 발음하지 아니 하고, ‘선보로 발음한다.

 

 

은 어건(於虔) 반이다. 자천(子賤)’은 공자의 제자이다. 성은 복(, 이라고도 쓴다), 이름은 부제(不齊)이다. ‘사언취사(斯焉取斯)’의 앞의 사()는 이 사람을 사()라고 표현한 것이고, 뒤의 사()는 이 덕성을 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자천은 대저 현인을 존경할 줄 알고 친구를 취할 줄 알아서 그 덕을 이룬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이미 그의 어짊을 찬탄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취하여 이런 덕을 이루었겠는가?” 하셨으니, 이로 인하여 노나라에 현자가 많은 전통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 於虔反. 子賤, 孔子弟子, 姓宓, 名不齊. 上斯斯此人, 下斯斯, 此德. 子賤蓋能尊賢取友以成其德者, 故夫子旣歎其賢. 而又言若魯無君子, 則此人何所取以成此德乎? 因以見魯之多賢也.

 

소동파가 말하였다: “사람의 훌륭함을 칭찬할 때에 반드시 그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관계에 근본하여 말하는 것은 후()함의 극치이다.”

蘇氏曰: “稱人之善, 必本其父兄師友, 厚之至也.”

 

 

() 성은 복()과 같은 글자이며, 복희(伏羲)의 후예이다. 속설에는 한대(漢代)의 금문상서의 조종이라고 할 수 있는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이 복부제의 후손이라고 한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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