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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4. 중궁은 어질지만 말재간은 없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4. 중궁은 어질지만 말재간은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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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중궁은 어질지만 말재간은 없다

 

 

5-4. 누군가 말하였다: “()은 인하기는 한데 말재주가 없습니다.”
5-4. 或曰: “雍也仁而不佞.”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 자주 남에게 미움만 살 뿐이니,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 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거냐?”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은 성()이 염(), ()이 옹(), ()가 중궁(仲弓)이다. 제자적(弟子籍)의 본래 모습을 더 가깝게 전달하고 있는 공자가어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는 옹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염옹은 자가 중궁이다. 염백우의 같은 종족이다. 매우 못난 아버지 밑에서 나서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冉雍, 字仲弓. 伯牛之宗族. 生于不肖之父, 以德行著名.

 

 

사마천의 열전은 염옹의 자가 중궁(仲弓)이라는 정보 이외에 어떠한 새로운 정보도 제공하는 바가 없다. 나머지는 논어에 있는 염옹에 관한 기사들을 짜깁기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염의 나이를 동족인 염구(冉求)와 함께 대략 같은 나이로 본다면 공자보다 29세 연하로 간주될 수 있다. 염백우ㆍ염옹ㆍ염구 이 세 사람이 같은 종족의 사람들로서 노나라 사람들이며, 세 사람 모두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끼었다는 사실은 이미 팔일(八佾)에서 논구한 바와 같다. 염옹은 안연ㆍ민자건ㆍ염백우와 함께 덕행(德行)으로 꼽히었던 것이다.

 

사과십철에 염옹이 덕행으로 꼽히었다는 사실과,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서 염옹을 가리켜 이덕행저명(以德行著名)’이라 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염옹은 분명 덕행이 높은 훌륭한 덕성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전편에 나타나고 있는 염옹에 관한 기사들을 일별하면 제자 해의 기사에서 강조된 의미맥락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제자해에 강조 하고 있는 사실은 그가 못난 아버지 밑에서 나서 컸다는 것이다. 여기 불초지부(不肖之父)’가 어떠한 뜻을 내포하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그 출신이 세속적으로 매우 비천한 가문에 속한다는 뜻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불초지부(不肖之父)란 그 아버지가 1) 세속적으로 지위가 아주 낮은 사람, 혹은 비천한 업종의 종사자, 2) 교양이 없는 사람, 3) 도덕적으로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등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 슬하에서 컸음에도 불구하고 염옹은 매우 훌륭한 덕성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행동 이 매우 덕스러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예사로운 사태가 아니다. 그가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덕행이 뛰어났다는 이 단순한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상기시키는 것이다. 바로 염옹의 모습에는 공자 자신의 실존적 자화상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공자는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덕행의 소유자로 성장했다. 이러한 실존적 결단과 전변의 과정의 투영으로서의 염옹의 모습에서 공자는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염옹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논어전편을 통해 공자의 염옹에 대한 상찬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극단적 예가 바로 옹야1의 상찬이다.

 

 

옹이라는 아이는 남면하게 할 만하다.

雍也, 可使南面.

 

 

이것은 참으로 격상(激賞)이다. 이 남면이라는 말을 두고 주석가들은 보통 대부 자리에 앉을 만하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남면이란 대부 정도의 위치에 쓰이는 말이 아니다. ‘남면은 제후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요, 심하게 말하면 천자의 치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옹()이라는 인격체는 추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웅과 같은 인물이라면 천지를 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의식 속에는 천자라 하는 것이 위대한 덕성의 소유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신분을 뛰어넘는 어떤 추상적 기능으로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 속에 공자의 자화상의 바램이 투영되고 있다고 한다면, 곧 공자 자신이야말로 천자를 해도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자신감이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곧 아사노가 주장하는 바, 니체가 르쌍띠망(ressentiment)’의 투영으로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일까?

 

옹야4에는 공자가 염옹 즉 중궁(仲弓)을 평가하는 매우 심오한 언사가 실려있다. 아주 보통의, 너덜하고 불량한 황소가 낳은 새끼라 할지라도 훌륭한 붉은 털을 갖추고 늠름한 뿔을 갖추었다면, 비록 인간들이 그 새끼소를 무시하려 한다해도, 산천(山川)의 신()들이 과연 그를 버릴손가하는 공자의 반문이 실려있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적색을 숭상하였기에 희생의 제물로서 붉은 기운이 도는 적색털과 완정한 뿔을 갖춘 소를 가장 귀하게 여겼다. 비록 흔해 빠진 보통 황소에게서 나온 비천한 출신의 소라 할지라도 붉은 서기가 감도는 털 과 늠름한 뿔을 갖춘 소라 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비천한 출신의 소라 여겨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연 산천(山川)의 신들이 그를 내버려두겠냐는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희생이 된다는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제물로 바치어지는 가장 영광된 자리에 발탁된다는 바로 그 발탁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를 버릴지라도 신이 그를 발탁할 것이라는 것이다. 출신과 무관하게 인간의 품위와 덕행 그 자체를 존중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신뢰감을 공자는 여기서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철학의 정언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유명한 테제,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는 명제도 바로 공자가 중 궁에게 발한 것이다(안연(顔淵)2).

 

공자가 중궁(염옹)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격정적 톤이 실려있다. 여기 본 장의 어조의 흐름에서도 어김없이 우리는 그러한 공자의 격정을 읽어낼 수 있다. 염옹은 비천한 출신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의 언어습관이 상류사회에서 쓰는 어떤 매끄러운, 멋이 든, 그리고 논리적으로 유창한 엘레강스를 지니지 못한 매우 투박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염옹을 평하면서 공자에게 말하였다. 염옹이 걔는 인할지는 모르지만 말재주가 모자라요!

 

이 말재주가 모자란다는, 무심코 던져진 흔해 빠진 세속적 평어는 공자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 심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분노요 격분이었다!

 

 

야 이놈들아! 그 따위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다 써 처먹겠다는 거냐! 느그들이 말하는 말재주라는 게 기껏해야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입이나 막고, 진정의 유로가 없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피상적으로 흐르게 하고 마는 그따위 솜씨가 아니냐? 그래서 타인의 증오만 불러일으키는 말재주가 아니드냐? 내가 일찍이 그가 인한 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운운한다면 도대체 그따위 말솜씨를 어디다 써처먹겠다는 게냐?

 

 

()’란 막는다는 뜻이다. 남의 입을 막아 곤혹에 빠뜨린다는 뜻이다. 주자는 ()’를 단순히 응답한다(猶應答也)’는 의미로 풀었다. ‘구급(口給)’이란 구변(口辯)’이란 의미와 통한다. ‘()’은 문자 그대로 풀면 재빨리 말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자주라는 부사이다. ‘증어인(憎於人)’남에게 미움을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사실은 공자의 인간평가에 대한 주도면밀함을 읽어 낼 수 있다. 즉 감정적 격분의 순간에도 이성적 냉정함이 공재(共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공자의 말씀의 전체적 맥락은, 분명, 중궁과 같은 비천한 출신으로 덕행이 뛰어난 인물에 관한 세속적 야지에 대한 강력한 옹호의 변론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궁과 같은 인간에 대한 격정적 사랑의 유로(流露)의 순간에도 그 인격체에 대한 교육적 훈계를 빠뜨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 그가 인한지는 알 수가 없으되 도대체 말재주를 어디에 쓰리오[不知其仁, 焉用後]?”

 

여기 부지기인(不知其仁)’이라는 조건적 단서는, 물론 앞에 혹자가 인이불녕(仁而不佞)’이라 평한 말의 맥락을 잇고 있다. 그러나 중궁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시의 순간에도 공자는 중궁에 대하여 인함의 평가를 허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인은 공자에게서 너무도 중요한 최상의 실천덕목인 것이다. 그 인을 쉽게 허여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심도를 더욱 절 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극단의 상찬과 더불어 그 인간이 상달(上達)해야 할 지고의 가치의 모범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인격의 거대함에 직면케 된다.

 

부지기인(不知其仁), 언용녕(焉用佞)?’에 대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해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부지기인(不知其仁)’은 앞의 인이불녕(仁而不佞)’의 맥락을 단 순하게 이은 것으로, ()에 대한 허여ㆍ불허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있고ㆍ없고로 사람을 비판하는 세속적 태도에 대한 혐오감, 극도의 분노를 표현하는 맥락에서 지금 인()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가 인한지는 내 알바가 아니나, 그 놈의 말솜씨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다 써 처먹겠다는 게냐?’라는 표현에서 알 바가 아니라고 한 것은 불허(不許)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지금 주제가 ()’의 문제에 있으므로 ()’을 또 얘기하는 것은 문제의 포커스를 흐릴 수도 있다는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드라마적 구성을 매우 좋아한다. 격분할 줄 아는 공자의 솔직담백한 성격, 그리고 인간의 교활한 언어의 장난에 대한 깊은 혐오감, 그리고 신분이나 출신을 불문하고 인간의 현황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려는 휴매니스트적인 아량, 그리고 애정과 동시에 꺼림의 여백을 남겨두는 차가운 이성적 냉철함, 이 모든 요소들이 짧은 구성 속에 남김없이 노출되어 있는 탁월한 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은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염()이고, 자는 중궁(仲弓)이다. ‘()’은 말 재주[]이다. 중궁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간약하고 과묵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말 잘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으므로, 그가 덕에 뛰어남을 찬미하면서도 그의 말재주가 부족한 것을 흠으로 여기었다.

, 孔子弟子, 姓冉, 字仲弓. , 口才也. 仲弓爲人重厚簡黙, 而時人以佞爲賢, 故美其優於德, 而病其短於才也.

 

은 어건(於虔) 반이다. ()’는 사람을 당()하여 상대한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응답(應答)한다는 것과 뜻이 같다. ‘()’은 말 잘하는 것[]이다. ‘()’은 미움을 사는 것이다. 이 장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말 잘해서 도대체 어디에다 써먹자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말재주가 좋은 사람[]이 타인들에게 응답을 잘하는 까닭인즉, 단지 아가리에서 약삭빠르게 변론하여 이기기를 취할 뿐이요, 내면의 정감이나 실체가 없어 공연스레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일만 많을 뿐이다. 나는 중궁이 인한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으나, 그의 말재주 없음이 바로 그의 훌륭한 점이요, 흠이 될 것이 없다 하시며 언용녕(焉用)’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깊게 깨우치려 하심이다.

, 於虔反. , 當也, 猶應答也. , 辨也. , 惡也. 言何用佞乎? 佞人所以應答人者, 但以口取辨而無情實, 徒多爲人所憎惡爾. 我雖未知仲弓之仁, 然其不佞乃所以爲賢, 不足以爲病也. 再言焉用佞, 所以深曉之.

 

 

21세기를 접어들면서 한국의 정치는 헛말이 난무하는 양상을 계속 과시하고 있다. 최고의 지도자로부터 고급관리들, 여야를 막론한 정당지도자들이 여기서 말하는 구재(口才)를 과시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취변(取辯)키만 하고 내면의 정실(情實)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헛말이 국민들의 가치관을 오도시키고 국가가 걸어가야 할 정도에 관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그야말로 ()의 정치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논어는 옛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는 서구 정치학의 이론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지도자가 말 한 마디를 어떻게 하는가, 그러한 구체적 사례에 즉하여 모든 것이 진실하게 논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국가비젼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막중한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가 말 한마디를 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하게 할 줄 아는 것은 그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이다. 정치 이론이나 경제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리더십 트레이닝의 교육과정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가정이나 사회나 학교제도가 지도자를 양성시키는 소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지도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도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태와 동일한 세태가 전개되고 있었 다. 국군은 부실했고 삼환(三桓)의 참월은 극에 달했다. 공자는 제자 중궁의 경우를 빌어 세태를 탄하고 있는 것이다. ()의 정치로부터 인()의 정치로! 이것 이 공자의 분노 서린 외침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나라야말로 영의 정치를 버리고 인의 정치로 전력 질주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의심하여 말한다. 중궁이 그토록 훌륭한 사람인데 부자께서 그 인을 허여하지 않으심은 어째서인가? 나 주희는 말한다: “인의 도()는 지대(至大)하여 그것을 온전하게 체득하여 지성불식하는 경지에 이르지 아니한 자는 도저히 인에 당(: 꼭 들어맞는다)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안연과 같은 아성(亞聖)의 경지로도 3개월을 넘어가면 인에서 어긋남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6-5 참조), 하물며 중궁이 비록 어질다고는 하나 안자에는 미치지 못하니, 성인께서는 진실로 가볍게 중궁에게 허여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或疑仲弓之賢而夫子不許其仁, 何也? : 仁道至大, 非全體而不息者, 不足以當之. 如顔子亞聖, 猶不能無違於三月之後; 況仲弓雖賢, 未及顔子, 聖人固不得而輕許之也.”

 

 

공자에게 있어서 인의 실천의 어려움과 예수에게 있어서의 천국의 실현의 어려움은 비슷한 과제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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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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