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한다거나 인도 전역을 통일하려 애쓴 제국이 없었다.
여기에는 지리적인 요인도 크다. 중국 대륙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 중심이 있으나 인도 아대륙의 한복판에는 중원 같은 벌판은커녕 거대한 덩치의 데칸 고원이 사방의 교통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인도에는 고대부터 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가 발달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제국이라 해도 남인도까지 강역으로 포함하지는 못했다【인도 역사를 지역으로 구분하면 북인도와 남인도, 그리고 데칸 고원에 자리 잡은 소국가들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역대 통일 제국이나 큰 세력을 떨친 왕조들은 주로 북인도를 지배했고, 그에 비해 남인도는 비교적 독립적인 역사를 꾸렸다. 데칸 고원을 활동 무대로 하는 소국가들은 북인도와 남인도의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탓에 남북 방향의 교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정치적인 통합은 없었다】.
그래도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인도 반도 남단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파키스탄이 분리된 오늘날의 인도보다도 컸다. 이것은 마우리아가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마가다 왕국 시절에 축적한 부와 문물, 제도를 바탕으로 삼아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에 이어 그 손자인 아소카(Asoka, ?~기원전 238) 왕의 치세에 마우리아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인도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군주로 꼽히는 아소카는 젊은 시절 군사력을 앞세운 정복 전쟁을 많이 벌였다. 그러나 기원전 261년의 칼링가 전투에서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는 비극을 겪고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 진정한 정복은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법(dharma, 불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후 그는 군대 지휘관들을 종교 사절단으로 만들었으며, 비폭력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펼쳤다. 또한 그 자신부터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수많은 불탑과 성지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 등을 건축했다.
피비린내 풍기는 ‘정복왕’으로 역사에 남을 뻔한 아소카 왕은 불교를 접한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뿐 아니라 불교를 세계 종교로 확립한 군주로 길이 남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백성들에게 굳이 불교를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포교 활동에는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당시까지 북인도에서만 발달했던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가 믿고 포교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였기 때문에 널리 해외에까지 전파되었어도 본격적인 포교 종교로 발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 아소카 왕의 석주 만년에 들어 불교에 심취한 아소카 왕은 불교 성지에 10여 개의 석주를 남겼다. 이 석주들에는 아소카 왕의 조칙이 새겨져 있는데,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사자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이 석주는 그중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영토는 넓었지만 마우리아 제국 전역이 황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우리아의 통치 방식은 옛 마가다 왕국의 영토만 황제의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었다. 각 지방에는 정기적으로 순회 감사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전반적으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총독들 간의 연락 시스템을 통해 국가 조직이 운영되는 식이었으므로 일종의 종주국 속국과 같은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상비군과 재판권, 관리 임면권, 조세제도 등을 중앙에서 관리한 점에서는 분명히 제국이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의 진(秦)ㆍ한(漢) 제국과 같은 중앙집권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중국의 통일 제국과 달리 문자나 화폐의 전국적인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배자는 당연히 통일을 원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 마우리아의 유적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위와 같은 석조 건축이 상당히 발달했다. 마우리아는 서쪽으로 펀자브, 동쪽으로 벵골을 넘어 지금의 미얀마에 이르는 강역을 구축해 오늘날의 인도보다 영토가 넓었다. 그러나 이름만 제국이었을 뿐 중앙집권이 미약한 탓에 ‘속 빈 강정’과 같았다.
이렇게 중앙집권이 미약했으므로 아무래도 황제의 능력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아소카 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리아 제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해체되었다. 법에 의한 통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의 군사력은 크게 저하되기도 했지만, 아소카 왕의 후계자들은 더 이상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마우리아의 군 사령관이던 푸샤미트라(Puhsyamitra)가 마지막 황제를 살해하고 숭가(Sunga) 왕조를 여는 것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은 신고식만 치른 채 역사의 문을 닫았다【나중에 보겠지만, 인도의 왕조들은 대체로 시작과 끝이 중국에서처럼 분명하지 않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전 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과정이 마치 문을 닫고 여는 것처럼 명백하지만, 인도의 역대 왕조들은 그렇게 분명한 바통 터치가 없다. 그렇게 보면 인도 역사에서는 어느 왕조가 ‘멸망’했다는 것보다 ‘쇠퇴’, ‘분열’, ‘해체’ 같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 인도와 접촉한 로마 황제 이탈리아에 있는 유명한 트라야누스 개선문이다. 쿠샨 왕조는 마우리아 제국과 달리 대외 교섭 활동이 활발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도 사절단을 보냈다. 이렇게 교류가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쿠샨 왕조에서 대승불교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의 분열기를 겪게 되는데, 이 긴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분열된 상황에다 정치적 구심점조차 없었던 탓에 이 시기 인도에는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다. 그가 잠시 펀자브를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의 일부는 아예 인도의 서북부에 눌러앉아 그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kanva) 왕조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계 민족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일찍이 아소카 왕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대월지)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흥하고 있었다. 박트리아는 펀자브 지방을 지배하면서 한때 북인도의 중앙부까지 영향권으로 거느렸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급격한 민족이동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의 세력 판도는 크게 변하게 된다. 발단은 중국의 한 무제다. 무제의 압박 정책으로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대월지를 밀어낸 것이다. 대월지는 또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고 있던 이란계 유목민족인 사카족(saka)을 밀어냈다. 졸지에 터전을 잃은 사카족은 인도 쪽으로 남하해 그곳에 있던 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이런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 끝에 사카와 파르티아는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한편 멸망당한 박트리아에서는 쿠산족(Kushan, 인도인들은 대월지를 쿠샨이라고 불렀다)이 일어났다. 쿠산의 카드피세스 1세는 인근 부족들을 통합해 세력을 키우고, 파르티아를 서쪽으로 밀어붙여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쿠샨 왕조를 열었다. 이리하여 1세기 무렵에는 인도 서쪽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방에는 파르티아가 자리 잡고, 인도 서북부와 북인도는 쿠샨이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다.
쿠샨 왕조는 2세기 중반 카니슈카(Kanishka)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카니슈카 왕은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인도의 상당 부분까지 손에 넣어 거의 통일 왕조에 맞먹는 강역을 구축했다. 특히 그는 정복 사업뿐 아니라 불교의 진흥에도 열심이었으므로 제2의 아소카라고도 불린다. 그는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표준 이론을 세우기 위해 카슈미르에서 최초의 불교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대승불교의 교리는 훗날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역사 교과서에는 아소카가 소승불교를 전파하고 카니슈카가 대승불교를 확산시켰다고 나오지만, 아소카의 시절에는 어차피 소승불교밖에 없었다. 실은 소승불교라는 명칭도 없었는데, 훗날 대승불교파가 기존의 불교를 경멸하는 의미로 소승불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승’은 수레라는 뜻이다). 소승불교는 부처를 신이 아니라 성불(成佛)한 존재, 인간의 궁극적 단계인 열반에 도달한 존재로 본다. 불교는 원래 이런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아소카 시절에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면서부터는 정식 ‘교단’으로서의 성격이 필요해졌다. 개인적 수양만 강조하는 무신론으로 교세를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후에는 부처를 신의 화신으로 섬기는 대승불교가 발달했다(여기에는 헬레니즘으로 인한 그리스 다신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토착 다신교인 힌두교와 맞서면서 자연스럽게 불교가 유신론으로 발달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며, 중생을 제도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원래 불교의 교리와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불교가 체계적인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대승불교의 덕분이 크다】.
쿠샨 왕조는 통일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마우리아 제국보다 한층 확고한 기반을 갖춘 데다 인도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린 나라였다. 특히 수도인 페샤와르(Peshawar)가 있는 간다라 지방은 동서 문명이 융합하는 중심지였다. 때마침 2세기경에는 로마 제국의 국경이 동쪽으로 시리아까지 확장되어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뿌린 헬레니즘의 씨앗이 개화할 조건이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화폐에는 그리스 신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며, 이란계 군주의 이름, 심지어 로마 황제의 칭호도 등장한다. 또한 쿠샨은 동쪽으로부터 중국 문화도 받아들였다. 쿠샨의 왕들은 중국 황제처럼 ‘천자’를 자칭할 정도였으니,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꽤나 부러워했던 듯하다.
쿠샨 왕조가 지속적으로 발전했더라면 마우리아를 능가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서 문물의 활발한 교류는 쿠샨에 약도 되었지만 병도 가져왔다. 지리적 요충지에 있다는 것은 자체의 힘이 강할 때는 중심이 되지만 약할 때는 남의 먹잇감이 될 따름이다. 3세기 초반 쿠샨 왕조는 파르티아를 대신해 일어난 강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멸망당하고 만다. 이후 인도 전역은 약 100년 동안 다시 수많은 소국가로 분열되었다가 굽타 왕조에 의해 재통일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한 번 뿐이고 무척 길었지만, 인도판 춘추전국시대는 짧으면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 안드라의 불교 미술 북인도에 쿠샨 왕조가 강성할 무렵 데칸과 남인도에는 안드라의 사타바하나 왕조가 있었다. 남인도는 북인도처럼 외부의 침입이 잦지 않았던 덕분에 왕조 교체가 비교적 빈번하지 않아 사타바하나는 3세기까지 존속했다. 위 탑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와 조상 들을 보면 당시 불교 미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2.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쿠샨 왕조가 무너진 이후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분열 상태를 해소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마우리아의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와 이름이 같기에 보통 1세라는 말을 붙여 구분한다). 그는 320년 소국가들을 통일하고 굽타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지주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 귀족인 리치비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하고 이후에도 그 혈연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면 원래는 변변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는 쿠샨 왕조 때 생겨난 ‘마하라자 드히라자(maharia dhirajs,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한 왕조의 건국자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활동은 전 왕조를 타도하는 데 투입되므로 새 나라에 관해서는 명패만 만든 업적에 그치게 마련이다. 찬드라굽타도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을 세운 데 불과했고, 신생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사람은 그의 아들인 사무드라굽타였다.
사무드라굽타는 인도 역사상 보기 드문 탁월한 정복 군주였다. 그의 정복 활동으로 굽타는 벵골에서 인더스 하류 지역까지 북인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남인도와 데칸 지방의 소국들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 사무드라굽타의 치세에 이르러 굽타 왕조는 이전의 쿠샨 왕조와 달리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제법 갖추었으나, 진정한 제국에 어울리는 중앙집권은 역시 미약했다.
사무드라굽타에 뒤이어 찬드라굽타 2세, 쿠마라굽타 등 유능한 군주들이 계속 출현하면서 굽타의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찬드라굽타 2세는 오랜 숙적이던 사카족을 완전히 제압하고 서부의 국경을 튼튼하게 안정시켰다. 또한 쿠마라굽타는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족의 침입을 물리쳐 다시는 그들이 인도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여기서 잠깐 중국 대륙의 북방을 고향으로 하는 유목민족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 지역적으로 이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중국 북쪽 몽골 출신으로는 흉노(훈족)와 돌궐(튀르크)이 있으며(이들은 별개의 민족이라기보다 시대에 따라 중국 역사서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렸을 뿐이다), 중국 동북쪽 출신의 민족은 랴오둥의 거란과 만주의 여진이 대표적이다. 거란이나 여진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데, 아주 옛날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로 강적을 만나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흉노의 남하를 간신히 막은 굽타 제국은 이후 쿠샨, 사산 등의 민족들에게 서부 변경을 계속 침탈당하면서 100년 동안이나 잦은 전쟁에 시달렸다. 그나마 전성기에는 유능한 군주들이 미약한 중앙집권을 보완해주었지만, 쿠마라 굽타 이후에는 그런 행운도 계속되지 못한다. 결국 굽타는 점차 추락하다가 5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굽타가 멸망한 뒤 또다시 100여 년 동안 인도는 분열과 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벌써 몇 번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지 모를 일이지만 또다시 통일은 이루어졌다. 난립하던 소국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르다나(Vardhana) 가문의 하르샤(Harsa, 590년경~647년경)였다. 그는 606년에 즉위해 카슈미르와 네팔, 발라비 등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북인도를 평정했다.
인도 역사에서는 특이하게도 정복 군주일수록 학문에도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소카, 카니슈카, 사마드라굽타 등이 모두 그랬는데, 하르샤도 같은 유형의 군주였다. 그는 종교와 문학에 관심이 컸고 직접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굽타 제국의 재현을 꿈꾸었던 바르다나 왕조는 하르샤가 암살당하면서 급격히 몰락한다. 언제 통일이 되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도는 예의 수많은 소국이 공존하는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역사는 통일 제국의 시대가 기본이고 분열기가 사이사이에 잠깐씩 존재했다면(그래서 분열기에는 다들 통일을 지향했다), 인도의 역사는 그 반대로 특별한 중심이 없는 분열기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따금씩 통일 왕조가 들어서는 양상이었다.
▲ 굽타의 성 문화 굽타 시대에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위 그림은 당시에 젊은이들에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간행된 『카마수트라』의 한 장면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교육용 서적인 셈이다.
가장 인도적인 제국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이민족의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이미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우리아부터 굽타에 이르기까지 그 점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을 면치 못했어도 학문은 전에 없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은 당시에 세계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 체계와 십진법은 사실 인도의 것을 아랍 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한 것이었으니 근원을 찾자면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인도 숫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십진법은 로마 숫자 체계에 비해 훨씬 간편했다. 예를 들어 십진법에서는 78이라고 간단히 표기할 수 있는 숫자도 로마 숫자로 표기하면 LXXVIII라는 길고 복잡한 기호가 된다).
▲ 인도의 숫자 인도는 흔히 종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고대 인도에는 과학도 상당히 발달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아라비아숫자 체계는 사실 아라비아인들이 인도숫자를 가져다 서양에 소개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숫자들의 모양에서도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굽타 시대는 산스크리트 문학의 전성기였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오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도의 고유한 문화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식적인 운동의 소산이었다. 굽타 왕실이 앞장서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와 산문을 적극 장려했던 것이다. 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타(Mahabarata)』는 이 시기에 정리된 산스크리트 문학의 정수다.
앞에서 보았듯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탄생한 간다라 양식은 부처를 형상화하면 안 된다는 미술의 금기를 깨주었다. 그 덕분에 불상의 조각이 자유로워졌고 종교 미술도 크게 성행했다. 수많은 불상과 힌두 신상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고, 동서양의 양식과 기법이 혼합되어 독특한 예술이 찬란하게 만개했다. 안타깝게도 그 상당 부분은 흉노의 침입과 이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기에 파괴되었다【10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인도를 지배하던 시대에 인도의 전통적인 문화 유적과 유물이 대거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이슬람교가 일신교이기 때문이다(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 세력에 의해 파괴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이 하나라고 믿는 일신교는 신앙 자체로야 누가 뭐라 할 수 없지만, 자칫하면 독선적이고 교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그래서 일신교에는 다신교에 없는 난폭하고 무지한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가 있다), 대표적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한다. 그러나 ‘우상‘의 규정이 모호한 탓에 다른 문화나 종교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배척할 수 있다는 위험이 늘 존재한다. 그것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다】.
다행히 아잔타와 엘로라 등지의 석굴 사원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비단길의 둔황 석굴도 굽타 시대 인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 날란다 사원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 사원은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다에는 해외의 구법승들이 많이 찾아와서 불법을 배우고 토론했다.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종교 분야에서 볼 수 있다. 아소카 시절 이후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발달해왔다. 하지만 그런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브라만교, 즉 힌두교 때문이었다(자이나교도 있으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도를 유지했을 뿐 교세가 불교와 힌두교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역대 제왕들은 대개 불교를 장려하고 포교에 힘썼으나 수천 년에 걸쳐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힌두교를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불교의 보급에 앞장선 바르다나의 하르샤 치세에는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Nalanda) 사원이 불교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날란다는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 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다에는 해외의 구법승들이 많이 찾아와서 불법을 배우고 토론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한 당의 고승 현장(玄奘)도 날란다에 유학했으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으로 유명한 신라의 혜초(慧超)는 날란다에서 이미 전에 다녀갔던 한반도 승려들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성행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굽타 시대는 모든 분야에서 인도 고유의 전통이 부활하는 시기였다. 이 흐름을 타고 전통의 힌두교가 널리 퍼지면서 신흥 종교인 불교는 차츰 위축되었다. 그렇잖아도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힌두교와 상당 부분 비슷해졌으므로 초기의 참신성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되자 불교보다 다신교인 힌두교가 포교에 더욱 유리해졌다. 힌두교의 3신인 브라마, 비슈누, 시바를 비롯한 수많은 신이 신상으로 만들어져 일반에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는 점차 인도 내에서 세력을 잃고 동쪽의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로 옮겨갔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후한 시대의 일이지만, 인도의 굽타 시대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불교가 크게 성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에도 바로 그 무렵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 불경을 짊어진 현장 날란다의 유학생 현장은 이렇게 불경을 잔뜩 짊어지고 당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 태종의 명을 받고 자신이 겪은 여정을 『대당서역기』로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비단길 주변에 있는 138개국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귀중한 문헌으로 꼽힌다.
3.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굽타 제국이 붕괴한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또 다시 인도의 고질병이 도졌다. 특별한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들이 공존하는 분열의 시대다. 다행스런 것은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강적이었던 흉노는 인도 남하를 포기하고 터키와 유럽으로 가버렸다. 비록 소국가들 간의 충돌과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세계 무대는 땅 밑에서 용암이 막 분출되려는 듯한 기세였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중세 사회가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대륙 북방의 몽골족이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사의 흐름은 13세기부터 시작되는 몽골의 세계 제국과 동서 교통, 유럽의 대항해시대라는 일련의 흐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사적 격변의 분위기는 인도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장기간 이민족의 침입이 없었던 탓에, 굽타 제국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태평성대는 경제와 정치가 반비례하게 마련이다. 경제가 발달해 생활수준은 풍족해졌으나 정치조직은 거의 발전이 없었다. 당연히 통일 제국에 대한 염원은 굽타나 쿠샨 시대보다도 희박해졌다.
이 시대에 딱히 중심이 될 만한 세력을 꼽자면 라지푸트(Rajput)가 그 후보다. 이들은 원래 5~6세기경에 인더스 하류 지역으로 들어온 이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백 년이 지나면서 토착민과 뒤섞이고 인도 문화에 동화되어 실상 이민족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종족적으로 잡다해진 탓에 라지푸트는 하나로 통합되어 살아간 게 아니라 여러 소국가로 분열되어 서로 간에도 다툼이 잦았다. 하지만 이들은 때마침 찾아온 인도의 평화기에 북인도의 중심 세력으로 발돋움했으므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는 ‘라지푸트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 아라비아 해상무역 원래 인도양은 아라비아 무역상들의 텃밭이었다. 그들은 위와 같은 목선을 타고 남인도와 지중해 세계를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남인도가 발달하면서 아라비아 무역상들은 점차 밀려나고, 남인도의 인도양 연안 국가들이 인도양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까지의 해상무역을 제패하게 되었다.
남인도 역시 여러 소국가가 분립된 형세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 중에서 촐라(Chola) 왕조는 주목할 만하다. 1세기경 조그만 부족으로 출발한 촐라는 굽타 제국이 북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했으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에는 여러 속국을 거느리면서 일약 남인도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특히 촐라의 걸출한 군주인 라젠드라 1세(Rajiendra I, ?~1044)는 11세기 초반 데칸의 패자였던 찰루키아(Calukya)를 정복하고 중부 인도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에도 그는 북진을 계속해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 인도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이때가 굽타제국의 사무드라굽타 이래 두 번째 맞는 남북 인도의 대통합 기회였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통일 대신 라젠드라 1세는 해상 활동에 주력했다. 원래 남인도는 반도라는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남인도의 해상무역은 서쪽으로 아라비아와 지중해권, 동쪽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이르는 가히 세계적인 규모였다. 남인도의 무역상들은 이미 로마 제국 시대에 후추와 향료, 진주, 보석 등을 유럽에 수출했다(오늘날 인도에서는 당시 로마가 무역 대금으로 지불한 로마 금화들이 발견되고 있다). 4세기 중반에 남인도의 판디아(Pandya) 왕국은 당시 로마 황제인 율리아누스에게 사절을 파견한 일도 있었다.
8세기부터 서부의 말라바르 해안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에 종사했는데, 촐라 왕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남인도 무역을 독점했다. 이렇게 보면 라젠드라의 위업은 군주 개인의 공로라기보다 수백 년간 촐라 왕조가 무역에 기울인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라젠드라의 시대부터 유럽과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의 해상무역로는 촐라의 독차지가 되었다. 이때의 해상로는 이후 유럽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향료 시장과의 직거래에 나서면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상인들이 퍼뜨린 종교 이슬람교가 6세기에 생겨나 순식간에 세계종교로 성장한 과정은 세계사적인 수수께끼다.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라는 가르침 덕분일까? 아니면 아라비아에서 생겨나 서쪽으로 간 그리스도교와 인도에서 생겨나 동쪽으로 간 불교 사이의 ‘종교적 공백’을 잘 이용한 덕분일까? 이슬람교가 급속히 퍼진 데는 활발한 정복 전쟁도 큰 몫을 했지만, 아라비아 상인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예로부터 동서 교역에서 활약을 한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슬람교는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평화와 안정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변화에 무뎌진다. 인도는 결국 오랜 기간 평화(아울러 정체)를 누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1세기부터 북인도에는 그전의 어느 이민족보다도 더 강하고 무자비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이슬람 세력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가즈니(Ghazni) 왕국의 마흐무드(Mahmud) 왕은 펀자브의 비옥한 영토를 노리고 북인도에 침입했다. 그는 재위 시절에 10여 차례나 인도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렵고도 끔찍한 원수였다. 오랜 평화에 나태해져 있던 인도군은 이슬람군의 빠른 기동력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에는 원래부터 양질의 말이 태부족이었고 인도군은 전통적으로 코끼리를 애용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기동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유서 깊은 인도의 불교 사원과 힌두 사원들이 이슬람군의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당시 사원들은 재물과 귀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적의 주요 표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군주들은 이슬람 문화가 아니면 모조리 파괴해야 할 불경스런 우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침략은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인도를 지배하려 한 게 아니라 단지 노략질을 했을 뿐이지만, 12세기 말부터 시작된 주제곡은 서곡과 분위기부터 크게 달랐다. 그 지휘자는 1150년 가즈니를 타도한 구르(Ghur) 왕조의 무이즈-웃-딘 무함마드(Muizz-ud-Din Muhammad)였다. 그는 마흐무드와 달리 인도를 완전히 정복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마흐무드가 처음 인도를 침략했을 때 이미 인도의 실력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무함마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자신감을 품을 만했다. 무함마드는 13세기 초반 마침내 라지푸트를 격파하고 북인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야망은 꿈으로 그쳤다. 제국을 건설하고 얼마 못 가 암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무함마드의 총애를 받으며 무장으로 활약하던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Quṭb - ud - Dῑn Aybak, ?~1210)가 술탄에 올랐다. 상관의 꿈은 그에게서 실현되었다. 아이바크는 델리를 수도로 삼고 정식으로 북인도를 지배하는 정복 국가를 선포했다. 그는 원래 궁정 노예 출신이었으므로 그가 세운 국가를 노예 왕조(1206~1290)라고 부른다. 한 왕조가 100년 가까이 존속한 것은 중세 후기 인도에서 기록적인 사건이다.
이후 노예 왕조는 터키계의 칼지(khalji)에 정복되었고, 칼지는 또 투글루크(Tughluq)에게 정복되었다. 이런 식으로 15세기 전반까지 200년 동안 북인도는 터키와 아프가니스탄 세력이 번갈아가면서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델리를 중심으로 했고, 예전처럼 소국가들이 분립한 시대와 달리 서로 같은 시대에 공존한 게 아니라 대체로 정복을 통해 맞교대했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총칭해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분열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일 국가가 지배한 시대라고 보기에도 어정쩡하다. 그래도 북인도의 패자가 된 델리 술탄국은 내친 김에 데칸과 남인도에까지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남인도의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가 사력을 다해 저지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이때 비자야나가라가 무너졌다면 인도는 일찌감치 전역이 이슬람권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인도까지 통합하지 못한 데다 라지푸트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소국가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델리 술탄국은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었을 뿐 제국과 같은 전일적인 지배를 관철한 것은 아니었다.
남인도는 힌두권으로 남았으나 북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 문제는 어땠을까? 그간 이민족의 침입은 많았어도 이번처럼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지고 들어온 이민족은 없었다. 불교가 인도를 떠난 굽타 시대부터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는 늘 힌두교였다. 평소에 이교도를 대하는 이슬람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교가 다를 때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슬람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전제정치를 행하지 않는가?
▲ 인도의 후추 인도 남부에서는 오래전부터 후추를 재배했으나 유럽인들은 당시 향료의 원산지를 그냥 인도라고만 알았을 뿐 정확한 위치를 몰라 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매우 비싼 값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4세기에 오스만튀르크가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하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한 탓에 향료의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아라비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오는 뱃길은 북이탈리아가 중개무역을 독점했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했다). 동방의 향료가 이탈리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서유럽의 실수요자에게 왔을 때는 원래 가격의 30배로 치솟았다. 그래서 대서양에 인접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들은 동양에 가기 위해 아프리카를 통째로 돌아가는 바닷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예상을 거스른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온 이민족 정권인지라 델리 술탄국의 나리들은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배층은 하나로 뭉쳐 인도를 지배하는 데 힘쓴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술탄들은 모두 전제 군주였으나 중국의 경우처럼 세습되지 않고 주로 무장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자고 나면 암살로 정권이 바뀌는 일도 대단히 흔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침입과 지배로 북인도는 수많은 문화재만 잃었을 뿐 정치나 행정의 쇄신은 거의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에 대한 통치도 상당히 느슨했다. 지배층이 이슬람인 만큼 피지배층에게도 서서히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지만 다수의 백성들이 개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소수의 이슬람교도를 위해 다수를 차별하기에는 권력의 짜임새가 부족했다. 따라서 정부가 비이슬람교도에게서 특별 세금을 징수하는 지즈야(Jizya, 일종의 인두세로 19세기까지도 존속했다)라는 제도를 시행한 것 이외에 별다른 종교적 차별을 하지는 않았다. 이슬람 교리도 이슬람 본토에서만큼 엄정하게 지켜지지는 않았고 힌두 고유의 전통이 강력히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율법에 순장(旬葬)의 풍습은 죄악이었지만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카스트 제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훗날 인도를 식민지로 경영하게 된 영국이 인도의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순장의 풍습은 법으로 금지되어 사라졌다. 그것은 근대 영국이 중세 이슬람보다 인도주의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8세기와 14세기의 시대적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도 카스트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오늘날 카스트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현실에서는 잔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이 델리 술탄국으로 인도를 처음 지배한 경험은 후대의 인도 역사에서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낳는다. 하나는 16세기에 강력한 무굴(Mughal) 제국이 들어선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드디어 인도는 이슬람 세력과 힌두 세력으로 아예 나라가 갈라진다는 사실이다.
4. 최초이자 최후의 제국
다양한 매력의 지배자
16세기 초반 아프가니스탄계의 로디(Lodi) 왕조가 델리 술탄국의 맥을 잇고 있을 무렵, 우즈베크 출신의 한 영웅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칭기즈 칸의 16대손이자 중앙아시아의 ‘칭기즈 칸’이었던 티무르(Timur, 1336~1405)【티무르는 14세기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지배자인데, 인도사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므로 여기서 간단히 살펴보자. 몽골이 중앙 아시아에 수립한 차가타이 칸국이 와해되자(7장 참조) 티무르는 그 혼란을 수습하고 몽골 제국의 후예로 자처했다(물론 종교와 문화는 이슬람이다). 뛰어난 정복자였던 그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남 러시아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1405년 그가 병사한 뒤 후손들이 제국을 분할했는데, 이것을 총칭해 티무르 왕조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이 16세기까지 지속되는 가운데 바부르가 등장한 것이다】의 5대손을 자처하는 그는 바로 바부르(Babur, 1483~1530)라는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이나 티무르의 후예로 자처한 것은 정통성을 표방하려는 정치적 태도로 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자손이 워낙 많았으니 바부르가 그들의 후손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튀르크계의 족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패자가 된 바부르는 원래 티무르 제국을 재현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디 왕조의 허약함을 깨닫게 된 그는 방침을 바꾸어 중앙아시아보다 인도 정복에 매력을 느꼈다. 1526년 바부르는 델리 근방에서 뛰어난 용병술과 기병대로 수적으로 훨씬 많은 로디 군대를 무찌르고 델리에 입성했다.
북인도의 지배자들은 선선한 기후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살던 바부르가 인도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칭기즈 칸의 후예라면 인도를 정복의 최종 목적지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바부르는 점령지 곳곳에 페르시아식 정원을 만들고 더위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인도에 그냥 눌러 앉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도 역사상 최후의 제국으로 기록될 무굴 제국이 탄생했다.
바부르의 무굴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간다라를 포함해 데칸 고원의 일부, 동쪽으로는 벵골에까지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인도 지역에 국한한다면 고대의 마우리아나 쿠샨, 굽타보다 통일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약하겠지만, 북인도만을 놓고 따지거나 그 북쪽의 중앙아시아까지 포함시킨다면, 무굴 제국은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 제국일 것이다. 게다가 수명도 중세 이후 어느 인도 왕조보다 긴 200여 년에 달했다.
바부르는 파괴적인 정복자일지언정 적어도 무지한 정복자는 아니었다. 정원에 심취한 데서 보듯이 심미안을 가진 지배자였으며, 문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산문을 즐긴 팔방미인이었다. 튀르크어로 된 그의 저서 『바부르의 회상』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학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무굴 제국은 건국자인 바부르가 돌연히 사망하면서 하마터면 단명 왕조로 끝날 뻔했다. 새 제국이 아직 충분히 안정되지 못했을 때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Humayun, 1508~1556)은 신흥 세력의 우두머리인 셰르 칸 수르(Sher Khan Sur, 1486~1545)에게 패배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아났다. 아버지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후마윤은 각지를 떠돌며 지원을 부탁하는 처지로 전락했다【후마윤이 스물두 살 무렵 중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바부르는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대신 가져가라고 탄원했다. 과연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아들의 병이 나은 대신 아버지가 몸이 쇠약해져 죽은 것이다. 그때 바부르는 아직 쉰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으니 신생 무굴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는 아들보다 아버지가 살았어야 한다】.
한편 델리를 정복한 셰르 칸 수르는 황제로 자칭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계 델리 술탄국을 복구하려 했다. 그는 북인도를 지배하는 5년 동안 화폐를 통일하고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토지조사와 대규모 도로 건설을 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개혁조치도 단행했다
셰르 칸 수르의 통치가 제대로 이어졌더라면 무굴 제국은 이후 인도 역사에서 한 문단으로 정리되고 대신 아프가니스탄 제국이 한 개 장 정도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위 있는 건국자가 죽으면 정세가 혼탁해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가 죽으면서 아프가니스탄 제국은 급격히 무너졌고, 마음을 고쳐먹은 무굴의 후마윤이 재도전 끝에 델리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후마윤의 아들인 아크바르(Akbar, 1542~1605)의 시대에 무굴은 제국의 기틀을 갖추고 장기적인 번영과 안정을 이루게 된다.
▲ 정원을 좋아한 바부르 바부르는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왕국에서 순식간에 국력을 키워 북인도까지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세운 흥미로운 인물이다. 무굴(Mughul)이란 바부르의 부족 이름으로서 몽골(Mongol)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바부르는 몽골의 후예일 텐데, 역사책에는 튀르크계라고도 되어 있다. 실상 흉노, 돌궐(튀르크), 몽골은 시대마다 이름이 달라졌을 뿐 모두 중국 북방을 고향으로 하는 민족이다. 몽골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이후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지배를 거치면서 돌궐족과 몽골족이 혼혈을 이루었는데, 무굴의 바부르는 바로 그 혼혈 출신일 것이다.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
아크바르는 155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무굴 제국을 크게 발전시킨 탁월한 군주다. 무굴 제국 초기만 해도 라지푸트족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델리까지 위협하는 이들을 복속하지 않고서는 제국이 반석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지푸트와 격전을 벌여 제압했다. 거기서 그쳤다면 아크바르는 평범한 군주에 머물렀을 텐데, 과연 그는 싹수가 달랐다. 힘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는 그들을 포용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폭넓게 등용한 것이다.
아크바르가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치적 효과는 매우 컸다. 북인도의 전통적인 지배층이자 상류층인 라지푸트를 제압하고 동화시키자 이내 나머지 인도인들도 뒤따르게 되었다. 나아가 아크바르는 라지푸트의 공주와 결혼해 혈연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인도인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 동화시키는 정책이 바로 무굴과 델리 술탄의 중요한 차이였다. 이로써 아크바르는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모든 인도인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무굴 제국이 그 이전의 어느 왕조보다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더 충실히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아크바르의 공로 덕분이었다. 인도 역사에서 제국의 명칭을 가진 나라는 몇 개 있었어도 다 명칭만 그럴 뿐 명실상부한 제국은 없었다. 아크바르의 치세에 이르러 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제를 갖춘 제국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제국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수적이다. 그 점에서 아크바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단지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참다운 황제가 되지는 못한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인도의 황제라면 권력의 정점인 동시에 ’신성한 존재’여야만 한다. 고대부터 종교적 심성이 강한 인도 특유의 정서를 고려한다면 단순히 무력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모든 인도인에게 강력한 전제군주로 군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 문제가 중요했다. 국민을 다른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점을 깨달은 아크바르는 이슬람교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를 절충하는 정책을 폈다. 무굴 제국은 집권자나 지배층이나 이슬람교를 근본으로 출범했는데, 어떻게 그런 절충이 가능했을까? 아크바르는 전제군주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즉 종교적으로 부족한 측면을 정치적으로 보완한 것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에서 멋지게 버텨냈다. 심지어 그는 지즈야(jizyah)도 폐지해 완전한 종교적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다(하지만 지즈야는 곧 부활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무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제군주는 최고 권력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슈퍼맨은 아니다. 그래서 중앙집권적 제국은 황제의 권위와 더불어 관료제가 필요하다. 아크바르가 도입한 관료제는 만사브다르(mansabdār, 만사브는 ‘관직’이라는 뜻의 아랍어이고, 다르는 페르시아어로 ‘가진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따라서 만사브다르는 ‘관직의 소유자’라는 뜻이다)라고 불린다. 우선 그는 무굴 제국의 넓은 영토를 주, 도, 군으로 나누고 관리들을 임명해 행정을 맡겼다.
하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관료제라면 고대의 굽타 시대에도 있었다. 아크바르는 지방관들을 중앙에서 감독하면서 이들로부터 각 지방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또한 만사브다르는 지방관들이 행정과 아울러 해당 지역의 군 사령관 역할을 겸하는 군정일치(軍政一致) 성격의 제도였다. 중국의 관료제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관료제가 성립된 것이다.
▲ 인도의 정복 군주 무굴을 강력한 중앙집권의 제국으로 만든 아크바르가 동생의 집을 방문해 영접을 받고 있다. 그림은 1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크바르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는 것보다 말을 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인도 역사에서는 드물게 타고난 정복 군주다.
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군주는 대개 한 측면에서만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아크바르도 역시 대외 정복이나 정치와 행정 같은 제국의 하드웨어에서만 성과를 거둔 게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같은 소프트웨어에서도 치적을 남긴 군주였다(그가 해결한 종교 문제는 일반적으로 제국의 소프트웨어에 속하겠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하드웨어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각종 화려한 행사를 주최해 절대 권력과 권위를 과시하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고 백성들의 인사를 직접 받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다. 그런 자질을 갖추었기에 아크바르는 정복 군주이자 문화 군주라는 보기 드문 선례를 보여주었다.
전통과 첨단을 매끄럽게 접합하는 아크바르의 솜씨는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빛났다. 전통적인 힌두 양식과 당시 첨단에 해당하는 이슬람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 시대의 건축은 그가 두 문화를 융합하려는 자세를 가졌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궁정화가들은 유럽에서 발달한 사실주의 기법은 물론 원근법까지 차용해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기법이 접목된 독특한 ‘무굴 양식’을 개발했다. 아크바르의 치세에 인도는 유럽보다도 이르게 계몽주의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소프트웨어는 튼튼한 하드웨어가 있어야만 성능을 발휘하는 법이다. 비록 중앙집권과 관료제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무굴 제국 역시 중국의 역대 제국들에 비하면 토대가 취약했다. 무굴이 한동안 잘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제도가 미비해도 인물로 보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전성기 무굴 제국의 번영은 유능한 군주들이 계속 출현한 덕분이 컸다. 강력한 군주인 아크바르가 죽은 뒤 아들 자한기르(Jahangir, 1569~1627)의 치세에 제국은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그의 아들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다시 궤도에 올라섰다.
샤 자한은 모계가 힌두 왕비였기 때문에 힌두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런 탓인지 샤 자한은 예술을 매우 사랑했고, 역대 인도 왕들 가운데 손꼽히는 낭만적인 군주였다. 특히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을 추모하며 지은 무덤 궁전인 타지마할은 오늘날까지 당당한 위용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세계적 건축물이다.
문화를 사랑한 낭만 군주라고 해서 샤 자한이 심약한 군주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남쪽으로 데칸 일대의 소국들을 병합해 영토를 늘렸고, 북쪽으로는 왕조의 고향에 해당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까지 정복했다.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벌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이내 또다시 걸출한 지배자가 제위를 계승했다.
샤 자한의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 zeb, 1618~1707)는 1658년 마흔 살에 제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인도를 지배했는데, 몇 대째 이어져온 문화 군주의 전통은 일단 그에게서 끊겼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자비하고 잔혹한 정복자였고 권력욕도 대단히 강했기 때문이다. 아크바르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샤 자한이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아우랑제브는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진지하고 경건한 데다 냉혹하고 무자비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인도와 무굴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 시기에 꼭 필요한 군주였다.
아우랑제브는 한동안 중단한 정복 사업을 재개해 데칸과 남인도의 소국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아우랑제브의 치세에 이르러 무굴 제국의 영토는 사상 최대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가 남쪽의 인도 중부와 남인도를 경략하는 동안 북부의 상황이 어수선해졌다. 북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모든 인도 제국의 공통적인 문제점이었다. 북인도는 사방이 트인 지역이기 때문에 마치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기 때문이다. 아우랑제브가 증조부 아크바르의 종교적 탕평책(蕩平策)을 포기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심이 독실한 이슬람교도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정치적 변수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우랑제브는 결국 철저한 이슬람 중심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종교적 절충주의는 그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지즈야를 부활시킨 사람은 바로 그다), 힌두 동화 정책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아우랑제브는 고위직 관료들을 이슬람교도로만 충당했으며, 많은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모스크로 대체했다. 11세기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을 능가할 정도의 가혹한 종교 탄압이었다.
▲ 순백의 궁전 ‘낭만 군주’ 샤 자한이 서른아홉 살에 죽은 왕비를 추모해 지은 대리석의 묘지 궁전 타지마할은 인도 중세의 최대 건축물로 꼽힌다. 돔형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사방 56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그러나 무굴의 전성기를 가져온 유능한 군주들은 아우랑제브에게서 대가 끊겼다. 공교롭게도 최대 강역을 자랑하던 그의 치세 이후 무굴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은 음으로 양으로 무굴 제국에 힘을 실어주던 힌두인들이 인도의 이슬람화를 진심으로 환영할 리 없었다. 관료제의 실무자인 이들이 황제에 반감을 품으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그간 무굴의 지배하에 있던 소국들도 조공만 계속할 뿐 예전과 같은 충성심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부 정세 이외에 바깥에서도 무굴의 목줄을 죄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데칸 지방에서는 마라타(Maratha)가 크게 일어나 델리 근방을 자주 침략했다. 마라타족은 산악 지방 특유의 강인함과 기동성을 갖추고 유격전에도 능해 대단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1761년 마라타의 대공세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무굴 제국은 급기야 왕조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에 도움을 청했다. 그 덕분에 파니파트 전쟁에서 간신히 마라타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약효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쇠퇴 일로에 있던 무굴 제국은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마라타와 아프가니스탄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북인도는 서서히 정치적 공백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후 영국이 힘들이지 않고 무굴 제국을 거의 접수하는 형식으로 손에 넣게 되는 것은 이미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슬람의 철권 군주 샤 자한이 낭만 군주였다면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가마에 탄 인물)는 ‘냉혹 군주’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낭만을 위해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 그전까지 힌두 - 이슬람의 절충 정책을 취한 무굴을 완전한 이슬람 제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강력한 그의 재위 기간 중에도 힌두인들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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