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건국
성삼문은 아마 세조에 대해서보다 그 측근들에 대해 더 큰 분노를 품었던 듯하다. 김질에게도 그는 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처단해야 하며 신숙주는 오랜 친구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그렇듯 분노한 이유는 명백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세조 앞에서도 당당히 밝혔듯이 신하의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임금을 기꺼이 섬기는 한명회나 신숙주가 오히려 세조보다 더 미웠을 것이다. 물론 그의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이 남는다. 어쨌거나 세조는 현직 왕이므로 그의 거사는 반역이요 쿠데타다. 그렇다면 단종(端宗) 복위라는 그의 대의명분은 과연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세조까지 일곱 임금 가운데 정상적으로, 즉 맏아들에게 순조로이 왕위 승계가 이루어진 경우는 문종과 단종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일종의 변칙적인 승계를 통해 즉위한 왕들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사육신(死六臣) 세력이 세조의 왕위 승계를 부정하고 나선 이유는 뭘까? 물론 멀쩡한 현직 왕을 폐위하고 즉위한 경우는 세조가 처음이지만, 다른 성씨의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또 몰라도 엄연히 왕실 내의 사건이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그랬기에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도 쉽게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육신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한 가지다. 즉 조선의 사대부가 이제 왕권에 간섭하는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이 왕권에 의해 박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사대부 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세종 때 왕권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착실하게 성장한 결과 사대부 세력은 어느새 다시 건국 당시의 힘을 되찾았다(그런 점에서 단종의 비극은 세종이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사대부(士大夫) 세력을 확실히 ‘관료’로만 키웠다면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세조는 그들의 도전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조선의 임금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사대부들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유교왕국의 모순은 이제 상당히 증폭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육신(死六臣) 세력이 세조의 측근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합당하다 하겠다. 장차 사대부의 진정한 적은 임금이 아니라 견해를 달리 하는 다른 사대부가 될 것이므로.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 타이틀의 방어에 성공한 세조는 사실상 나라를 새로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다(태조와 태종에 이어 벌써 세 번째 건국이다). 『경제육전』과 『속육전』을 확대ㆍ증보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자신감에서다. 제목부터가 앞서의 두 문헌보다 훨씬 거창하게 나라를 경영하는 책이니 비정상적으로 집권한 세조로서는 당연히 애착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는 최항(崔恒, 1409~74)과 노사신(盧思愼, 1427~98)에게 편찬을 맡기고서도 직접 교정까지 봐가면서 작업을 독려했으나 완간은 그의 사후로 미뤄야 했다. 1470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 왕조의 국가 운영 지침서로 기능하다가 18세기의 『속대전(續大典)』, 19세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으로 이어지게 된다.
▲ 경국대전 건국 이후 법과 제도가 여러 차례 바뀐 탓에 ‘국법’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가 확립한 『경국대전』은 이후 200년 동안이나 수정 없이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세조는 또 한 명의 ‘건국자’로 볼 수 있다.
1466년에 시행된 직전법(職田法)도 세조의 3차 건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앞서 보았듯이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이미 과전법(科田法)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과전으로 지급된 토지가 세습되는 데 있다. 원래 명목이야 만들기 나름이므로, 현직 관리가 죽어도 그에게 주어진 과전은 수신전(守信田, 관리의 과부에게 수절을 지키라고 주는 토지), 휼양전(恤養田, 관리의 어린 자식들을 구호하기 위한 토지) 등 각종 명목으로 유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세습된다. 게다가 관직이 없는 양반, 즉 산관(散官)에게도 과전이 지급되니 가뜩이나 부족한 토지는 더욱 부족해진다. 그래서 세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 그게 바로 직전법이다. 실은 개국 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니까 굳이 직전법(職田法)이라는 명칭을 다는 것조차 우습긴 하지만 세조가 또 다른 ‘건국자’가 아니라면 시행하기 어려운 제도다.
그런데 개국 초로 돌아가는 게 토지제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세조가 나라를 다시 건국했다면 공신들도 새로 생겨난 것은 당연하다. 아닌 게 아니라 계유정난과 사육신(死六臣)의 난을 겪으면서 공신들의 수도 자꾸 늘어간다. 원래 개국 초에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은 세습이 허용되는 데다가 면세의 혜택까지 누린 바 있지 않던가? 따라서 공신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토지 부족 현상을 더욱 부추겼으므로 세조가 직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노력한 것과 비교하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세조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런 공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대부(士大夫)들의 세력 판도에는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며, 이는 이후 조선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세조가 3차 건국의 기분을 유감없이 만끽한 분야는 아마 국가의 이념일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택하는 것은 원래 건국자의 고유 권한이다. 천륜과 인륜을 어기면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그였으니 유교 이념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렇다고 개국 초부터, 아니 멀리는 고려시대부터 차근차근 닦아온 유교왕국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유교 이념의 색채를 다소나마 탈색시키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다. 집현전의 문을 닫고 경연을 폐지한 게 그 구도의 서곡이라면, 단군과 기자, 동명왕 등 한반도 고대 건국자들(말하자면 세조의 ‘동업자들’)의 신위를 격상시키고 1457년 정월을 맞아 원구단(圓丘壇)을 설치한 것, 그리고 도교의 제사 의식을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를 설립한 것은 주제곡에 해당한다【원구단은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한 제천단이다. 원래 고려 성종(成宗) 때 처음 설치된 바 있으나 조선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지위를 자각한 왕조였으므로 당연히 처음부터 원구단 설치는 인정되지 않았다(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 천자만의 특권이다). 물론 세조가 원구단을 쌓고 원구제를 지낸 목적은 중국에 대해 자주성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과거 정권과의 단절을 표방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원구단은 몇 년 동안만 사용되다 곧 용도폐기되었다】.
그 마무리는 불교 중흥이다. 일찍이 왕자 시절에 『석보상절』을 지은 이력도 있을 만큼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였으나,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계획을 추진한 것은 유교 일변도인 국가 이념에 변화를 주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그런 노력 덕분에 세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유교 이념의 농도가 가장 옅은 왕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왕권의 행정적인 표현은 중앙집권과 문치주의의 강화로 나타난다(송 태조 조광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모름지기 강력한 전제군주는 그 두 가지를 정국 안정의 주무기로 삼게 마련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방 군정의 총책임자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중앙의 문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수신(帥臣)이나 주장(主將)이라는 별칭에서 보듯이 유사시에는 지역의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작전에 임할 수 있는 직책으로서 원래는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나, 세조는 무신 대신 문신을 기용한 점이 다르다. 당연히 지방의 토호 세력은 반발한다. 특히 한반도 북부, 즉 북도(北道)는 여진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현지 출신을 병마절도사로 삼는 게 관례였으니 박탈감이 더 심하다.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중앙에서 병마절도사로 파견한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세조는 석 달 만에 거뜬히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물리력에서도 중앙집권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임을 입증한다.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으로 컴백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국의 시대는 얼마 가지 못한다. 조선은 비록 내내 왕국임을 표방해왔지만, 체질적으로 순수한 왕국이 못 되므로 조선이 왕국일 수 있는 것은 왕다운 왕이 재위할 때뿐이다.
▲ 탈유교 노선 사육신(死六臣)의 홍역을 치렀으니 아마 세조는 유학과 사대부(士大夫)라면 지긋지긋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쌓았다. 중화를 숭배하는 유학이라면 천제란 감히 생각할 수 없다. 사진에 보이는 원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새로 지은 것인데(그는 여기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일제에 의해 헐려 지금은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팔각정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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