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흐리면
양재역에 대자보를 붙인 인물이 지적한 대로 차라리 조선이 곧 망했다면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더 좋았을 것이다. 어떤 왕조, 어떤 체제라 해도 그 무렵의 조선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사실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뀐 조선에서 만약 반란이 일어나 당시 세계적 추세에도 어울리는(그 무렵 서유럽 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탄생되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의 왕국이 들어섰다면, 한반도는 사회 진화의 정상적 궤도로 복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얼마 뒤에 벌어지게 될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의 필자가 전망한 것과는 달리 조선은 중앙정치가 높아가는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한다. 그렇게 생명이 질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 가지 이유는 대체 세력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가 휩쓸고 지나간 결과 황폐해진 조선의 정치 무대에는 수권 능력을 갖춘 정치 집단이 아예 씨가 말라 버렸다. 설사 반란이 필요한 상황이라 해도 반란을 주동할 만한 세력조차 없는 것이다. 환자로 치면 죽으려 해도 죽을 힘조차 없는 처지라 할까? 사실 윤원형이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쉽게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터무니없는 모략마저 제동을 걸 만한 집단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데다가 얼마 남지 않은 인물들마저 윤원형이 싹쓸이해 버렸으니, 이제 조선 카페는 간판을 접고 싼값에 내놓아도 인수할 업자가 없다(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5년 동안 윤원형에 의해 제거된 인물은 두 자릿수를 넘었다).
둘째 이유는 그 전까지 그런 대로 개혁의 성과가 빛을 봤기 때문이다. 인종(仁宗)이 조광조(趙光祖)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썩은 조정이라 해도 개혁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인종이 되살린 현량과(賢良科)가 명종(明宗) 때인 1552년 정초(旌招)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게 그 증거다. 정초란 학덕 있는 유림에서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용하는 제도였으므로 기본 정신은 현량과와 다를 바 없다.
또한 비록 양아치가 권신으로 군림하며 윗물을 흐리게 하고는 있지만, 옛날처럼 훈구파가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지 못하는 것도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사화(士禍)를 일으킨 공로로 공신이 된 자들이 과거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실력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조선의 병이 깊어지는 게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므로 아무래도 대세는 사림파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림의 뜻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정치를 버리고 낙향해서 전국 각지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불행히도 그들의 목표는 언제나 성리학적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변함이 없었지만). 사실 조선이 붕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 덕분이다【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1543년 풍기 군수였던 골수 성리학자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한반도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의 학자 안향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아마 송나라의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카피한 이름일 터이다) 이 지역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나중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이 서원에 국가가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채택되어 1550년에 백운동서원은 명종(明宗)이 직접 현판을 써준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서원 건립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원래는 사립이었으나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에 나서서 사실상 국립화된다(이를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부른다)】.
▲ 국립이 된 사립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명종은 적시에 등장해 준 못난 왕이었다. 아직 사대부 권력이 확고하지 않았을 무렵 명종이 왕당파를 육성하고 왕권 강화에 나섰더라면 사대부 국가의 성립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인데, 일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립기관에 국가가 재정을 지원했다는 것은 유학 체제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말해준다.
1555년 왜구가 다시 대규모로 남해안을 침략해왔을 때 그럭저럭 토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개혁의 자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부르는데, 굳이 의의를 찾자면 이를 계기로 임시 기구인 비변사가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의 전형이지만, 아무튼 그것으로 조선은 최소한의 군사력이나마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40년 뒤에 쳐들어오는 ‘거대한 왜구’를 상대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윤원형의 권력 기반은 누나인 문정왕후였으니까 1553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明宗)이 친정에 나서면서는 양아치 세상도 자연히 끝났어야 했다. 아무리 임금을 조카로 두었다 하더라도 성년이 된 임금이 자신의 고유 업무와 권한을 되찾겠다고 나선다면 윤원형이 그걸 가로막을 명분은 없다. 게다가 명종은 혼탁한 국정을 그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는, 나름대로 기특하고 갸륵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나선다면 비록 윤원형이 처벌까지는 되지 않는다 해도 예전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권세를 연장해 준 것은 바로 명종(明宗)이다.
외삼촌에게서 국왕 고유의 업무를 환수할 자신이 없었던 못난 왕 명종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양(李樑, 1519~63)이라는 자에게 대신 맡긴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대립 세력을 키워서 윤원형을 제어하려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명백한 직무 유기다. 잘 되어야 양아치의 이름이나 바꾸게 될 테고 못 되면 양아치가 둘로 늘어나게 될 텐데, 그 결과는 예상할 수 있듯이 후자로 나타난다.
사실 이양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이었으니 어떤 결과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외삼촌을 제거하기 위해 처외삼촌을 기용한 것이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이양은 오히려 처조카인 임금이 준 기회를 이용해 자기 아들을 비롯한 자파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등 윤원형보다 한술 더 뜬다. 하지만 그가 사림을 송두리째 제거하려 한 것은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사림파의 소장학자 심의겸(沈義謙, 1535~87, 인순왕후의 동생이다)이 이양의 심복이었던 기대항(奇大垣, 1519~64)을 꼬드겨 이양의 사림파 말살 작전을 알아내고 임금에게 보고함으로써 이양은 10년 권세를 끝내고 축출된다.
이쯤 되면 고려 말 무신정권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비록 이제는 권력 주체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세를 휘두르는 무질서와 하극상의 시대라는 점은 똑같다. 그렇다면 무신정권기에 민란이 많았듯 사대부 정권기의 조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 중앙정치가 높아가자 지방정치도 문란해진다. 부패한 지방 수령들의 학정을 피해 유민들이 늘어나고 그들 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진다【만약 서원이 예전의 향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부패한 지방관을 탄핵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타락이 지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원은 성격이 바뀐다. 처음 생길 무렵만 해도 서원은 향교를 대신하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낙향한 사림파의 유생들이 세운 것인 만큼 점차 서원은 순수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성리학적 정치 이데올로기 교육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서원의 주 목적은 지방 정치를 감시하고 개선하는 일보다 장차 중앙정치를 사림 세력으로 바꿀 ‘성리학의 전사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 그 결과 서원은 조선을 사대부 체제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 되지만 수가 늘고 타락하면서 당쟁의 온상이 되어 버린다(공교롭게도 중국 송나라에서도 서원은 당쟁의 진원지가 된 바 있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화적 두목인 임꺽정(?∼1562)이 탄생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평소에 익힌 무예를 밑천으로 도둑질과 강도질을 일삼는다. 소설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그가 과연 실제로 신분해방과 인간평등의 사상을 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사회과학적 인식의 결과라기보다는 아마 무질서와 하극상이 판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세력이 늘어나자 그는 한양이 가까운 양주 지역을 버리고 황해도로 가서 구월산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가 일반적인(?) 산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황해도의 지주와 부호들을 공격해서 제 몫을 챙기는 것과 더불어 관청을 습격해서 곳간을 열어 백성들이 가져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부의 입장에서 임꺽정은 그렇잖아도 무질서한 사회를 더욱 무질서하게 만드는 도둑놈이다. 그러나 두 양아치(윤원형과 이양)가 권세를 휘두르는 조정에서는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다. 하기야, 바깥에 대비하는 비변사 외에는 별다른 정규군마저 없었으니 그의 소재를 알았다 해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관군’이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그저 포도청을 지키는 포졸들이 관군의 주축이었고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는 여기에 일반 백성들을 보충해서 진압군을 꾸리는 식이었다. 굳이 조선의 정규군이라면 초기에 설치된 5위(五衛)가 있었으나 수도방위대의 기능으로만 국한되었고 전국적인 군 조직이 되지는 못했다】.
1560년부터 임꺽정은 한양에까지 진출하지만 정부는 성문을 굳게 잠가 사후 약방문이나 할 뿐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무능해 보인다 해도 타도해야만 무너뜨릴 수 있다. 임꺽정이 차라리 조직적인 반란을 획책했다면 모르겠으나 마냥 도둑질과 의적질만 계속할 수는 없다. 결국 그 해에 그의 아내와 참모가 체포되면서 임꺽정의 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뒤에도 임꺽정은 1년 이상을 더 버틴다. 권신 이양은 밥값이라도 하고자 1561년 평안도 관찰사로 가서 임꺽정 일당을 잡았다고 큰 소리쳤으나 알고 보니 가짜 임꺽정이었다(이양이 명종의 신임을 잃은 데는 이 사건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왜구 토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던 뛰어난 무장 남치근(南致勤, ?~1570)이 황해도에 투입되면서 이듬해 1월 임꺽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임꺽정은 보름 뒤에 처형되었지만 정작으로 맑아져야 할 윗물은 여전히 흐리다. 조선의 병은 아직 치료를 담당할 의사조차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더 악화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한번 땅에 떨어진 왕권은 좀처럼 본래 주어진 권한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왕은 언제나 무시해 버려도 상관없는 존재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사대부가 옹립한 왕이 탄생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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