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세상②
권신의 시대는 가고 외척의 시대가 되었다. 인종(仁宗)에게 윤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면 명종(明宗)에게는 윤원형(尹元衡, ? ~ 1565)이라는 외삼촌이 있다. 둘 다 윤씨이기에 나중에 명종실록을 엮은 사관들은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부르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큰 윤이나 작은 윤이나 조카를 국왕으로, 누나를 대비로 둔 것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이니 사실 구분할 가치도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큰 윤’보다는 ‘작은 윤’이 더 음험하고 흉악한 자였던 듯하다. 윤임은 무관 출신으로 왜구와 싸운 경력도 있는 데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윤원형은 이미 그 전부터 파벌을 이루어 권력다툼이나 일삼는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쓴맛을 보았던 그였으나 이제 자기 세상이 되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윤임 일당을 제거할 구실을 만드느냐는 것인데, 과연 그가 짜낸 꾀는 과연 양아치답게 치졸했다. 바로 자신의 첩인 정난정(鄭蘭貞)을 궁중에 들여보내 누나와 조카를 구워삶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집필자가 윤원형인지, 정난정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그 천박한 시나리오가 통할 만큼 조선의 병은 깊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중종(中宗)의 또 다른 아들 봉성군(鳳城君)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고 모함한다. 게다가 ‘모리배 부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윤임은 ‘전과’도 있었다. 인종(仁宗)이 죽을 무렵 명종(明宗)이 왕위를 이을 것을 우려한 윤임이 자신의 조카인 계림군(桂林君)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윤임은 죽일 놈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동생이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든 덥석 받아들일 자세였던 문정왕후에게는 난정의 무고가 오히려 바라던 바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되니,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라는 사건이다(졸지에 역적으로 몰린 계림군은 운임이 처형되자 도망쳐서 승려로 변장했으나, 곧 잡혀 능지처참형을 당했다)【조선 중기의 4대 사화(士禍)로 불리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는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왕권 대 신권이 충돌한 것인 데 반해(물론 여기에도 사대부 세력의 음모가 개재되었지만) 후자는 사대부들이 국왕을 조종해 반대파를 숙청한 결과다. 따라서 앞의 두 사화와는 달리 뒤의 사화들은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전형적인 ‘말만의 역모’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사관들은 폭군 연산군을 마음껏 비난했지만, 차라리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사화가 사대부 시대의 사화(士禍)보다 더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됨으로써 왕국의 시대보다 더 타락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존재 가치가 없는 왕조가 되고 말았다】.
잔머리를 굴린 대가로 윤원형은 일약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양아치에게 공권력이 주어지면 그걸로 어떤 일을 할까? 우선 패거리를 만들고, 평소에 꼽게 보아둔 다른 양아치들을 없앤 다음 나이트클럽의 영업권을 독점하고, 검은 돈을 불리고, 거들먹거리며 살고자 할 게다. 과연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500년 뒤의 ‘조폭’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한다. 심복들을 거느리고, 평소에 원한을 맺은 자들을 숙청하고, 온갖 인사 청탁과 뇌물을 받아 배를 불리고, 남의 토지를 마음 대로 빼앗고, 조정 대신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윤원형이 500년 뒤의 후배들보다 한술 더 뜬 게 있다면 노비 출신이자 기생이었던 정난정(鄭蘭貞)을 정경부인(貞卿夫人)으로 올린 것이다. 정경부인이라면 정ㆍ종 1품 관리의 정식 아내에게만 수여하던 여성 최고의 작위였고, 노비 출신은 물론 서얼 출신의 여성이라도 꿈꾸지 못할 지위다. 이제 공신만이 아니라 정경부인도 인플레 시대를 맞은 걸까? 하기는, 윤원형에게는 정난정이 일등공신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내에서 대권 후보로 찍었던 봉성군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봉성군을 제거하는 데는 시나리오조차 필요가 없었다. 1547년 때마침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는데, 윤원형에게 그것은 훌륭한 시나리오 대용품이다. 대자보의 내용인즉슨 “위에서는 여왕이, 아래에서는 이기(李芑, 1476 ~ 1552)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할 것은 뻔하다”는 것, 여기서 여왕이란 물론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기라는 자는 윤원형의 심복 양아치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를 떠나는 작은 사화(士禍)가 또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사화마저 인플레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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