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부끄러운 공신들
현대 사회라면 난리를 겪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든 없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도의 재앙이 있었다면 권력자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도 바뀌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왕조시대라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도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으니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온 백성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조선의 지배층은 깨끗이 반성하고 말끔히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변명할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권력 구조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임금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임금인 선조(宣祖)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도 못 되어 버선발로 도망쳤으면서도 책임을 면했다. 왜? 군주는 사대부들이 임명하는 거니까. 또 사대부들은 전쟁 직전에까지 자기들끼리 당쟁이나 일삼았고 전쟁 중에는 임금을 수행하느니,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느니, 심지어 이순신을 모함하느니 하면서 임무를 방기했지만 책임을 면했다. 왜? 조선은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니까【전란 중에도 실정의 책임을 묻는 반란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1593년 의병장 송유진(宋儒眞)은 충청도 일대에서 2천의 병력을 모아 의병대로 싸우다 한양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 날짜인 이듬해 정월 보름을 며칠 앞두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1596년 관군 장교였던 이몽학(李夢鶴)은 양민과 노비로 된 병력 수백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 홍산 관청을 점령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이몽학의 반란은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연좌에 걸린 대형 사건이었으나, 전란 중인 탓에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덕령(金德齡)이나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도 무고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대형 사고가 나도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이 책임지는 법이 없는 것은 이런 나쁜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만큼 지배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백성들도 없다.
그러니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도 조선의 지배 체제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사대부(士大夫)들에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삐걱거리면서도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하던 기존의 토지제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토지가 황폐해졌고 토지대장도 사라져 버렸으니 이제 공전이고 사전이고 가릴 것 없이 말뚝만 꽂으면 모두 내 땅이다. 그 말뚝은 물론 권력자만이 꽂을 수 있다. 대부분이 지주들인 사대부(士大夫)들은 마치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토지 겸병에 나선다. 몽골 지배기가 끝난 고려의 경우와 너무나도 흡사한 상황이다.
어쨌든 우선 임금이 사는 집(왕궁)부터 불타 없어졌으므로 나름대로 전후 복구는 필요하다. 선조(宣祖)는 급한 대로 정릉의 행궁(行宮)에 거처를 마련했으나 평소에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으니 생활하기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임금의 직무가 떠오른 걸까? 그는 궁궐의 신축을 권하는 명나라 장수의 의견을 거부하고 일본에 복수하기 전까지는 궁궐을 짓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내보인다(그래서 경복궁이 중건되는 건 3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논공 행상을 빼놓지 않는 것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전란이라는 대사건이 있었으니 논공행상도 필요하겠지만 이순신, 원균(元均)【원균에 관해서는 충신과 간신의 이분법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최소한 그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과 이순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원균은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긴 이순신에 비해 문장력이 부족했고 자식이 없어 후대에 오명과 오해를 불렀다고도 한다】, 권율 등 진짜 알짜배기 공신들과 수많은 의병장들은 대부분 죽은 뒤였으니 과연 진정한 공신이 남아 있었을까? 더구나 사대부들이 선정하는 공신이라면 제대로 된 논공행상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과연 1604년 7월에 발표된 공신 명단을 보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난리를 겪고서도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최고 수훈갑에 해당하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은 터무니없게도 적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하는 데 노력한 자들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정곤수(鄭崑壽, 1538~1602), 윤두수(尹斗壽, 1533~1601) 등 조정의 문신들과 내시들까지 포함해서 무기 한 번 잡아보지 못한 86명이 이 상을 받았다(그나마 유성룡은 종군기라도 썼으니 공신 자격이 있는 편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직접 참전한 사람들과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사람들이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선정된다. 이순신, 김시민 등 주로 전사한 무신들과 의병장들이 임명되었는데, 수는 겨우 18명이다. 마지막으로 청란공신(淸亂功臣)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 가운데 5명이 책봉되었다. 북으로 도망치는 선조(宣祖)의 시중을 들고 발을 닦아준 내시는 호성공신이 되었고 장렬하게 전사한 많은 의병장들은 공신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으니,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이런 불공정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하기야 당시 조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왔을 정도라면 그런 공신 명단도 지극히 당연하다.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한 공로는 모두 성상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어 중국 조정에서 곡진하게 구제해준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조금 수고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또한 직분 내의 일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공로가 뭐 있겠습니까?” 결국 왜란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정작 전쟁에서는 체면치레만 해놓고 엉터리 휴전협상을 진행한 명나라 정부이고, 그 다음 유공자는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선조라는 이야기다. 이 정도라면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 사용해 온 ‘사대부 국가’라는 표현도 과분하다 하겠다】.
당시 호성공신들 중에 낯부끄러워한 인물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명단의 작성 과정에서도 사대부(士大夫)들의 당파가 배려되었음은 확실하다. 당쟁으로 전쟁 전의 기본적인 사태 파악조차도 날려 버린 그들이지만, 전쟁이 끝나자 언제 전쟁이 있었더냐는 듯싶게 다시 본업인 당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실 논공행상이 있기도 전에 당쟁은 재개되었다. 물러간 일본군 캠프의 모닥불이 채 꺼지기도 전인 1598년 명나라 장수가 본국에 올린 허무맹랑한 보고에 놀아난 게 그것이다. 조선이 일본과 동맹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려 했다는 그 망언에 대응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그 시나리오는 전쟁 전에 일본이 정략적 의도를 담고 제의한 것에 불과했으니 명백한 허위 보고가 아닌가? 그런데도 어떻게든 집권 세력인 남인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북인들은 영의정 유성룡이 중국에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며 탄핵한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당쟁의 논리에서는 훌륭한 구실이다. 결국 유성룡은 정계에서 은퇴해 버렸고 2년 뒤 복직이 허용되었을 때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재야에 있는 상태에서 공신 책봉을 받은 셈이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를 놓고 다시 북인이 둘로 핵분열된 것이다. 유성룡의 탄핵을 주도한 남이공(南以恭, 1565~1640)은 오히려 홍여순(洪汝淳, 1547~1609)이 대사헌으로 승진하자 발끈한다. 임명은 국왕이 했지만 그것은 물론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북인이라는 같은 집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남이공은 살림을 차려 나가는데, 그의 새 집은 소북(小北)이 되었고 홍여순의 옛 집은 대북(大北)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당쟁에 신물이 난 선조(宣祖)는 홍여순을 유배보내 사태를 무마하려 했으나 당쟁은 가라앉기는커녕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곧이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겐 제법 비중있는 다툼거리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다.
▲ 선조(宣祖)의 안식처 모화관에 버선발로 뛰어간 국왕, 전란을 맞아 가장 먼저 내뺀 국왕(이런 전례는 고려의 강화도 정부에서도 본 바 있다), 그나마 선조가 사후 처리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정상참작’은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자들에게 공신 직함을 남발해서 다시 실망을 안겨준다. 사진은 그의 무덤인데, 전란으로 제 집을 잃었으니 이곳이 사실상 그의 집이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남풍 뒤의 북풍(대동법) (0) | 2021.06.20 |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광해군) (0) | 2021.06.20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협상과 참상(정유재란, 유성룡) (0) | 2021.06.18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영웅의 등장(신립, 이순신, 이여송) (0) | 2021.06.18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임진왜란) (0) | 2021.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