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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소중화의 시작②: 예송논쟁 2라운드(갑인예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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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소중화의 시작②: 예송논쟁 2라운드(갑인예송)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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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의 시작

 

 

16742월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顯宗)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이제는 대왕대비가 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초점이 된다. 다만 이번에는 며느리의 상인지라(며느리도 역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1년 복상과 9개월 복상으로 내용은 바뀌었다. 물론 서인이 9개월이고 남인이 1년이다. 여기서 허목(許穆, 1595 ~ 1682)과 윤휴(尹鑴, 1617 ~ 80)1년 복상설을 관철시켜 보기좋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남인은 드디어 권력을 쟁취한다.

 

같은 사안임에도 시차를 두고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렇듯 복잡하고 근엄해 보이는 논쟁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양측은 온갖 폼을 잡고 마치 엄청난 철학 논쟁이라도 벌이듯이 옛 문헌들을 뒤져가며 엄격하고 치밀하게 예법을 따졌지만, 실제로 승부를 결정한 것은 어느 측의 정치적 세력이 더 컸느냐였다.

 

물론 서인과 남인이 마음 속의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아마 논쟁에 참여한 사대부(士大夫)들 가운데는 권력과 무관하게 진심으로 예법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양측은 나름대로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서인은 조선의 법전에 해당하는 경국대전, 남인은 주례, 예기와 함께 3례의 하나인 의례를 문헌적 근거로 삼았다. 이를 학문적으로 해석한다면, 서인은 성리학적 편향이 강했던 데 비해 남인은 성리학 이전의 유학, 즉 육경학(六經學)의 입장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육경이란 주역서경시경(詩經)예기춘추의 전통적인 5경에 효경(孝經)을 더한 것이다. 모두 공자(孔子)의 시대나 그 이전의 문헌들이므로 육경을 중시하는 것은 원시 유학의 학풍에 속한다. 그에 비해 성리학은 주희(朱熹)가 편집한 사서,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대학을 기본 교과서로 삼고 있으므로 육경학보다는 복고적 성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수구와 복고를 지향하는 조선 사회를 약간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다면 양측이 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그렇게 정했는지도 분명해진다. 골수 성리학자인 서인들은 효종(孝宗)이 둘째 아들인 만큼 사대부에 대한 예우에 준해서 처리하고자 한 것이며, 그에 반해 성리학적 성향이 그보다 약한 남인들은 왕에 대한 예우는 사대부(士大夫)와 다르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남인들의 주장이 왕권 강화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조선은 사대부 국가이므로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측의 입장 차이가 아니다. 당시에는 어느 측의 논리가 옳고 어느 측이 집권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왜 하필 그 무렵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는가이다. 조선 건국 이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가 효종(孝宗)이 처음은 아니다. 또한 국상을 치러본 경험도 그동안 숱하게 많았다. 그런데 왜 유독 효종 부부의 장례 절차만이 문제가 된 걸까?

 

조선 내부만 놓고 본다면 그 사건은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유교 국가 체제에 한층 접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조선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왕족의 장례 절차마저도 논쟁을 통해 결정할 만큼(정작 상주喪主현종顯宗조차 그 논쟁에 개입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완벽한 사대부 국가가 되었다. 앞서 전란이라는 비상 시기에도 사대부들은 조선이 취해야 할 노선을 놓고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번 예송논쟁은 관혼상제라는 일상적인 관습마저도 그들이 정한 유교 예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이제는 지배 권력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가 완전히 유교화된 것이다. 유교적 예법의 하나인 동성 간의 통혼 금지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게 바로 현종(顯宗) 때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화의 변종들 중화세계가 사라지고 없는데 그 똘마니들은 여전히 남아 부지런히 입을 놀렸을 뿐 아니라 당파의 보스가 되었다. 그림은 중화의 똘마니이자 소중화의 보스인 서인 대표 송시열(왼쪽)과 남인 대표 허목(오른쪽)이다. 이 중화의 변종들 때문에 조선의 시대착오는 더 오래 갈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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