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에는 동학으로
순조(純祖) 때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은 ‘국왕 = 허수아비’의 등식이 있으니 고종(高宗)은 열한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이라 해도 아무런 실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럼 또 다시 풍양 조씨가 컴백한 걸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일단 캐스팅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高宗)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는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온다.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이자 그 전까지의 대원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실권을 지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살아 있을 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유일한 대원군이다). 따라서 그를 그냥 대원군이라 불러도 되겠다.
일단 집권자가 세도가문에서 왕실로 옮겨 왔으므로 60여 년 동안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권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지난 시대가 남긴 상처에서 비롯된 호된 신고식부터 치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새롭고주체적인 종교 이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부터가 동학(東學)이니까 심상치 않다. 알다시피 서양의 | 사상과 문물은 서학이라 불렸으므로 동학이라면 필경 서학에 반대하는 입장일 게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동학이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은 서학이라기보다 유학이었다【동학이라는 이름은 서학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생겨났다(‘예수’를 음차해서 ‘야소교耶蘇敎’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현재 사용하는 기독교基督敎의 기독이란 ‘그리스도’의 음차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동학에서 모시는 신도 바로 천주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 즉 천주를 모시는 신앙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이 같으니 민중이 혼란을 겪을 것은 뻔한 일, 따라서 동학은 이름에서 서학과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하지만 천주의 방향을 달리 설정했을 뿐 개념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동학이 탄생하는 데는 100년 전부터 조선에 보급된 서학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릇 종교라면 다 그렇듯이 동학도 창시자가 있다. 잔반 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崔濟愚, 1824~64)는 일찌감치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장사도 하고, 의술과 점술 같은 잡기도 배웠다(아무리 몰락한 가문이라지만 양반 신분에 그럴 정도였다면 신분 해체가 전사회적 현상이었다는 이야기다). 삼십대에 들어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한 그는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기도와 수련과 명상을 거듭하던 중 1860년 봄에 신의 부르심을 받는 신비한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 1년 동안 이념과 교리를 만든 뒤 1861년부터 그는 새 종교의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신흥 종교답지 않게 포교는 대성공이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교도의 수는 크게 늘었고 그 다음부터는 기존의 교도들이 새 교도들을 포섭하면서 동학의 교세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다. 도대체 마케팅 포인트 가 뭐길래 그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최제우는 바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사회적 신분도 다르고 경제적 계급도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평등할까? 누구나 자기 안에 천주, 즉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인간 세상의 기준으로 어찌 하늘이 내린 평등을 막을 수 있을까?
▲ 세상을 구하는 교주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초상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았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지만 한낱 종교의 교주에 불과한 사람이 ‘구세주’로 나설 만큼 조선의 병은 깊다.
개인권과 평등의 이념이 당연시되는 오늘날 같으면 특별할 게 없는 사상이지만, 당시 그런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고 대단한 파격이었다. 성리학적 질서, 중화적 질서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분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천자가 북극성이라면 사대부(士大夫)와 제후들은 그 주변을 날마다 한 바퀴씩 도는 별자리들이며, 백성들은 우주 곳곳에 흩어진 뭇별들에 해당한다. 이것은 하늘이 정해준 질서, 즉 천명이자 순리이므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나 한반도의 역대 왕들이 노상 입에 올리는 말이 바로 천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게 오히려 하늘의 질서라고 주장했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사상이 아닐 수 없다(실제로 이후 동학東學에서는 개벽開闢을 모토로 삼게 된다).
이 새로운 종교를 바라보는 정부의 관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서학과는 분명 다르다. 예수를 신으로 모시지 않을뿐더러 신부나 교회도 없으니까. 그러나 동학에서도 천주를 주장한다. 천주가 하늘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는 점에서 뜻은 정반대지만 어쨌든 동학도 일종의 천주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동학을 서학의 변종으로 간주함으로써 탄압의 구실을 만들어낸다. 물론 탄압의 진정한 이유가 동학(東學)이 서학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보다는 주장하는 내용이 성리학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지극히 불순한 것이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최제우는 이제 정부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교세 확장을 중단하려 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1863년에 그는 전국 각지에 접(接)이라는 조직을 두고 접주를 임명하는 한편, 자신의 뒤를 이을 2대 교주로 최시형(崔時亨, 1827~98)을 지목해서 유사시에 대비했다. 과연 종교의 창시자답게 그것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한 조치였다. 그 해 말에 결국 그는 일찍이 수련하던 시절에 기거했던 경주에서 제자 스무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그는 효수되었는데, 말하자면 그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데뷔작인 셈이다【최제우의 죄목은 사도난정(邪道亂正), 즉 사악한 믿음을 가지고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중화세계의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니, 유일한 중화로 남은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적절한 죄목이라 하겠다. 그가 갑자기 처형되는 바람에 동학교도들은 그가 평소에 써놓은 글들을 모아 『동경대전』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그가 지은 노래들을 모아 『용담유사』라는 노래집을 펴냈다 (용담은 최제우가 수련한 경주의 연못이다). 노래집은 좀 특이한데, 아마도 동학교도들이 서학(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성가집을 염두에 두고 책을 편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출범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은 그는 이후 집권 시기 내내 온갖 시련에 맞닥뜨리게 된다.
▲ 경전과 노래집 위쪽은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오른쪽은 한글로 된 포교 가사집인 『용담유사(龍潭遺詞)』다. 경전과 노래집이라면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찬송가집이 연상된다. 게다가 서학에 맞선다는 이름에서나 인본주의를 주장한 교리로 볼 때 동학이 그리스도교에서 힌트를 얻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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