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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9. 세 번 생각하지 말고 두 번이면 된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9. 세 번 생각하지 말고 두 번이면 된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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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세 번 생각하지 말고 두 번이면 된다

 

 

5-19. 계문자(李文子)는 세 번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행동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두 번이면 충분하다.”
5-19.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 : “, 斯可矣.”

 

계문자(李文子, ?~BC 568)삼환(三桓) 중의 막강한 계씨가문의 제3대 영주로서 노나라의 문공(文公)ㆍ선공(宣公)ㆍ성공(成公)ㆍ양공(襄公), 4대를 섬기면서 깊은 신뢰를 쌓은 인물이다. 그는 계씨가문의 대부(大夫)라는 우리의 상식적 편견과는 달리 노나라의 현인으로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훌륭한 인물이었다. 매우 상식적인 사람으로서 재지(才知)도 있었고, 매우 질소(質素)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의 명()은 행보(行父)이고, 문자(文子)는 시호이다. 춘추경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문공(文公) 6(BC 621)조에 그의 기사가 처음 등장하고 있다.

 

에 이르기를:

 

 

여름철에, 계손행보가 진나라에 갔다.

, 季孫行父如陳.

 

 

가을철에, 계속행보가 진나라에 갔다.

, 季孫行父如晉.

 

 

이후로도 그의 사적은 스무 회 이상이나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의 활동은 5-17에서 나온 장문중(臧文仲)의 만년 시절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장문중을 이어 노나라의 기둥역할을 한 훌륭한 신하였다. 그가 세상을 뜬 것은 노나라 양공(襄公) 5(BC 568) 11월 신미일(辛未日)이었다. 이것은 공자가 태어나기 17년 전의 일이었다.

 

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미날에 계손행보 세상을 뜨다.

辛未, 季孫行父卒.

 

 

의 기사에 대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계문자라는 인물의 삶의 한 단면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노나라의 계문자가 세상을 떠남에 대부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염을 했다. 그때 노나라 양공도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계문자의 가신 우두머리가 집안의 기물들을 갖추어 장례식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명주나 비단을 입은 여자가 없었고, 사람이 먹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감추어둔 금이나 옥의 패물이 전혀 없었고, 같은 기물이 둘 이상 있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모인 군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 계문자가 얼마나 공실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선공(宣公)ㆍ성공(成公)ㆍ양공(襄公) 3대의 군주를 모시며 재상 노릇을 했는데도 자기 사익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손가?

季文子卒, 大夫入斂, 公在位. 家器爲葬備. 無衣帛之妾, 無食粟之馬; 無藏金玉, 無重器備. 君子是以知季文子之忠於公室也. 相三君矣, 而無私積, 可不謂忠乎?

 

 

좌전성공(成公) 16년조에 보면, ()나라의 가로(家老) 범문자(范文子)가 계문자를 옹호하는 말 속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고 있다. 노나라의 선백(宣伯) 즉 숙여(叔孫僑如)라는 음험한 인물이 노나라 군주인 성공의 생모 목강(穆姜)과 간통하고, 계문자(季文子)맹헌자(孟獻子)를 제거하여 그들의 가산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선백은 진()나라의 극주(郤犨)에게 사신을 보내 그를 부추겨, ()나라에 가있던 계문자(季文子)를 잡아 죽이게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명정치가 범문자(范文子)는 계문자(季文子)를 열렬히 변호하여 그를 석방시킨다. 범문자는 말한다.

 

 

계손행보는 노나라에서 두 군주를 섬겨 재상 노릇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집안의 여자들이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말들은 좁쌀을 먹지 않았습니다. 충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모함의 말들을 믿고 충성스럽고 훌륭한 사람을 버린다면, 제후들의 비난을 어찌 감당할 것입니까?

季孫於魯相二君矣. 妾不衣帛, 馬不食粟, 可不謂忠乎? 信讓慝而棄忠良, 若諸侯何?

 

 

이것은 계문자의 명성이 외국의 정치가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있었고, 또 그들의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좌전성공(成公) 9(BC 582)조에는 계문자의 인품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그 해 2월에 노나라의 선공(宣公)의 딸인 백희(伯姫)를 송나라에 시집보냈다. 여름철에 계문자가 송나라에 친히 가서, 공녀 백희를 송나라 공가로 들여보내고 돌아와 노공에게 결과보고를 했다. 그러자 공은 그에게 위로의 연회를 베푸니 계문자는 대아(大雅) 한혁(韓奕)편의 시 제5장을 노래불러 백희가 좋은 곳으로 시집갔음을 칭송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고나자 백희와 현 노공의 어머니인 목강()이 자기 방에서 나와 계문자에게 정중히 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대부께서는 정말 애를 쓰셨습니다. 대부께서는 돌아가신 선군의 덕을 잊지 않으시고 뒤이은 군주에게까지 충성을 다하시고, 미망인인 내게까지 덕을 베푸시었습니다. 선군께서는 앞으로도 잘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나는 대부의 큰 수고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大夫勤辱, 不忘先君, 以及嗣君, 施及未亡人. 先君猶有望也. 敢拜大夫之重勤.

 

 

그리고는 패풍(邶風)녹의(綠衣)편 종장의 시()를 노래부르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계문자가 부른 노래나, 성공(成公)의 생모인 목강(穆姜)이 부른 노래는 모두 그 내용이 그 상황에 합치된다. 옛사람들의 말이 오가는 격조 높은 화답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한대의 시경주석가들은 이런 장면에서의 좌전의 시() 해석을 근거 삼아 견강부회하여 시경의 본의를 크게 왜곡시켰다. 좌전이나 모시전(毛詩傳)이 모두 고문경에 속한다. 계자는 노나라의 공가(公家)로부터도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좌전문공(文公) 6 가을조에 보면, 계문자가 진()나라를 예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계문자는 사람을 시켜 상()을 당할 경우에 취해야할 예법을 조사해 가지고 떠났다[, 季文子將聘於晋, 使求遭喪之禮以行]. 그때 그 사람이 이런 예법을 알아 어디에 쓰려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의의 일에 대해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예로부터의 좋은 가르침이다. 일에 당해서 그 일에 대한 조치를 하려다가 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다. 과외로 준비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느냐?

備豫不虞, 古之善敎也. 求而無之, 實難. 過求何害?

 

 

아마도 이 때 진나라의 임금이 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좌전의 기사를 인용하여 논어의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이라는 표현의 실례라고 말한다. 하여튼 계문자는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매사를 충분히 준비하고 생각한 후에 행동에 옮기는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이라는 말을 듣고 공자가 그 선배 정치가에 대해 평한 것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이다. 그런데 재사가의(再斯可矣)’라는 공자의 평어에 대한 주석은 고주와 신주가 매우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정현의 고주는 다음과 같다.

 

 

계문자는 충성스럽고 그 행동거지가 현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일을 함에 과실이 적었다. 그러니 세 번까지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文子忠而有賢行, 其擧事寡過, 不必及三思也.

 

 

고주는 삼사(三思)를 크게 평가하는 입장이다. 즉 두 번만 생각했어도 될 것을 세 번씩이나 생각했으니 계문자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하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재사가의(再斯可矣)’두 번만 생각해도 됐을 것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주는 공자가 삼사(三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멘트한 것으로 간주한다. 세 번씩이나 곰곰이 생각한 후에 행동하였다구? 두 번이면 충분할 것을 뭘 세 번씩이나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까?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몇 번이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일정한 가치판단을 내린다고 하는 것은 역시 째즈적인 감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신중함만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인간이 생각 없이 우선 행동으로 옮기고 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반추가 깊을수록 좋은 결과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려 깊음이 비겁의 간접적 표현일 수도 있고, 살피고 또 살피는 것은 사사로움이 개입할 여지가 더 커져서 미혹될 수도 있는 것이다[三則私意起而反惑矣]. 항상 세 번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행동에 옮겼다고 하는 현인 계문자의 인품을 평하여 두 번이면 족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공자의 과감한 판단력은 후대의 중국의 선승들이 말하는 방편설법의 원형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신주의 해석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요시카와(吉川幸次郞)는 계문자가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 고 공자가 마치 동시대의 살아있는 인물의 행위에 관해 평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꼭 자문지왈(子聞之曰)’이 현장적인 전언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인물에 대한 세평을 듣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새겨도 무방한 것이다. 계문자가 공자와 동시대의 동명이인의 어떤 다른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카이즈카씨는 이 사건은 공자가 태어나기 69년 전의 일인데, 후에 역사적 상황을 잘 모르는 손제자들이 기록할 때에 마치 공자 당대에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착각하여 문지(聞之)’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라고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라고 생각한다.

 

 

()’은 거성이다. 계문자(季文子)’는 노나라 대부이다. 이름이 행보(行父)이다. 매사에 반드시 세 번 생각한 후에 행동으로 옮겼다.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진나라 임금이 병중이라는 말을 듣고 미리 상을 당할 경우의 모든 예를 갖추어 간 것과 같은 것이 또한 그 한 예이다. ‘()’는 어기사이다.

, 去聲. 季文子, 魯大夫, 名行父. 每事必三思而後行, 若使晉而求遭喪之禮以行, 亦其一事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미리 숙고하는 그런 일을 하는 법이 없다. 미리 숙고한다는 것은 선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정도 숙고하면 이미 사태는 다 파악된 것이다. 세 번까지 숙고하면 오히려 사념이 일어나 도리어 미혹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비판하신 것이다.”

程子曰: “爲惡之人, 未嘗知有思, 有思則爲善矣. 然至於再則已審, 三則私意起而反惑矣, 故夫子譏之.”

 

나 주희가 생각컨대, 계문자가 일을 신중히 숙고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세히 살필 줄 안다고 일컬을 만하고 또 크게 그릇된 행동이 없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선공이 찬탈하고 즉위하자, 계문자는 이에 그를 토벌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선공을 위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으니, 어찌 정자가 말한 바 사념이 일어나 도리어 미혹된다[私意起而反惑]’는 것의 증험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궁리(窮理)를 힘쓰면서도 과단(果斷)함을 귀하게 여기고, 쓰잘데 없이 생각만 많이 하는 것을 숭상치 아니 하는 것이다.

愚按: 季文子慮事如此, 可謂詳審, 而宜無過擧矣. 而宣公簒立, 文子乃不能討, 反爲之使齊而納賂焉, 豈非程子所謂私意起而反惑之驗歟? 是以君子務窮理而貴果斷, 不徒多思之爲尙.

 

 

주자의 주석이 요령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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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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