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문중은 지혜롭지 못하다
5-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장문중이 큰 거북딱지를 걸어두었고, 기둥머리 두공에는 산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는 수초모양을 그렸으니, 어찌 그를 지혜롭다 하겠는가?” 5-17.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
장문중(臧文仲)의 성(姓)은 장손(臧孫)이요, 명(名)은 진(辰), 중(仲)은 자(字)요, 문(文)은 시호(諡號)이다. 장손진(臧孫辰)은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대부였다. 그러나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은 아니고, 춘추 초기 진문공(晋文公)이 패자(覇者)가 되었을 시기의 인물이다. 장공(莊公)ㆍ민공(閔公)ㆍ희공(僖公)ㆍ문공(文公) 4대에 걸쳐 50년 가까이 노나라의 대부로서 활약하였다. 『춘추(春秋)』 경문(經文), 문공십년춘(文公十年春, BC 617) 조에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10년 봄 천자가 쓰는 역으로 3월 신묘날에 장손진이 세상을 떠났다.
十年春王三月辛卯, 臧孫辰卒.
이것은 공자가 태어나기 66년 전의 일이었다. 이 인물을 공자가 바라보는 느낌은 오늘의 나 도올이 최시형(崔時亨) 선생이나 유의(儒醫) 이제마(李濟馬)를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감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노나라의 지혜로운 정치가로서 사람들의 추억 속에 간직되었던 모양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4년(BC 549), 그러니까 역시 장문중이 죽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노나라의 가로(家老)인 숙손표(叔孫豹)가 진(晋)나라의 범선자(范宣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속에 또 다시 이 장문중이 언급되고 있다. 범선자가 고인(古人)들이 ‘죽어도 썩지 않는다[사이불후(死而不朽)]’라 말한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그 실례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숙손표에게 물으며 논쟁을 벌인다. 그러면서 범선자는 자기 진(晋)나라의 패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역사적 연속성이야말로 ‘사이불후(死而不朽)’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에 대해 숙손표(또는 목숙穆叔)는 범선자를 논박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러한 진나라의 번영은 가문이 이어진 현세적 복록, 즉 세록이라 하는 것이요, 불후라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노나라에는 일찍이 훌륭한 대부 한 분이 계셨는데 존함을 장문중이라 하옵니다. 이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만 이분이 남긴 말씀들은 현세에서도 유익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불후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제가 들은 바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공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말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래되어도 폐하지 아니하니 바로 이것을 두고 불후라 하는 것입니다.
以豹所聞, 此之謂世祿, 非不朽也. 魯有先大夫, 曰臧文仲. 旣沒, 其言立 於世, 其是之謂乎? 豹聞之, 大上有立德, 其次有立公,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
여기서 우리는 공자 당대에 장문중(臧文仲)이라는 사람이 노나라 인민들에게 기억된 이미지를 되새겨볼 수가 있다. 장문중은 명 정치가로서 훌륭한 말을 남긴 사람이며, 그 말이 썩지 않고 후세에 모범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입덕(立德)ㆍ입공(立功)ㆍ입언(立言)의 삼 단계에서 장문중은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이불후(死而不朽)’의 명언(名言)을 남긴 인물로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이 『좌전』의 기사는 그가 죽은 후 68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공자는 당대의 노나라의 상식, 즉 장문중이 노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는 일반적 판단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의 역사적 평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공자는 결코 상식이나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채(蔡)’라는 것은 점복(占卜)에 쓰는 거대한 거북의 딱지이다. 등딱지ㆍ배딱지를 다 쓰지만 주로 배딱지를 쓴다. 이 점복용 거북딱지는 주로 채(蔡) 땅에서 생산되었다. 그 크기가 1척2촌이 넘는 것으로 대구(大龜)인 것이다. 이 거북딱지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산 거북이를 잡아 이 보존력이 높은 완정한 하나의 점복용 딱지를 생산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가공의 공정을 거친다. 삼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샘플 을 보면 그 딱지의 생산자의 장인의 이름까지 한 귀퉁이에 새겨져 있다.
이 채(蔡)는 오직 왕실(王室)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라의 대사(大事)의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데 쓰는 것으로 군례(君禮)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대부인 장문중이 이 채를 집에 걸어두고 살았다는 것은(거채居蔡) 곧 참월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비판은 ‘참(僭)’이라고 하는 예악(禮樂)주의적 월권에 그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거북점은 본시 상왕조의 왕실의 전유물이었다. 오늘날 20세기에나 와서 그 모습을 드러낸 갑골문(甲骨文)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갑골(甲骨)의 유래는 주초(周初)의 것까지는 발굴이 되고 있으나 그 이후의 것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 ‘거채(居蔡)’라는 『논어』의 기록으로 미루어 갑골의 점복이 공자(孔子)의 시대에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즉 공자(孔子)가 송(宋)의 후예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볼 때, 갑골의 점복은 송나라를 통하여 제후국들에게 전승되었을 것이다. 갑골점복의 기록은 『춘추』 경에는 희공(僖公) 31년(BC 629) 여름 4월조[夏四月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여름철 4월에 교제 지낼 날짜를 잡으려 네 번 거북 배딱지에다가 점을 쳤다. 그러나 모두 불길한 점괘만 나왔다.
夏四月四卜郊, 不從.
그 다음, ‘산절조절(山節藻梲)’이라는 말은 거채(居蔡)와 함께 참월의 예로서 들고 있는 것이다. 산절(山節)과 조절(藻梲)의 앞 글자는 동사요, 뒷 글자는 그 동사의 목적이 된다. 산(山)의 산(山)은 ‘산모양으로 조각하다’는 동사인 것이다. 절(節)이란 세우는 기둥이 가로지르는 동량과 만나는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두공(斗栱)이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산모양으로 조각했다는 것이다. 조절(藻梲)의 조(藻)는 원래 수초(水草)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수초 모양의 화려한 무늬를 그려 넣다’는 동사가 된다. 절(梲)이란 천정을 가로지르는 동량 위에 다시 작게 세워지는 기둥을 말하는 것으로 영(楹)이라 한다. 이 동자기둥에 수초모양의 화려한 문양을 단청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절간 대웅전 천장의 화려한 모습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대웅전의 천장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춘추시대의 노나라 건축양식에 있어서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소박한 산절조절(山節藻梲)조차도 그것은 국군(國君)의 궁실(宮室) 이상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대부가 자기의 거실(居室)을 산절조절(山節藻梲)했다는 것은 공자로서는 참기 어려운 참월이었던 것이다. 장문중은 지극히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고주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참으로 공자의 말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파편의 기록자는 최소한 건축양식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있는 자이며 섬세한 미감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공자는 이어 말한다.
어찌 이런 자를 지혜롭다 할 수 있으리오?
何如其知也?
지(知)는 황간본에는 ‘지(智)’로 되어있다. 장문중에 대한 공자의 비판은 「위령공」 13에도 나오고 있다.
장문중은 그 위를 훔친 놈이다! 유하혜의 현명함을 알고도 그와 더불어 조정에 서지 아니하였다.
臧文仲, 其竊位者與! 知柳下惠之賢而不與立也.
이것은 장문중이 유하혜를 대신(大臣)으로 발탁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 말이다. 그리고 ‘절위(竊位)’란 말은 재상으로서 재상다웁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비판한 언사이다.
또 『좌전』 문공(文公) 2년(BC 625조에는 공자가 장문중을 평가하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장문중은 인하지 못한 점이 셋이고, 지혜롭지 못한 점이 셋이다. 전금을 아래로 두었고, 육관을 폐했으며, 첩에게 포를 짜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인하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허기를 만들었으며, 역사를 허용했으며, 원거를 제사지냈으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지혜롭지 못한 점이다.
臧文仲, 其不仁者三, 不知者三. 下展禽, 廢六關, 妾織蒲, 三不仁也. 作虛器, 縱逆祀, 祀爰居, 三不知也.
이 공자의 장문중에 대한 평론의 말은 『경(經)』 중에 문공이 희공(僖公)을 앞 군주인 민공(閔公)보다 높이어 태묘에서 합사(合祀)를 한 사건에 대한 비판으로서 『좌전』에 자세한 주석이 나오고 있는 맥락 속에서 인용되고 있다. 사실 앞에서 삼환(三桓)의 대두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2-5),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문공이 희공을, 어려서 살해되고 만민공보다 높인 것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민공과 희공은 항렬이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逆祀)일 뿐이라고 『좌전(左傳)』은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는 이러한 문공의 행위를 방조한 당대의 재상 장문중을 역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삼불인(三不仁)은 무엇인가? 그 첫째가, ‘하전금(下展禽)’이다. 전금(展禽)은 유하혜(柳下惠)의 본명이다. 전(展)이 성(姓)이고 금(禽)이 그의 자(字)며, 명(名)은 획(獲)이다. 다시 말해서 유하혜를 등용하지 않은 것이 그 첫째 불인(不仁)이라는 것이다. ‘폐육관(廢六關)’은 여섯 개의 관문을 폐지시켜 버려서 국내의 치안을 망쳐 놓았다는 것이다. 혹자는 ‘폐육관(廢六關)’이란 치육관(置六關)의 뜻이며, 그것은 장문중이 여섯 개의 관소(關所)를 창설하여 관세(關稅)의 수익을 올려 인민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든 것을 일컫는다고 주석한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불인(不仁)이다. ‘첩직포(妾織蒲)’ 집안의 여자들에게 창포부들의 대를 이용하여 돗자리를 생산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가 영리사업에 열중하여 백성들과 이(利)를 다투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문중의 세 번째 불인(不仁)이다.
‘작허기(作虛器)’란 바로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거채(居蔡), 산절(山節), 조절(藻梲)을 가리킨다. 즉 쓸데없는 기물들을 만들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문중이 지혜롭지 못한[不知] 첫 이유이다. ‘종역사(縱逆祀)’는 바로 희공(僖公)과 민공(閔公), 이묘(二廟)의 위치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부지(不知)이다. ‘사원거(祀爰居)’ 원거(爰居)를 제사지냈다는 뜻인데, 원거는 일종의 특이한 해조(海鳥)인데 이 해조가 노나라의 동문 밖에 왔을 때 장문중이 이를 신비롭게 여겨 이 새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종교제식을 일삼는 것이니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지혜롭지 못 한 점이다.
그러나 『좌전』의 장문중에 대한 기록은 공자의 말대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장문중은 춘추(春秋)시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로서 정자산과도 같은 합리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있는 훌륭한 정치가였음에는 부인할 여지가 없다. 희공(僖公) 21년(BC 639) 여름에 노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희공은 이에 절름발이 불구의 무당[巫尫]을 불에 태워 희생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절름발이 무당 때문에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양 역사에서 보는 위치헌트(witch hunt)와 거의 동일한 상황이었다. 이때 장문중은 이를 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웅변하는 것이었다.
장문중이 말하였다: “이런 짓은 결코 가뭄에 대비하는 방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내성과 외곽성을 수리하시고, 음식을 질소하게 줄이며, 모든 쓰임새를 검약케 하옵소서. 그리고 농사일에 사람들이 전념케 하며 그들이 맡은 바 직분에 충실토록 권면하옵소서. 그리고 서로 골고루 나누어 먹도록 권고하옵소서. 이런 일들이야말로 가뭄에 대비하여 힘쓸 일들일 뿐이외다. 무당이 뭔 나쁜 짓을 했으며, 도대체 그를 죽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늘이 그를 죽이려 했다면, 애당초 그를 이 세상에 낳게 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가 만약 가뭄을 들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한다면, 그를 불태우면 가뭄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옵니다.” 희공이 이 말을 듣고 따랐다. 이 해에 흉년이 들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臧文仲曰: ‘非旱備也. 脩城郭, 貶食省用, 務穡勸分, 此其務也. 巫尪何爲? 天欲殺之, 則如勿生. 若能爲旱, 焚之滋甚.’ 公從之. 是歲也, 饑而不害.
중국문명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일절이라 하겠다. 공자가 태어나기 이미 1세기 전에 이미 이러한 인문주의의 토대가 사회적 상식으로, 더구나 권력자들의 사이에서 통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고매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르네쌍스 이래 과학의 법칙적 보편주의가 세계이해의 합리적 축으로서 자리잡기 이전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예리한 세태비판이었다. 종교의 질곡에 빠져있는 우리사회는 아직까지도 이러한 장문중의 합리주의를 실천하고 있지를 못한 것 같다.
공자는 아마도 장문중의 합리주의적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합리주의적 정신의 구현 못지않게, 사회적 리더에게 필요한 어떤 도덕적 삶의 자세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僭)을 하지 말라는 예악(禮樂)의 명제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팔일(八佾)」의 첫 장의 정신과 상통한다.
‘梲’은 장열(章悅) 반이다. ‘지(知)’는 거성이다. ○ ‘장문중(臧文仲)’은 노나라 대부 장손씨(臧孫氏)이다. 이름은 진(辰)이다. ‘거(居)’는 보관한다[藏]는 뜻과 같다. ‘채(蔡)’는 큰 거북이다. ‘절(節)’은 기둥머리의 두공(斗栱)이다. ‘조(藻)’는 화려한 수초의 이 름이요, ‘절(梲)’은 대들보 위에 있는 동자기둥이다. 아마도 큰 거북껍질을 보관해두는 방을 만들면서 기둥머리 두공에는 산모양을 조각하고, 대들보 위 동자 기둥에는 수초를 그려놓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장문중을 지혜롭다고 하였다. 공자께서는 인간의 도의를 힘쓰지 아니 하고 귀신에게 더럽게 아첨함이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 2년조에 ‘쓸데없는 기물을 만들다[작허기(作虛器)]’라 한 것이 바로 이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梲, 章悅反. 知, 去聲. ○ 臧文仲, 魯大夫臧孫氏, 名辰. 居, 猶藏也. 蔡, 大龜也. 節, 柱頭斗栱也. 藻, 水草名. 梲, 梁上短柱也. 蓋爲藏龜之室, 而刻山於節, 畫藻於梲也. 當時以文仲爲知, 孔子言其不務民義, 而諂瀆鬼神如此, 安得爲知? 『春秋傳』所謂作虛器, 卽此事也.
○ 장자가 말하였다: “절(節)에 산모양을 조각하고, 절(梲)에 수초를 그려놓고,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방을 따로 만들고, 원거(爰居)라는 새에게 제사지낸 뜻이 모두 지혜롭지 못함에 귀결된다는 것은 너무도 정당하다.”
張子曰: “山節藻梲爲藏龜之室, 祀爰居之義, 同歸於不知宜矣.”
여기 장자는 송나라 유학 선하(先河)인 장횡거(張橫渠, 장 헝취, Zhang Heng-qu, 1020~1077)이다. 섬서성 봉상부(鳳翔府) 미현(眉縣)출신. 그의 학문을 지명을 따라 관학(關學)이라고 부른다. 나는 횡거의 학문이 이정(二程)의 학문보다 훨씬 더 웅혼하고 포괄적이며 유학의 본질에 더 접근해있다고 생각하지만 주희는 정이천을 자기 학문의 적통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장횡거의 학문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횡거의 성론(性論)에 있어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도덕적 논의만을 취할 뿐이며 횡거의 우주론적인 기철학적 태허관(太虛觀)을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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