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8. 영윤인 자윤은 충성스럽고 진자문은 청렴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8. 영윤인 자윤은 충성스럽고 진자문은 청렴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0:40
728x90
반응형

 18. 영윤인 자윤은 충성스럽고 진자문은 청렴하다

 

 

5-18 자장이 여쭈었다: “영윤 자문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는데도, 그때마다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그때마다 서운해 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아보던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새로 부임해온 영윤에게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충성스럽다 할 만하다.”
5-18.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하고 다시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까지야 말할 수 있으리오?”
: “仁矣乎?” : “未知, 焉得仁?”
 
자장은 또 여쭈었다: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 10승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부를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 나라 권력자들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다시 한 나라에 이르러 또 말하기를, ‘이 나라 권력자들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청백하다 할 만하다.”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하고 다시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 까지야 말할 수 있으리오?”
: “仁矣乎?” : “未知. 焉得仁?”

 

공자 당시에 유명했던 전설적 인물들에 대한 평론이 계속되고 있다. 영윤(令尹)이란 초()나라에서만 쓰는 관직명으로 타국의 상() 또는 상국(相國)에 해당된다. 군정(軍政)의 대권을 장악한 수상이다. 자문(子文)의 성()은 투()이며 그 이름은 누오도(穀於菟)라 한다. ()라는 성도 낯설고 이름도 낯설은 것은 초나라의 방언의 음사(音寫)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춘추 초기, ()의 문공(文公)이 활약하던 시대의 인물이다. 낯선 초나라의 인물이 여기 평가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역시 이 파편이 초나라와 교통이 빈번해진 후대에 형성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케하지만, 춘추 초기부터 이미 초나라는 중원에서 그리 먼 나라는 아니었다.

 

좌전선공(宣公) 4(BC 604) 조에 보면, 투백비(鬪伯比)라는 인물이 운() 나라에서 길러졌는데, 그 투백비가 운나라의 공주와 간통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러자 그 공주의 엄마는 군주의 질책이 두려워서 그 아들을 몽()이라는 습지에다가 내다 버렸는데, 호랑이가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운나라의 군주가 사냥을 나갔다가 이 광경을 목도하고 놀래 돌아와, 부인에게 다그치니 그 부인이 사실을 직고하였다. 그래서 그 아기를 다시 데려와 기르게 하였던 것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젖먹이는 것을 누()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於菟)라 한다. 그래서 그 아기의 이름을 누오도(穀於菟)초나라 방언의 음사, 혹설에 의하면 곡()은 구()로 발음된다고도 한다. 그러면 구오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라 하였고, 그의 딸을 투백비에게 시집보내었다. 그래서 누오도는 운나라의 공실에서 떳떳하 게 자라났고, 이 누오도가 후에 초나라의 영윤 자문(子文)이 된 것이다.

 

좌전장공(莊公) 30(BC 664)조에는 누오도가 초나라의 영윤이 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나라의 공자이며 영윤인 자원이 정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왕궁에 머물면서 문공의 부인인 식규를 유혹하려 하였다. 그러자 투사사가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하니 오히려 투사사를 잡아 손에 수갑을 채 우는 형벌을 가했다. 가을에 신 고을의 공()이었던 투반이 영윤 자원을 죽여버렸다. 이에 투누오도가 영윤이 되었다. 누오도는 자기 집 재산을 헐어내어 초나라의 재정적ㆍ정치적 파국을 해결하였다.

楚公子元歸自伐鄭, 而處王宮. 鬪射師諫, 則執而梏之. , 申公鬪班殺子元. 鬪穀於菟爲令尹, 自毁其家, 以紓楚國之難.

 

 

이것은 공자가 태어나기 113년 전의 일이다. 자문(子文)은 노장공(魯莊公) 30년에 초나라의 영윤이 된 이래 노희공(魯僖公) 23년에 이르기까지, 28년 동안 여러 번 영윤직을 사양하고 또 다시 맡고 했던 것 같다. 여기 삼사(三仕)’, ‘삼이(三已)’라는 표현에서 ()’이라는 숫자는 많은 횟수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수일 뿐, 그것이 반드시 정확하게 세 번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국어(國語)』 「초어(楚語)3에는 옛날에 투자문은 세 번이나 영윤 자리를 그만두었는데, 그는 영윤 자리에 있는 동안 단 하루도 자신을 위하여 녹을 받지 않았다[석투자문삼사영윤(昔鬪子文三舍令尹), 무일일지적(無一日之積)]’이라는 표현이 있다. 지문이 얼마나 철저하게 백성들을 위하여 빈털터리로만 살았는지를 묘사하는 일화가 국어(國語)에 실려있다.

 

좌전희공(僖公) 23(BC 637) 조에는 초나라의 성득신(成得臣, 이가 곧 자옥子玉이다)이 진()나라가 송()나라와 내통하고 있어 이를 응징하여 진()나라를 쳤다. 그리고 초()와 이()의 땅을 빼앗고 돈()에다 성을 쌓고 돌아갔다. 영윤이었던 자문은 이것이 성득신의 공이라 여기어 그로 하여금 영윤이 되게 하였다. 그러자 초나라의 대부 숙백(叔伯), 원려신(薳呂臣)이 깜짝 놀라, “당신께서는 도대체 이 나라를 어찌 하시려는 겁니까[子若國何]?” 하니, 자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나라를 평온케 하려하는 것이다. 대저공을 세운 자에게 귀한 벼슬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조용히 있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소?

吾以靖國也. 夫有大功而無貴仕, 其人能靖者與有幾.

 

 

이 신진의 재상 자옥(子玉)은 유능함이 지나쳐 자기 실력을 너무 믿고 국제역학을 오판하여 드디어는 초()나라가 진()과 성복(城濮)에서 싸웠을 때 대패의 고배를 마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자문(子文)의 일면적인 행동방식이, 공자가 자문(子文)을 폄하하게 만든 한 측면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본다면, 이 장의 질문자는 자장이다. 역시 자장의 논어속에서의 역할은 좋은 질문자(a good questioner)라는 우리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2-18). 자문은 분명 사심을 위하여 산 사람은 아니었다. 국어(國語)에는 자문(子文) 자신의 말로써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수 록되어 있다.

 

 

대저 정치에 종사한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비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빈털터리로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부를 취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백성들을 근면케 일하게 하는 척하면서 나 혼자만의 배를 불리고 앉아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夫從政者以庇民也. 民多曠也, 而我取富焉, 是勤民以自封.

 

 

자문은 수상직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 최고의 관직을 타인에게 양보하였다. 영윤이 될 때에도 기쁜 기색이 없었고 영윤을 그만둘 때에도 슬픈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하는 영윤에게 자기가 해오던 일을 상세히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어떻습니까? 하고 자장은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자장의 기대 만큼 시원치 않다. “그는 충성스럽다고 말할 만하다.” 자장은 되묻는다. 겨우 그 정도의 평가입니까?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최고의 덕목인 인함에 부응할 만한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최후의 한마디를 던진다: “미지(未知). 언득인(焉得仁)?”

 

이 마지막 구절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첫째의 해석은 ()’5-17()’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직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 그를 인하다 할 수 있으리오?’가 된다.

두 번째의 해석은, ‘미지언득인(未知焉得仁)?’을 붙여 풀이하는 것이다. ‘그가 과연 어떻게 인할 수 있는지를 내 아직 알 수가 없다가 될 것이다.

세 번째의 해석은, ‘미지(未知)’언득인(焉得仁)?’을 단절시키고 언득인(焉得仁)?’을 충()이라는 평가 이상의 평가는 보류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푼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까지야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에게서 ()’이란 지고의 덕목이다. 그것은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감수성이며, 어느 한 도덕성의 극단적 일면만으로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영윤 자문은 분명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덕성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자기의 주관적 한 가치의 달성에만 갇혀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코 째즈의 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초나라에서 위대한 인물로 후세에 길이길이 기억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좌전선공(宣公) 4(BC 605)조에 보면, 자문의 손자인 극황(克黃)이 잠윤(箴尹)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여행을 떠났다. 제나라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송나라에 이르렀을 때, 본국인 초 나라에서 대란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란인즉슨, 바로 자문의 집안인 약오씨(若敖氏)의 반란이었고, 이 반란은 초나라 군주에 의하여 진압되었던 것이다. 잠윤 극황을 따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본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충고하였다. 그러자 잠윤 극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의 명령을 버리면 그 누가 날 또 받아주겠는가? 군주는 하늘이거늘 신하인 내가 그 하늘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棄君之命, 獨誰受之? 君天也, 天可逃乎]!” 그리고 바로 돌아가 복명하고는 자진하여 형벌을 관장하는 사패(司敗) 앞에 묶인 몸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초왕은 그의 조부 자문(子文)이 초나라를 다스린 공을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문의 후손이 이 나라에서 없어진다면, 어떻게 착함을 신하들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子文無後, 何以勸善?

 

 

그리고 극황을 그의 관직에 복직시켰고 그의 이름을 생()이라고 고치었다. 이 고사만 보아도 자문이 얼마나 초나라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의 이야기는 제()나라의 진문자(陳文子)로 옮아가고 있다. 진문자는 자문보다는 공자에게서 가까운 시대의 사람이었다. 좌전에는 양공(襄公) 22(BC 551), 그러니까 공자가 태어난 해로부터 양공 28, 공자 7세의 시기까지 거의 매년 이 진문자라는 인물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있다. 문자(文子)는 시호이며, 그의 실명은 진수무(陳須無)이다.

 

최자시제군(崔子弑齊君)’이라는 것은, BC 5485월 을해(乙亥)의 날에 제나라의 가로(家老), 최저(崔杼)가 그의 군주 장공(莊公)을 죽인 사건을 의미한다. 여기 ()’라는 표현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였을 때 쓰는 말로서 하극상의 참)을 의미한다. 강한 폄하를 나타내는 가치술어이다. 그 사건의 전말은 좌전양공 25년조와 사기(史記)』 「제태공세가에 잘 기술되어 있다.

 

장공(莊公) ()은 제나라의 패자 환공의 현손(玄孫)이다. 그러나 이미 정권은 궁중을 떠나 중신(重臣)인 최저의 손아귀에 있었다. 장공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의 아버지 영공(靈公)의 유언을 무시하고 최저가 옹립한 군주였던 것이다. 최저의 부하 중에 동곽언(東郭偃)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동곽언의 여동생이 대단한 미모의 여인이었다좌전에는 누이로 되어 있고 사기에는 여동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제나라의 대부 당공(棠公)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당공이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최저는 동곽언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당읍으로 조문을 나갔다가 그만 과부가 되어버리고 만 미모의 여인에게 홀려버리고 만다. 최저는 이 동곽녀(東郭女)동곽강(東郭姜), 당강(棠姜)으로도 불리운다를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동곽언에게 조른다. 동곽언은 처음에는 양가가 조상이 같은 동본임을 들어 결혼을 거절했으나 결국 강청에 못이기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곽녀가 제 나라 군주인 장공의 눈을 또다시 홀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장공은 이 동곽녀와 사통하기 위하여 노상 최저의 집을 명분 있을 때마다 들락거렸다. 장공은 동곽녀와 사통할 때마다 최저의 관()을 들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주곤 하였다. 분노한 최저는 장공이 진()나라를 칠 때 진나라와 공모하여 장공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전쟁의 책임을 군주에게 덮어씌워 죽이게 되면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우습게 찾아왔다. 이웃의 소국인 거()나라의 군주가 내조(來朝)하여 리셉션이 5월 갑술일(甲戌日)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저는 병을 핑계 대고 집에 꼭꼭 처박혀 있었고 리셉션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을해일(乙亥日)에 지더린 장공은 동곽녀가 그리워서 최저의 병문안을 핑계삼아 최저의 집으로 행차를 하였다. 먼저 최저의 방에 들어가 병문안을 하고 나와서는 최저의 처를 찾았다. 그러나 최저의 처는 장공을 따르는 척하다가 내실로 새어 들어가 최저와 함께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질 않았다. 장공은 마루기둥을 껴안고 재회를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하는 노래를 불렀다.

 

평소 장공에게 채찍질을 당한 것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환관 가거(賈擧)는 장공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대문 밖에서 막아두고 들어와 대문을 잠그었다. 그러자 무기를 든 최저의 부하들이 마루기둥을 껴안고 노래 부르는 장공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장공은 절망감을 감지하고 누대 위로 올라가 화해를 청하였으나 그들이 들어줄 리 만무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허락치 않았다. 그렇다면 종묘에서 자살케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그것 역시 들어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은 음란한 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뿐이며 그 외의 어떤 명령도 알지 못한다고 외쳤다. 장공이 담을 넘어 도망가려 할 때, 화살이 장공의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져 내리자 그들은 곧 시퍼런 칼날을 내리쳤다.

 

이 당시 재상은 그 유명한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晏嬰)이었다(5-16에서 언급된 인물). 안영은 이 시해의 소식을 듣고 최저의 집으로 달려왔다. 최저의 저택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영은 대문 밖에 서서 크게 소리쳤다.

 

임금이 사직을 위해서 죽으면 신하도 마땅히 따라 죽어야 한다. 임금이 사직을 위해 도망치면 신하도 마땅히 따라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임금이 자기 일신의 사정(私情) 때문에 죽거나 도망친 것이라면, 그의 사적인 총신이 아닌 바에는 따라 죽고 싶어도 죽을 명분이 없고 따라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명분이 없다! 그렇다고 내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으리오!” 안영의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냉정한 것이다. 오랜 시간 군주를 섬긴 달인의 태도가 엿보인다. 용기가 없고 이기적인 듯이 보이지만 자기원칙이 있는 발언이었다. 이렇게 소리치자 대문이 열렸다. 안영은 안에 들어가 장공의 시신에 머리를 얹고 곡을 한 다음 예 법에 따라 세 번 애통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몸짓을 하고 나왔다. 유유히 걸어가는 안영의 등뒤에서 최저의 부하들이 소리쳤다: “죽여버립시다[必殺之].” 이때 최저는 말하였다: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그를 놓아주면 민심을 얻을 수 있다[民之望也, 舍之得民].”

 

제나라의 태사(太史)최저가 장공을 시해하다[崔杼弑莊公]’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태사를 죽였다. 그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가 또 그를 죽였다. 그 막내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놓아주고 말았다. 곡필(曲筆)을 모르는 사관(史官)의 치열한 정신을 나타낸 유명한 일화이다.

 

진문자 또한 제나라의 대부였다. 10()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 40마 리를 소유하는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0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도의 부라는 것은 당대에는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 최저의 발호하는 더러운 꼴을 보기 싫어 다 차버리고 그는 타국으로 갔다. 그러나 타국으로 갈 때마다 최저와 같은 꼴을 목격하고 계속 그 나라를 떠나고 만다. 그만한 인물이면 평가해줄 만하지 않는가? 공자는 깨끗하다[淸矣]’고만 말하고 평가를 자제한다. 인하지는 않습니까? ‘어찌 인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는가[焉得仁]?’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삶의 자세만을 가지고 우리가 인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더러울 때는 더럽게 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자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생각난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15)

孰能濁以靜之徐淸?

 

 

그런데 한 가지 췌언을 덧붙이자면, 좌전의 기록상으로 보면 진문자는 최저가 제나라 군주 장공을 시해한 후에도 제나라에서 건재했으며 계속 정치에 관여했다. 다시 말해서 논어의 이 장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 두 기록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방법은, 진문자가 제나라를 떠난 것은 장공 시해 직후의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며 결국 다시 돌아와 제나라에서 활약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는 글자 그대로 뜻을 새긴다. ‘은 어건(於虔) 반이다. 영윤(令尹)’은 관직명이다. 초 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집정자(執政者)이다(수상 벼슬에 해당), ‘자문(子文)’은 성이 투()이요, 이름은 누오도(穀於菟)이다. 그의 사람됨이 희노(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물()과 아() 사이에 간격이 없다. 나라가 있음만을 알고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장(子張)이 그 사람이 인()의 경지에 이르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 번이나 수상 자리에 오르고 세 번이나 사임하고, 자리를 물려줄 때는 새 사람에게 정사를 자세히 가르쳐준 것이, 참으로 천리(天理)에서 나와 인욕의 사가 전혀 없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부자께서는 그 충성만을 허여하시고 그 인함에 관해서는 삼가신 것이다.

, 如字. , 於虔反. 令尹, 官名, 楚上卿執政者也. 子文, 姓鬪, 名穀於菟. 其爲人也, 喜怒不形, 物我無閒,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 其忠盛矣, 故子張疑其仁. 然其所以三仕三已而告新令尹者, 未知其皆出於天理而無人欲之私也. 是以夫子但許其忠, 而未許其仁也.

 

()’은 거성이다. 최자(崔子)’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이 저()이다. ‘제군(齊君)’이란 제나라의 장공(莊公)을 가리킨다. 이름이 광()이다. ‘진문자(陳文子)’도 또한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이 수무(須無)이다. ‘십승(十乘)’40필이다. ‘()’는 떠나가는 것이다. 문자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어지러운 세태를 버리고 떠났으니, 청백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과연 의리의 당연함을 보고 초탈하여 미련이 없는 것인지, 이해의 사사로움 때문에 부득이한 행동인지 라 아직도 원망과 후회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바 없다.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특별히 그 청백함만을 허여하시고 인함에 관하여서는 삼가신 것이다.

, 去聲. 崔子, 齊大夫, 名杼. 齊君, 莊公, 名光. 陳文子, 亦齊大夫, 名須無. 十乘, 四十匹也. , 去也. 文子潔身去亂, 可謂淸矣, 然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 而能脫然無所累乎? 抑不得已於利害之私, 而猶未免於怨悔也. 故夫子特許其淸, 而不許其仁.

 

내가 나의 스승 이연평 선생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행동이 리()에 들어맞고 사심(私心)이 없으면 그것이 곧 인()이다.” 지금 이 스승의 말씀으로써 자문(子文)과 문자(文子)의 일을 관찰해보면, 자기 행동을 제어하는 품격의 고매함은 대단한 것이나, 그 마음이 진실로 리에 들어맞아 사심이 없는 것인지를 모두 찾아보기 어렵다. 자장이 인의 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구차스럽게 극복하는 것만 좋아하여 결국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으로 믿었으니, 부자께서 허여하지 않으심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愚聞之師曰: “當理而無私心, 則仁矣. 今以是而觀二子之事, 雖其制行之高若不可及, 然皆未有以見其必當於理, 而眞無私心也. 子張未識仁體, 而悅於苟難, 遂以小者信其大者, 夫子之不許也宜哉.”

 

독자는 이와 관련하여 윗 장(5-7)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부지기인(不知其仁)]’이라고 하신 말씀과, 후편(14-2)인한지는 내 잘 모르겠다[인즉오부지(仁則吾不知)]’라 하신 말씀과, 그리고 또 미자삼인(三仁)’(18-1)과 백이ㆍ숙제의 일(5-22, 7-14, 16-12, 18-8)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밝혀 인의 뜻됨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다른 출전(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지고 이를 살펴보면, 자문이 초나라에서 수상을 지낼 적에 획책한 일들이 천자를 참칭하고 중원[]을 어지럽히는 일 아님이 없었고, 진문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할 때에 이미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고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저버렸으며, 또한 몇 년이 안 되어 다시 제나라로 돌아갔으니, 그 인하지 못함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讀者於此, 更以上章不知其仁”, 後篇仁則吾不知之語幷與三仁夷齊之事觀之, 則彼此交盡, 而仁之爲義可識矣. 今以他書考之, 子文之相楚, 所謀者無非僭王猾夏之事. 文子之仕齊, 旣失正君討賊之義, 又不數歲而復反於齊焉, 則其不仁亦可見矣.

 

 

주희의 마지막 멘트 속에는 남송정권 주전파의 의분(義憤)이 배어있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