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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6. 공자가 존경하던 선배님 안영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6. 공자가 존경하던 선배님 안영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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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공자가 존경하던 선배님 안영

 

 

5-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안평중(晏平仲)은 사람과 잘 사귀는 구나! 오래 사귈수록 오히려 공경하니.”
5-16.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안평중(晏平仲, 옌 핑쫑, Yan Ping-zhong)이란 공자(孔子)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공자보다 약간 선배며, 자산(子産)보다는 약간 후배인, 당시의 대국 제()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을 가리킨다. ()은 성이요, ()은 이름이요, ()은 시호며, ()은 자이다. 평중(平仲)이 자라는 설도 있다. BC 567년에 제나라에 멸망당한 내()나라의 이유(夷維)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고밀현(高密縣)사람으로 제()나라의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섬겼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그 열전(列傳)에 백이(伯夷)를 제1인물로 다루고, 바로 뒤이어 관중(管仲)안영(晏嬰)을 다룬 관안열전(管晏列傳)을 배열하고 있으니 안영이 차지하는 그 역사적 무게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보다도 앞선 것이다. 사마천의 붓길은 관중 사후 100여 년이 지나 안자(晏子)가 출현하였다고 서막을 깔면서 안영의 생애로 진입하고 있다[後百餘年而有晏子焉].

 

 

안평중 영은 내나라 이유의 사람이다. 제나라 영공ㆍ장공ㆍ경공을 섬겼다. 절약하고 근검함으로써 힘써 실천하는 인물이었기에 제나라에서 중용되었다. 안영은 제나라 재상이 된 후에도 식사에는 육류를 올리지 않고 소찬으로 먹었으며 처첩에게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다. 또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이 하문하시면 공과를 생각치 않고 곧고 바른 말로 응답하고, 하문이 없을 때는 자기 행동을 바르게 하는 데만 힘썼다. 임금의 다스림이 올바를 경우에는 그 명에 순종하고,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실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공ㆍ장공ㆍ경공의 3대에 걸치어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휘날리었다.

晏平仲嬰者, 萊之夷維人也. 事齊靈公莊公景公, 以節儉力行重於齊. 旣相齊, 食不重肉, 妾不衣帛. 其在朝, 君語及之, 卽危言; 語不及之, 卽危行. 國有道, 卽順命; 無道, 卽衡命. 以此三世顯名於諸侯.

 

 

안영열전에 실린 이야기들을 보면 그는 확실히 근검한 인물이었으며, 귀천을 불문하고 인물다운 인물을 꿰뚫어 볼 줄 알고 또 과감하게 등용할 줄을 알았다. 공자와 안영은 실제로 서로 상면한 적이 두 번이나 있는 것으로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기술하고 있다. 그 첫째번 대면은 공자가 재상이 되기 전 35세 때의 일로 기술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정황의 역사적 진실 여부는 가리기가 어려우나, 사마천은 공자가 소공(昭公)삼가(三家)’에게 패망하여 제나라로 망명할 때 공자가 소공(昭公)을 에스코트해서 같이 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여튼 이즈음, 그러니까 공자가 패기에 찬 젊은 나이에 제나라에 가서 역사적 문물을 깊게 공부한 사실이 있다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으며, 그 때에 공자는 특히 제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아악(雅樂), 즉 소악(韶樂)의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삼 개월 동안 육미(肉味)를 잊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그의 예악(禮樂)의 탐구정신을 가리킨 것이다. 이때 공자는 고소자(高昭子)라는 제나라의 대부의 가신(家臣)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 하였다. 드디어 공자는 경공을 만나는 찬스를 획득한다. 경공에게 2미터가 넘는 거구(巨軀), 고례악(古禮樂)의 나라 노()에서 온 패기 찬 유학생인 공자의 모습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이다재상 안영은 키가 작기로 유명하다. 이때 공자는 전도가 창창한, 그러면서 예악(禮樂)에 대한 깊은 견식을 과시하는 통찰력 있는 젊은 석학이었다. 만나자마자 경공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이때 공자는 유려한 언변으로 그의 정치관을 요약한 그 유명한 정명(正名)의 철학을 제시한다.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운 것이 곧 정치의 핵심이외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 말은 상업주의적 치부에만 힘써 도덕적 기강이 해야되어만 가고 있던 선진국 제나라에 대한 공자의 강렬한 도전의 언사였다. 즉 노나라의 예교주의적 전통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는 언명이었던 것이다. 제나라의 문제점은 군()ㆍ신()ㆍ부()ㆍ자()의 모든 명분이 어그러져 가고만 있는 사태에 있다는 것이다. 제 경공은 이러한 공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감복하면서 찬탄의 언사를 휘날렸다: “선재(善哉)! 그대 말이 옳도다!” 그리고 며칠이 있다가 다시 공자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정치에 관해 물었다. 요번에 공자는 지난번의 문화정책적 총론을 보다 구체화시켜, 그의 경제이론을 편다.

 

 

정치의 근본은 재물을 절약하는데 있습니다.

政在節財.

 

 

이것은 곧 제나라의 상업주의적 소비주의 문화가 국가의 재정을 낭비시키고 도덕적 기강의 해체를 초래할 것이라는 역사의 방향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방한 것이다. 이것은 곧 소비문화 이전에 근원적으로 근검절약하는 도덕적 풍토를 제나라에 재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강력한 건의인 것이다. 경공은 노나라의 젊은 현자 공구에게 반하고 만다. 그래서 그를 제나라의 대부로 임용하려 한다. 그에게 니계(尼谿)의 식읍(食邑)을 주어 정치적 세력을 확보해 주려고 한다. 이것은 당시의 재상이었던 안영(晏嬰)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도전이었다. 안영 자신의 생활은 근검절약 했지만, 그는 법가적인 원칙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상업주의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진국 노나라의 예교주의적 모델은 제 나라의 현실에는 적합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공자라는 패기에 찬 젊은 인물의 등용은 필연적으로 그의 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영이 공자의 등용을 저지하여 경공에게 늘어놓은 간언의 내용은 실로 공자가 타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모든 비판의 실마리들을 종합해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 안영의 진언을 통해 당대의 공자 학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실하게 엿볼 수 있다.

 

1) 부유자골계이불가궤법(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

대저 유자들은 말재간이 뛰어나고 융통성을 잘 부려 법으로 규제하기가 어렵다.(이것은 법적 원칙으로 다루기가 어려운 부류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거오자순, 불가이위하(倨傲自順, 不可以爲下);

거만하기가 그지없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으로 부릴 수가 없다.(이것은 자기 철학이 너무 강해서 어떤 관료조직의 기능적 역할을 수행치 못한다는 것이다.)

 

3) 숭상수애, 파산후장, 불가이위속(崇喪遂哀, 破産厚葬, 不可以爲俗);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다한다고 하면서 파산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장례를 후하게 치르니 이들의 주장은 도저히 풍속으로 삼을 수 없다.(이들은 예치주의를 숭상하는데, 무속에서 출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례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신봉하는 후장의 풍속은 너무도 비경제적이다. 이것은 공자의 예악사상을 실용주의적 경제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4) 유세걸대, 불가이위국(游說乞貸, 不可以爲國).

도처에 유세 다니면서 거저 얻어먹으려 하고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니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 없다.(이것은 공자의 집단이 근원적으로 의 집단이며 의 집단이며, 일정한 소속감이 없는 자유로운 유세집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일정한 10 ‘나라에 대한 로얄티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5) 자대현지식, 주실기의, 예악결유한. 금공자성용식, 번등강지례, 추상지절, 루세불능탄기학, 당년불능구기례. 군욕용지이이제속, 비소이선세민야(自大賢之息, 周室旣義, 禮樂缺有閒. 今孔子盛容飾, 繁登降之禮, 趨詳之節, 累世不能殫其學, 當年不能究其禮. 君欲用之以移齊俗, 非所以先細民也).

현자가 사라진 이래로 주 왕실이 이미 쇠미해졌고, 예악이 붕괴된 지 오래 되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성대히 꾸미고 의례절차를 까다롭고 번거롭게 하여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요하고 있으나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다 해도 그 예를 다 터득할 수 없다. 군주께서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신다면 그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는 예악주의적 복고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주왕실의 권위가 붕괴된 패자의 시대에 그러한 복고주의적 예악사상은 구차스러운 번문욕례만을 증가시키는 꼴이 되어 도무지 제나라와 같은 강대국의 현실적 감각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공자는 실기(失期)의 고배를 마셨지만 실상 이러한 실기야말로 공자를 더 큰 인물로 성장시키는 계기를 부여했음에 틀림이 없다. 만약 이때 공자가 제나 라의 대부가 되었다면 공자는 지금 열전(列傳)에 실려있는 그 수많은 강호의 영 웅호한의 한 사람 이상의 그림자를 역사에 드리우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의 안영과의 재회는, 공자가 후에 노나라의 대사구가 되었을 때 국제적 공식모임에서 이루어진다. 유명한 협곡(夾谷)의 회맹사건이 그것이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세가정공(定公) 10 춘조(十年春條)에 실려있다.

 

공자가 젊었을 때 제나라에 가서 경공을 만났고 또 대부(大夫)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호기(好機)가 과연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가의 기록에 실려있는 것과도 같은 정확한 안영의 비판에 의하여 공자가 실기를 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세가의 기록을 진실로서 수용한다면, 여기 이 장의 안영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매우 관대한 것이다. 즉 개인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한 인간과 이해관계로 시달렸든지 간에 그 인간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초연한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비록 불이익을 주었다 하더라도 안영이라는 재상은 훌륭한 정치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수많은 경공과의 일화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뭔가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장면으로서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경공은 천성이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밤 경공은 행락의 술자리를 안영의 집으로 옮기고 싶어했다. 경공이 행차를 하고 선봉대가 안영집에 당 도하자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임금님 납시오!” 안영은 서둘러 조복을 단정히 차려 입었다. 그리고 대문 앞에 공수하며 서서 아뢰었다: “제후께서 무슨 변고라도 생기셨나이까? 국가에 무슨 대사라도 발생했단 말입니까?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때 아닌 야밤중에 굴욕적으로 신하의 집에 납시었나이까?” 경공이 말하였다: “이 밤중에 술맛이 꿀맛 같고, 금석의 음악이 묘음을 발하고, 내 차마 홀로 즐길 수 없어 그대와 향락코자 이처럼 찾아왔노라.” 안영은 정중히 답하여 아뢰었다: “술좌석의 돗자리를 깔고 보궤를 진설하는 일은 나라에 전담하는 인물이 따로 있습니다. 신은 이 밤에 임금과 더불어 할 수 없나이다” [내편잡(內篇雜)12(第十二)],

景公飮酒, 夜移于晏子, 前驅款門曰: “君至!” 晏子被元端, 立于門曰: “諸侯得微有故乎? 國家得微有事乎? 君何爲非時而夜辱?” 公曰: “酒醴之味, 金石之聲, 願與夫之樂之.” 晏子對曰: “夫布薦席, 陳簠簋者, 有人, 臣不敢與焉.”

 

 

이 뒤에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둔다. 그러나 한밤중에 술항아리를 들고 신하의 집을 찾아가는 국군의 모습이나, 예를 갖추어 문간에 서서 임금을 쫓아버리는 신하, 안영의 모습에서 우리는 춘추시대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안자춘추(晏子春秋)가 육조시대의 위작이라고 간주했었는데 최근 여기저기서 안자춘추의 죽간이 출토되면서은작산한묘(銀雀山漢墓)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완정하다, 금본이 선진고경의 자태를 충분히 보존하고 있음이 밝혀졌고, 안자춘추는 이미 직하학파의 사람들로부터 전승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하여튼 상기의 고사에서도 안영의 올곧은 인품의 체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본 장에서도 그의 가치는 접인(接人)관계에서 증명되고 있다.

 

선여인교(善與人交)‘에서 본동사를 선()으로 볼 수도 있고 교()로 볼 수도 있다. ()을 본동사로 보면 안영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잘한다의 뜻이 되고, ()를 본동사로 보면 안영은 사람과 잘 사귄다의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전후의 문맥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구이경지(久而敬之)’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주어를 안영 자신으로 보는 것이요, 하나는 주어를 타인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을 따르면 안영은 사람을 오래 사귈수록 더욱더 공경스럽게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친해지고, 또 친함이 오래되면 그 인간의 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무감각해지기 쉽고, 또 지켜야 할 예의를 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친해질수록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요, 친해질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친하던 친구가 같이 하숙방을 쓰면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 통례인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신 주의 해석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안영은 사람을 오래 사귀면 오래 사귈수록 상대방이 그를 공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간 계통의 고사본은 이 부분의 본문이 아예 구이인경지(久而人敬之)’로 되어있다. 이것도 뜻에는 대차가 없으나, 교제를 오래 할수록 타인에게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제가 오래가면 그 인간의 일상생활의 여러 약점이 엿보이게 마련이고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로 사이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오래 사귀어도 사람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 인간의 됨됨이가 매우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떤 원칙에서 벗어나는 행동거지가 없는 철저한 자기규율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자가 아니면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안평중(晏平仲)’은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이 영()이다.

晏平仲, 齊大夫, 名嬰.

 

정이천이 말하였다: “사람이란 사귀기를 오래하면 공경이 쇠해지게 마련이다. 오래 사귈수록 능히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훌륭한 까닭이다.”

程子曰: “人交久則敬衰, 久而能敬, 所以爲善.”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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