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4. 말 잘하는 것과 아리따움을 칭송하는 세상을 미워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4. 말 잘하는 것과 아리따움을 칭송하는 세상을 미워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8:44
728x90
반응형

 14. 말 잘하는 것과 아리따움을 칭송하는 세상을 미워하다

 

 

6-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축타의 말재주와 송조의 미모가 없으면 요즈음 세상에선 환난을 면키 어렵다.”
6-14. 子曰: “不有祝鮀之佞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

 

공자가 어지럽고 더럽게 느껴지는 세상을 한탄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해석에는 제설이 분분하다. 더러운 세상이 정말 아니꼬와서 두고 못 보겠다는 식의 분노가 서린 공자의 푸념이야말로 공자를 공자다웁게 만드는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메시지도 성인의 말씀으로서 거룩하게만 새기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발랄한 로기온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미 서막에서 이야기했지만 송조는 송나라의 미모의 공자로서 위나라를 뒤흔든 색골 중의 색골, 호색마로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 또한 음녀(淫女)로서 화려한 일생을 산 여자였는데, 남자는 송나 라 여인이었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로서 세련된 문화전통을 보지(保持)하고 있어 무엇이든 난숙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음식도 남녀도 섹스도 세련되게 질탕한 느낌을 준다. 송조와 남자는 당시의 그런 프로토타입의 대명사였으며 논밭에서 일하는 송나라 아낙들의 노동요 속에도 이들의 일화가 자주 등장했다.

 

암퇘지야 암퇘지야

씨받이가 끝났걸랑

토실토실 수퇘질랑

돌려다오 돌려다오

 

여기 암퇘지는 물론 남자다. 그리고 수퇘지는 송조(宋朝). 씨받이가 끝난 수퇘지라도 돌려주면 그 녀석하고 재미 한번 봐야겠다는 식의, 민중의 야유가 섞여있다. 어느 시공을 막론하고 민요처럼 리얼한 것은 없다. 여기 이 민요에 이미 남자가 위령공에게 시집가기 전에 송조와 놀아났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남자는 위령공에게 시집온 후로도 불민하고 어리숙한 위령공을 졸라 송조를 위나라로 불러 대부의 작위를 준다. 물론 두 사람은 질탕하게 놀아난다. 송조가 놀아난 것은 비단 남자에 그친 것이 아니다. 남자의 시어머니인, 그러니까 위령공의 아버지인 양공(襄公)의 부인 선강(宣姜)과도 정을 통했던 것이다. 유보남은 선강이 통정한 공자조(公子朝)’와 송조가 한 사람이라는 설을 펴지만 요시카와는 아무리 송조가 미남이라지만 2대의 왕후를 한꺼번에 희롱할 수야 있겠냐고, 그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도 근친상간의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만큼 난잡한 이스라엘족속의 역사요, 춘추의 세계에서도 그러한 난잡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송조가 두 후비와 통정을 한다는 것은 당대 특수계층의 성관념으로 볼 때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공자가 제1차로 위나라에 오래 체류한 시기가 대체로 BC 497~493년 사이다. 그리고 제2차로 오래 체류한 시기가 BC 489~484년이다. 이 시기는 위나라에서 송조가 위세를 펴고 설치던 시기였다. 송조는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다음해, 그러니까 BC 483년경 위세를 잃고 출분(出奔)한다.

 

그런데 여기 또 등장하는 축()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축타(祝鮀)로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라의 대부로서 자()가 자어(子魚)이다. 그는 위나라의 대축(大祝)이며, 종묘의 신위와 대제를 관장하는 높은 직위에 있었으며 위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춘추좌씨전정공(定公) 4 3월조에 보인다. ()나라 문공(文公)이 소릉(召陵)에서 중원의 모든 제후들을 집합시켜 초()나라를 정벌할 것을 상의하는 대회맹을 했다. 이때 위령공은 축타를 데리고 간다. 이 회맹에서 위나라를 채()나라보다 지위를 낮게 세우려하자, 축타는 이 일을 관장하는 주왕실의 장홍(萇弘)에게, 역사적으로 강숙(康叔)의 나라인 위나라가 채숙(蔡叔)의 나라인 채나라보다 높게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관해 거창한 일장연설을 한다. 이 연설로 인해 위나라가 채나라의 상위에 서게 되었다. 위나라사람들은 국가의 체면을 세워준 축타에게 존경의 염을 표했다. 미국쇠고기가 판매되는 데 있어서도 일본의 서열이 한국의 서열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다면, 그로 인한 국민의 좌절감과 수치감은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이러한 회맹에 있어서 영예로운 서열을 차지한다는 것은 위나라와 같이 강대국의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서는 엄청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축타는 정공 4년 소릉의 회맹 사건 이후로는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릉의 회맹이 일어난 것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대사구가 되기도 전인 46세 때의 일이며, 전혀 공자와는 무관한 일이다. 따라서 축타와 송조의 문제는 연대적으로 약간의 시차가 있다. 송조가 설치던 시대는 축타는 이미 저승객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축타는 몸을 버린 적이 없다. 축타는 위나라 사람들의 국민적 영웅이며, 그가 말을 잘했다고 해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고주는 축타를 나쁜 의미 맥락에서 해석치 않는다. 더구나 공자의 말에서 불유(不有) …… 이유(而有) ……라는 구문은 두 개의 문장을 하나의 부정사[]로 묶어버리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공안국(孔安國)은 말한다.

 

 

()’이란 말재주이다. ‘축타(祝鮀)’는 위나라의 대부이며, 그 이름이 자어(子魚)이다. 당시 세상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여기었다. ‘송조(宋朝)’는 송나라의 잘 생긴 남자였는데 호색한으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이 장의 뜻은 이러하다. 마땅히 축타의 말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없고 오히려 송조의 아름다운 겉모양만 가지고 있으니 요즈음 세상의 화를 면키 어렵다는 것이다.

, 口才也. 祝鮀, 衛大夫. , 子魚也. 時世貴之. 宋朝, 宋國之美人也, 而善淫. 言當如祝鮀之佞, 而反如宋朝之美, 難矣免於今世之害也.

 

 

그러니까 축타의 말재주는 없으면서[不有], 송조의 아름다움만 가지고 있으면[而有]’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어차피 세태를 개탄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기생오라비 같은 제비족의 외모에다가 축타의 말솜씨만 갖추어도 세상에서 잘 먹고살 수 있다는 찬사의 메시지로서 역해석이 가능해지므로 도무지 고주의 해석도 찜찜한 것이다. 그래서 주희는 고주를 부정하고 축타의 구재나 송조의 외모가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더러운 세상이라고, 일괄적으로 둘 다 씹어버린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맞을까? 이 장의 해석에 있어서는 우리는 신주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다산도 신주를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문법적 설명을 한다.

 

 

두째 구에 나오는 이유(而有)’혹유(或有)’라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하나의 ()’자가 그 다음의 두 개의 ()’자를 다 지배한다.

而有猶言或有也. 一不字冠兩有字.

 

 

이러한 신주의 입장을 소라이(荻生徂徠)는 고언을 모르는 소치이며, ‘()’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후세의 과도한 해석과는 달리 공자 시대에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송유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일갈한다. 송조의 아름다움도 그렇게 음탕한 뉘앙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멋있는 외관이라는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 당대의 인물들인데 그렇게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다는 등등, 고언은 혼자 다 아는 양 강변한다. 그러나 고문의 대가인 왕인지(王引之)는 오히려 신주의 해석이 고문에 합치한다고 본다.

 

이 공자의 탄식이 위나라에 있을 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돌아온 후, 괴외(남자의 아들)와 그의 아들 첩(: 출공出公)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나긴 싸움의 와중, 송조의 출분(出奔)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자는 세태를 크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축타와 같은 달변일지라도 얄팍한 처세의 방편으로밖에는 인지될 수 없는 세태! 송조의 미모라도 있어야 한 다리 낄 수 있는 세상! 인간의 진실이 사라져가고만 세태를 바라보는 착잡한 심정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나 애공 시대의 공자에게 있어서나 대차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난호면어금지세의(難乎免於今之世矣)’는 실제로 줄여 붙이면 난면금세(難免今世)’가 된다. 그 사이사이에 조사를 넣어 문장의 여유로운 리듬을 살리고 있다. 당시 구어의 맛이 물씬 느껴진다: ‘(NAN)(hu)(MIAN)(yu)(JIN)(zhi)(SHI)(yi).’

 

 

는 도하(徒河) 반이다. ()’은 종묘를 관장하는 벼슬이다. ‘()’는 위나라의 대부이며, 자가 자어(子魚)이다. 구재(口才)가 탁월했다. ‘()’는 송나라의 공자(公子)였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사내였다. 이 장은 쇠퇴해가는 세상에서는 아첨을 좋아하고 외면의 아름다움에만 홀리니, 이것이 아니면 세상의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대저 세상을 서글퍼하신 것이다.

, 徒河反. , 宗廟之官. , 衛大夫, 字子魚, 有口才. , 宋公子, 有美色. 言衰世好諛悅色, 非此難免, 蓋傷之也.

 

 

희의 주석이 간결명료하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