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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2. 정치엔 인재를 구하는 게 먼저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2. 정치엔 인재를 구하는 게 먼저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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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정치엔 인재를 구하는 게 먼저다

 

 

6-12.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제()가 되었다. 공자께서 자유를 만났을 때 물으시었다: “너는 사람을 얻었느냐?”
6-12. 子游武城. 子曰: “女得人焉爾乎?”
 
자유가 대답하였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길을 다닐 적에 골목 지름길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공적인 일이 아니면 한 번도 제 방에 온 적이 없나이다.”
: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

 

공문(孔門)의 활약상의 다양한 면모에 관하여 풍요로운 정보를 제공하 는 위대한 장이라 할 것이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된 것은 애공 12(BC 483) 전후의 일이며 공자의 귀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69세 전후였다. 자유는 사과십철(四科十哲)에 자하와 함께 문학(文學)으로 꼽힌 사람이었다(그에 관해서는 2-7에서 상술). 그러니까 문자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었고, 특히 예약에 밝았다. 그리고 그는 무성의 읍재로서 공자의 예악사상을 관념으로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현 실사회의 다스림에 적용하여 유토피아를 구현하려 하였다. 플라톤이 시켈리아(시실리) 섬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시라쿠사이(Syrakousai)에 가서 실현하려 했던 이상적 폴리테이아(politeia)를 자유는 무성에서 실현했다. 플라톤은 못난 참주 디오니시오스 때문에 부질없는 분규에 휘말려야 했지만, 자유는 자신 본인이 무성의 참주였다.

 

지금 예기』 「예운편에 소강(小康)과 대동(大同)의 사상이 실려있고 이것은 유교 이상국가론의 한 전형으로서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문헌이지만, 바로 이 소강ㆍ대동론이 자유의 무성 실험(Wu-cheng experimentation)을 토대로 자유학파에 의하여 발전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읍민들에게 악과 예를 잘 교육시킴으로써 무성 전체를 하나의 예악심포니로 만든 아름다운 모습은 양화(陽貨)4에 암시되어 있다. 자유는 공자의 예악교화를 현실정치에 실현시킨 첫 모범이었다.

 

그리고 무성은 비현(費縣)에 속해있다. 무성과 관련하여 우리 머리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사실은 바로 증자가 무성(武城) 사람이라는 것이다. 열전」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 모두 남무성(南武城) 사람이라 되어있어 남무성, 북무성, 동무성이 다른 지명인 것처럼 말하지만 치엔 무(錢穆)가 고증하는 대로 모두 같은 무성을 두고 지역의 방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 뿐이다. 꾸 옌우도 일지록(日知錄)에서 증자나 담대멸명이나 다 같은 무성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성은 비 땅의 남서에 있으며 기수(沂水)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양자강 하류의 오() 나라 월()나라와 같은 신흥강국이 북상하는 요충지를 지키고 있다. 노나라로 보면 남쪽의 관문에 해당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성주는 중요한 포스트였다.

 

공자가 언언(言偃), 즉 자유가 읍재로서 예악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활약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난 것이다. 물론 공자로서는 어린 제자가자유도 45세 연하이니까 읍재할 당시 245세밖에 안된다 정치를 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퍽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반적 정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공자는 무엇을 질문했을까? 지금 우리나라에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치세를 잘 하는지, 그의 옛 스승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첫 질문이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역시 공자는 탁월했다.

 

득인언이호(得人焉爾乎)?”

 

이 다섯 글자 중에서 세 글자가 구어체를 반영하는 허사이므로 결국 질문의 핵심은 득인(得人)’ 두 글자로 압축된다. 정치의 핵심은 제반 정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제대로된 포스트를 지키고 있는가, 그 여하에 딸린 것이다.

 

인물다운 인물을 발견했느냐?”

 

이 세상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두세 명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큰 인물을 거느리고 있으면 정치는 잘못되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정치판이란 본시 의리없는 권세의 아수라인지라 그러한 사람이 붙어있기 어렵다.

 

공자의 질문에 대한 자유의 대답은 매우 긍정적이고 확신에 차있다.

 

! 있습니다. 발견했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여기 담대멸명(渡臺滅明, 탄타이 미에밍, Tan-tai Mie-ming) 새 이름이 등장한다. 담대멸명은 성이 담대고, 이름이 멸명일 것이다. 이름 자체가 고요한 호수가에 누각이 있는데 촛불이 꺼졌다 다시 켜졌다 하는 느낌을 주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멸명(滅明)’은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과 어둠을 연상시키기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인식구조는 어디든지 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직하게 말해서 담대멸명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 수가 없다. 논어에 그가 많이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멸명은 오직 이 장에만 단 한 번 출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추리해볼 수 있다. 담대멸명은 자유가 무성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발굴한 인물이므로, 그는 분명 무성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이도 약간 자유보다는 어린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성의 청년으로서 자유의 이상 정치실현의 꿈에 동조하여 무성의 치세를 이룩한 인물! 자아! 우선 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3를 잠깐 펼쳐보자!

 

 

담대멸명은 무성의 사람이다. 자가 자우(子羽)이다. 공자보다 49세 연하이다. 담대멸명은 군자의 풍도가 느껴지는 잘생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일찍이 그 잘생긴 용모로써 판단하여 그의 재능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의 재능은 공자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이 공정(公正)하고 사특함이 일체 없었다. 재물을 자기가 취하거나 타인에게 주거나, 어떤 지위에서 일하거나 또 그 자리를 떠나거나, 이 모든 일이 자기가 약속한 대로 정확히 실천하여 세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결국 노나라에서 벼슬하여 대부(大夫)가 되었다.

澹臺滅明, 武城人. 字子羽, 少孔子四十九歲, 有君子之姿. 孔子嘗以容貌望其才, 其才不充孔子之望. 然其爲人公正無私, 以取與去就, 以諾爲名. 仕魯爲大夫也.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술은 좀 충격적이다. 담대멸명이 무성 사람이며 자유보다 좀 어릴 것이라는 우리의 추론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담대멸명하면 논어를 좀 아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가 천하의 추남으로서 박박 엷은 곰보였다는 사실을 연상한다. 외모가 너무도 볼품 없는 것에 비하면 훌륭한 덕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소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가 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술은 그와 정반대의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담대멸명은 군자의 풍도를 가진 용모가 아주 잘 생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박박 곰보의 추남이라는 소문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것은 모두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의 기술에서 온 것이다[狀貌甚惡]. 전통적으로 사기가어에 비해 권위가 높았다. 그래서 열전의 기술을 제자해보다 더 정통의 정보로 신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역사가였지만 탁월한 드라마티스트였다. 희랍의 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30-420)의 역사기술 방식도 비슷하다. 정확한 사실의 근거를 존중했지만 그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 하여 픽션을 삽입하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 한마디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마천은 군자의 풍도를 지닌 잘생긴 청년을 천하의 추남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낮잠자는 재여(宰予)를 혹독하게 야단치신 공자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5-9). 공야장(公冶長)의 기사와 관련하여, 흔히 재여와 담대멸명을 반 대적 경우로서 대비시킨 유명한 공자의 말이 자주 인용된다.

 

 

나는 겉말만 듣고 사람을 믿었다가 재여에게서 큰 낭패를 보았고,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子羽: 곧 담대멸명이다)에게 큰 실수를 범하였다.

吾以言取人, 失之宰予;

以貌取人, 失之子羽.

 

 

그런데 이 말은 논어에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바로 열전담대멸명조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말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사마천이 공자를 위탁하여 지어낸 말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은 구절뒤에 이어지고 있다.

 

 

담대멸명은 남쪽으로 주유하여 양자강 지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서 제자를 300여 명이나 거느렸다. 그는 재물을 취하거나 재물을 주거나 벼슬을 하거나 벼슬을 떠나거나 하는 문제에 관하여 명료한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주변의 제후들에게 널리 퍼졌다. 공자가 이 얘기를 소문으로 듣고 말했다: “나는 겉말만 듣고 사람을 믿었다가 재여에게서 큰 낭패를 보았고,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에게 큰 실수를 범하였다.”

南游至江, 從弟子三百人,

設取子去就, 名施乎諸侯.

孔子聞之曰: “吾以言取人, 失之宰予; 以貌取人, 失之子羽.”

 

 

이러한 사마천의 기술은 픽션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담대멸명은 무성사람으로 자유에 의하여 픽업된 젊은이다. 그렇다면 그가 공자의 제자로서 입문한 것은 공자의 나이 70세 전후였다. 공자의 최만년의 최후제자그룹에 속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담대멸명과 공자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기간은 3년밖에는 되지 않는다. 담대멸명은 분명 무성의 정치실험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젊은 재목이다. 그가 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말대로 노나라의 대부가 된 것은 당연히 공자가 죽고난 후였다. 그리고 그가 노나라의 대부를 사직하고 강남유역으로 간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가 강남유역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거대한 30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린 학파를 형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공자가 담대멸명(자우)에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 큰 실수를 범하였다고 개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자가 이 세상을 뜰 때 담대멸명은 불과 24세의 젊은이였다. 이 나이에 대부를 지내고 300명의 제자를 거느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튼 이 장의 기사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우선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인생의 모든 고락과 성쇠를 거친 달인이었다. 그리고 정치로부터 초연한 국부(國父)였다. 그러기에 그 당시 노나라 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의 배움의 선망이 되었고 유능한 인물들이 공문으로 입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대멸명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공단에 모여든 제자들은 공자의 사후 노나라 곡부학교에도 머물렀지만 대부분은 공자의 이상(理想)을 가슴에 품고 천하를 주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대멸명이 양자강 지역으로 갔다는 사실(남유지강南游至江)은 공자의 사후 얼마 안되어 벌써 유학이 오()나라나 초()나라에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담 대멸명은 초나라에서 3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학단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쏟아지고 있는 초나라의 죽간(竹簡)도 결코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 자유가 그를 평한 말에 골목 지름길로 가는 법이 없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요즈음 같이 공리주의적 효율성을 강구하는 세상에서는 지름길(a short cut)을 잘 찾아내는 자야말로 치세의 달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부적 효율성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치세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의 정()은 바름()이다. 다스린다 하는 것은 조그만 사기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천하는 노자의 말대로 대기(大器)며 신기(神器). 대기는 골목길을 다닐 수가 없는 것이다. 미련한 듯이 보여도 대로를 가야하고, 볼 것 다 보고 보일 것 다 보여주면서 당당하게 가야만 하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지름길로 빨리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담대멸명은 원칙의 사나이였고, 공자의 인정(仁政)을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사소한 효율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공무(公務)가 아니면 재인 자유의 방에 간 적이 없다. 쓸데없이 사무실을 찾는 사람들, 쓸데없이 사람 사귄답시고 술자리를 펴는 사람들, 쓸데없이 사람 붙들고 노닥거리는 사람들, 이들을 데리고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예수도 예수운동을 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당부하였다: ‘신발도 신지 말고, 지팡이도 들고 다니지 말라.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과 쓸데없이 문안하지 말라!’(10:10, 10:4)

 

 

()’라고 발음한다. ‘은 도감(徒甘) 반이다. 무성(武城)’은 노나라의 하(下邑)이다. ‘담대(澹臺)’는 성이다. ‘멸명(滅明)’은 이름이다. 자는 자우(子羽)이다. ‘()’은 길 중에서 좁고 빠른 지름길이다. ‘공사(公事)’란 향음주례ㆍ향사례ㆍ독법례(讀法)주례(周禮)로서, 주장(州長)이 정월이나 세시의 제사 때 1년 동안의 정령 같은 것을 읽어주는 집회 같은 것이다. ‘지름길을 가지 않으면[不由徑]’ 그 움직임이 정도로써 하지 않을 수 없고, 작은 이득을 생각하여 빨리 하려고 하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非公事], 읍재를 보지 않는다[不見邑宰]’라는 것은 즉 스스로 지키는 바가 있어 자기를 굽혀 남을 따르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音汝. , 徒甘反. 武城, 魯下邑. 澹臺姓, 滅明名, 字子羽. , 路之小而捷者. 公事, 如飮射讀法之類. 不由徑, 則動必以正, 而無見小欲速之意可知. 非公事不見邑宰, 則其有以自守, 而無枉己殉人之私可見矣.

 

양시(楊時)가 말하였다: “정치를 하는데 인재를 얻는 것이 최우선인지라 공자께서 사람을 얻었느냐[得人]’하고 물으신 것이다. 담대멸명과 같은 인물은 아주 작은 두 가지 일로써도 그 공명정대한 인격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지름길로 가지 않으면 우원하다고 하고, 사무실을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소홀하다거나 건방지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같이 공문에서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가 담대멸명의 그릇을 알아 쓸 수 있을 것인가?”

楊氏曰: “爲政以人才爲先, 故孔子以得人爲問. 如滅明者, 觀其二事之小, 而其正大之情可見矣. 後世有不由徑者, 人必以爲迂; 不至其室, 人必以爲簡. 非孔氏之徒, 其孰能知而取之?”

 

나 주희가 말한다. 몸가짐의 법도를 담대멸명처럼 하면 구차하거나 천박스러운 수치가 있을 수 없고, 사람을 쓰는 법도를 자유처럼 하면 사투하거나 아첨하는 미혹이 있을 수 없다.

愚謂持身以滅明爲法, 則無苟賤之羞; 取人以子游爲法, 則無邪媚之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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