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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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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들, 타자, 사랑, 고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뇌물은 우리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뇌물에는 받은 것 이상으로는 돌려주지 않고, 또한 준 것 이상으로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뇌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어야 상대가 좋아하고 또 얼마만큼 주어야 그 뇌물의 효력이 발생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물의 관계에서는 블랙홀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자란 나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와 삶의 규칙을 달리하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니까요. 따라서 오직 타자와 마주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 나는 선물을 줄 수도 또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준다는 것에는 타자와 사랑, 그리고 선물을 주려는 나의 고독이 동시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데리다의 이야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선물을 주고 있다는 우리의 허위의식을 공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선물을 주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선물을 줄 수 있는 삶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 1

 

 

데리다의 논의가 좀 어렵게 들리지요? 하긴 선물을 주기는 주지만,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선물을 준 다음에 내가 선물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선물을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이것은 매우 날카롭고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반박이 옳다면, 데리다는 결국 어떤 선물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데리다는 우리가 타자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선물을 주어야 하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넬 때 그것의 대가를 결코 생각하지 말라는 단순한 충고입니다. 그러나 주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여기에는 엄청난 의지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떠한 대가도 없이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데리다의 윤리학적인 정언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남편은 하나의 선물로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남편이 갖는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 월급날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이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집니다. 또한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남편의 반찬 투정도 심해집니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에 바쁩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미 하나의 교환관계,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적인 것 일반에 매몰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가족이라는 상징이 부여하는 분업 체계로 은폐되고 마는 것이지요. 남편은 밥을 먹었으니 돈을 벌어와야만 합니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의 노동이 가정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이제 돈을 받았으니 제때에 식사를 차려야만 합니다. 그녀는 아내로서 가사 노동이 가정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이제 뇌물의 논리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선물 또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데리다는 기존의 선입견들을 예리한 논리로 비판했던 해체주의(Deconstructism)해체주의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풍미했던, 전통에 대한 강력한 비판 정신이다. 서양철학은 합리적인 체계를 구성, 혹은 건설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건축에의 의지로 규정될 수 있다. 반면 해체주의는 기존의 서양 전통을 기초에서부터 흔들면서 와해시키려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해체주의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방법론적 파괴라는 점이다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그는 우리의 삶에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물이 가진 역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선물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교환 아닌 교환, 즉 불가능한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가 유언으로 남긴 충고가 지금까지 모든 현명한 사람이 남긴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데리다에게도 고마움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물의 논리 이면에 타자와의 사랑이란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건넬 수 있습니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망각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물을 주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이나마 찾아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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