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많이 잡기보다 적당히
7-26.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셨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다. 주살로 새를 잡기는 했으나 모여 잠자는 새들을 쏘지는 않으셨다. 7-26. 子釣而不綱, 弋不射宿. |
인도인들의 논리로 본다면 어차피 살생인데 뭘 가리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간의 생존의 현실이 살생을 기피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서는 공자의 마음씀새는 보다 섬세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동학 ‘하늘님’ 사상의 진실한 실천가이며 제2세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말한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며, 따라서 인간의 인권(人權)만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만물의 물권(物權)도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타 생물을 죽여 먹는다는 것은 하나된 일체생명에 대한 파괴가 아닌가? 해월은 하느님[식물(食物)]을 가지고 하느님(내 몸)을 먹일 수밖에 없는 것이 대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을 먹이는 것은 오직 ‘이천양천(以天養天)’, 즉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을 기르는 데 그쳐야 한다. 하느님 이 하느님을 먹는 것은 일체 우주대생명인 하느님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양(保養)하는 차원의 에코시스템(eco-system)인 것이다. 동학의 이러한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의 선구적 행태를 우리는 공자의 작은 마음씨, 그 섬세한 인(仁)한 삶의 자세에서 읽어낼 수가 있다.
황간의 소에 밤에는 새들이 모여 잠자기 때문에 쉽게 많은 새들을 잡을 수 있다[宿 鳥夜聚有群, 易得多]라고 한 것에 힌트를 얻어, ‘숙(宿)’을 ‘모여 잠자는 새들’로 번역했다.
‘射’는 식역(食亦) 반이다(우리말로 ‘석’이라 읽는다). ○ ‘강(綱)’은 큰 밧줄로 그물을 엮어 강물을 가로질러 훑어가면서,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익(弋)’은 생사(生絲)를 화살 끝에 매어 쏘는 것을 말한다. ‘숙(宿)’은 잠자는 새이다.
射, 食亦反. ○ 綱, 以大繩屬網, 絶流而漁者也. 弋, 以生絲繫矢而射也. 宿, 宿鳥.
○ 홍홍조(洪興祖)가 말하였다: “공자가 어렸을 때는 가난하였고 천한 몸이었다. 어머님을 봉양할 때와 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에 부득이하여 낚시질과 주살 질을 했는데, 엽각(獵較)【『맹자』 「만장」하에 나오는데 뜻이 확실하지 않다. 나 도올 이 생각하기에 사냥하는 포획물에 대한 모종의 제한 습속일 것 같다】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큰 그물질로 모조리 잡거나 잠자는 새들을 불의(不意)에 공격하는 그런 야비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인한 사람의 본심을 엿볼 수 있다. 생물을 대함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이요, 작은 일에 이처럼 섬세한 것을 보면 큰일을 처리하는 것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 洪氏曰: “孔子少貧賤, 爲養與祭, 或不得已而釣弋, 如獵較是也. 然盡物取之, 出其不意, 亦不爲也. 此可見仁人之本心矣. 待物如此, 待人可知; 小者如此, 大者可知.”
소라이(荻生徂徠)는 이것이 공자의 내면적 마음씨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천자나 제후가 제사를 위해서 혹은 빈객을 대접하기 위하여 행하는 수렵예식에 관한 규정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소라이다운 해석이지만 억지춘향 일관된 논리의 소산일 뿐, 취할 바 없다. 그런데 소라이 혼자 잘난 체 외친다: “후세의 유자들이 옛 도를 모르고 고례에 어두워 이 장 또한 해석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後世儒者不知道, 不知禮, 故其於此章也].” 고례는 소라이 혼자 다 아는 것일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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