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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건방진방랑자 2021. 6. 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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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예상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혼한 지 20년이 된 너무나 친숙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부부는 손 안에 있는관계, 즉 너무나 친숙해서 전혀 생각이 발생하지 않는 습관적인 관계에 빠져 있습니다. 서로의 안색만 보아도 두 사람은 상대방의 욕구, 불만족 등을 생각하지 않고도 알게 됩니다. 남편이 아침 밥상에서 반찬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면, 아내는 금방 오늘 야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또 역으로 아내가 저녁상에 와인을 올려놓고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면, 남편은 아내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긴장감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진정 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 어느 날 남편이 귀가했을 때 아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보다 아내의 귀가가 늦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 남편은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 이 사람이 어디 간 거지? 조금 있다가 들어오겠지.’

그러나 이제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점점 초조해지고, 그의 생각도 더 강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난 건가? 혹시 처갓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늦으면 전화라도 해주지.’

마침내 자정을 한참 지나서야 아내가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는 아주 고급스럽고 우아한, 그리고 조금은 섹시하기까지 한 옷을 입고 유유히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얼굴의 홍조로 보아 어디서 술까지 마시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만났는지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화장실로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합니다. 그리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며, 당황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싱긋 웃고는 혼자 침실로 들어가 눕습니다.

 

이제 남편의 생각은 질투에 사로잡혀 매우 강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들어온 거야.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보는군. 혹시 다른 놈하고 눈 맞은 거 아냐? 아까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은 도대체 뭐지?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건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은 아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녀의 눈빛, 그녀의 옷,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홍조 띤 얼굴, 그녀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들뢰즈(G. Deleuze(1925 ~1995)들뢰즈는 강단 철학에서 박제가 된 철학적 사유를 소생시킨 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주어진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시대를 극복하는데 있다. 주요 저서로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등이 있다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알고 있나요? 이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변화에 당혹감과 질투를 느끼는 남편을 철학적으로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철학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죠.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우리에게 진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기도 하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다. 진실은 친화성이나 선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 (……)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우리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 마주침(encounter)’으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비자발적이다라는 말은 낯선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0년 만에 남편보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너무 친숙해서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졌던 어제까지의 아내와는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들뢰즈는 그것을 기호(sign)’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내의 홍조 띤 얼굴, 콧노래, 눈빛 등 이 모든 것이 바로 기호에 해당하겠죠. 남편의 생각은 바로 이 기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기호의 의미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남편은 아마 밤새도록 아니면 영원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것입니다.

 

들뢰즈의 분석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주침이란 요소가 아닐까요? 만약 아내가 늦게 들어온 날, 남편이 야근을 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남편은 술까지 마시고 늦게 들어온 아내와 마주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녀가 누설하는’, 즉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기호도 결국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이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 그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그리고 그 사건의 기호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규정이 이제 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그 생각이 진정한 생각이라면 항상 위와 같은 과정을 겪기 마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제 그 생각의 발생을 음미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건과 마주쳤습니까? 그리고 어떤 기호를 포착했나요? 그리고 이제 그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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