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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건방진방랑자 2021. 6. 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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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마침내 인당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바람마저 강하게 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를 뒤섞어버리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려고 할 것입니다. 심청을 태운 배는 15일에 출항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서 뱃사람들은 이미 희생물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심청이 바로 그 희생물이지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삼백 석의 공양미가 필요했던 그녀는 자진해서 희생물로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그녀가 배에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더 난폭해진 폭풍우가 그녀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청은 비를 맞으며 뱃전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아버지 심학규는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자신이 타고 있던 배의 선원들도 무사히 인당수를 건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잠시 머뭇거리던 심청은 치맛자락을 들어 얼굴을 감싸고 무섭게 출렁이는 시커먼 인당수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곧 폭풍이 잠잠해지고,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비도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판소리로도 유명한 심청전의 일부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철학사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은밀한 흐름을 식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심청전을 먼저 들먹이는지 의아스럽지 않습니까? 저는 인당수에 내리던 비가 심청의 희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인당수의 비가 그친 것은 어린 심청이 바닷물에 몸을 던져서 생긴 현상이었을까요? 심청전에 따르면 뱃사람들 그리고 심청 본인조차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요? 아마도 지금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인당수를 건너던 뱃사람들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들은 지금 매우 잘못된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인당수에 심청과 같은 불쌍한 처녀를 희생물로 바치는 의식을 지금 당장 멈추도록 하세요.” 이 충고를 들은 뱃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인당수에 폭풍우가 칠 때 심청이 그곳에 뛰어들자 곧 폭풍이 잠잠해지고 비가 그친 것을요.”

 

우리는 인당수에 내리는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을 확인해보았습니다. 하나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심청을 인당수에 던지지 않았어도 그곳에 내리는 비는 자연스럽게 그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둘 사이에 모종의 상관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경험으로 확인되듯이 심청을 희생으로 바쳤기 때문에 비로소 인당수에 내리던 비가 그쳤다는 것이지요.

 

이 각각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철학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발성(contingency)’이라는 개념과 필연성(necessity)’이라는 개념이지요. ‘contingency’라는 말은 접촉하다만나다를 의미하는 ‘contact’와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우발성이라는 말은 두 가지 사건이 우연적으로 조우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다른 목적이나 필연성 없이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사태를 우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연성은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비록 겉으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모종의 질서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발성(contingency) 필연성(necessity)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없다 둘 사이에 모종의 상관성이 있다
두 가지 사건이 우연적으로 조우한다는 것을 긍정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모종의 질서나 목적이 있다는 것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우발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뱃사람들은 필연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필연성을 믿는 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일종의 완고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비와 심청 사이에는 우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충고하더라도, ‘필연성을 믿고 따르는 뱃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심청을 인당수에 던졌는데 비가 전혀 그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그러나 뱃사람들은 양자 사이의 관계가 우발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당수에 던져 넣을 또 다른 처녀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될 것입니다. 용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다른 희생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던져 넣으려는 것일까요? 아마 인당수에 비가 그칠 바로 그 순간까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들은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봐. 역시 인당수에 희생물을 바쳐야 폭풍우가 그친다니까.”

 

아마 필연성을 확신하는 뱃사람들과 같은 이들은 지금도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계속 던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에 대해 가혹한 폭력을 자행했던 모든 미신과 종교의 뿌리에는 바로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필연성에 대한 맹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맹신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은, 어찌 보면 인간의 나약함으로부터 연유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에 직면했던 뱃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죽는 것을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당당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했겠죠. 비록 그것이 심리적 안도감만을 가져다주는 기만적인 희생 의례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폭력에 대한 동물의 반응은 나약한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행동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뭄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없더라도 짐승들은 그냥 묵묵히 버틸 뿐입니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거나 두려워서 소동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언젠가 비가 오기만을 말없이 기다릴 뿐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이룬 문화나 문명을 자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문화나 문명이란 인간이 가진 이런 원초적 나약함 그리고 정신의 자기기만 행위로부터 출현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순자(荀子, BC 313?~238?)순자는 보통 맹자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사상가라고 이해되고 있으며, 중국을 지배하던 맹자 전통의 유학사상에서 거의 이단적인 인물이거나 이류 철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 즉 제자백가 중 가장 포괄적인 철학 체계를 구성했던 위대한 자연주의 철학자로서, 중국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순자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다라는 중국의 자연주의 사상가도 이 점을 일찌감치 눈치 챘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는 온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그 재난을 막는 의식을 행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며, 점을 쳐본 뒤에야 큰일을 결정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바라는 것이 얻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을 갖추어 위안을 얻는 것일 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

雩而雨, 何也? : 無何也. 猶不雩而雨也. 日月食而救之, 天旱而雩, 卜筮然後決大事, 非以爲得求也以文之也.

 

 

순자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시대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모든 사건 속에 반드시 숨겨진 필연성이 있다고 맹신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순자라는 사상가가 탁월했던 이유는 그가 이런 맹신의 분위기에 결코 젖어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믿고 있을 때, 그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비가 오는 것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점에서 순자는 우발성의 의미를 발견했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기우제라는 필연성의 논리 이면에서, 인간의 자기기만이나 자기 위로라는 정신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비가 절대적이지 않았습니까? 비가 안 온다고 마냥 하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겠죠. 뭐 그렇다고 해서 뾰족하게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바로 이런 불안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기우제란 의례를 거행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순자가 죽고 2000여 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는 사유나 문체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목표는 맑스의 사유에 철학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가 스피노자, 루소, 마키아벨리 등을 철학적으로 다시 읽어내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맑스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철학은 헤겔과는 다른 반목적론적인 변증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 맑스를 위하여, 철학에 대하여등이 있다라는 탁월한 철학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맑스(K. Marx, 1818~1883)의 정치경제학에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정치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정신병 발작으로 자신의 아내를 목졸라 죽인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그는 결국 고독하게 유폐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독 속에서도 맑스에게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계획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1990년 그가 죽고 2년 뒤에 발간된 유고집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de la rencontre)」【「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은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라는 책 속에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이 논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많은 자료들을 함께 담고 있어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으로 이름 붙여진 작지만 강렬한 문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도 자신의 이야기를 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비가 온다.

그러니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말브랑슈는 왜 바다에, 큰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가 오는지를 자문했었다. 다른 곳에서는 농토를 적셔주는 이 하늘의 물이, 바닷물에 대해서는 더해주는 것이 없으며 도로와 해변에서도 곧 사라져버리기에.

그러나 하늘이 도운 다행한 비이든 반대로 불행한 비이든 이런 비가 문제인 것은 아니리라. 그와 전혀 달리 이 책은 유다른 비에 대한 것,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진술되자마자 즉각 반박되고 억압된 심오한 주제에 관한 것, 허공속에서 평행으로 내리는 에피쿠로스의 원자의 ’, 그리고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맑스, 하이데거 또 데리다와 같은 이들에게서 보이는, 스피노자의 무한한 속성들의 평행이라는 에 대한 것이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알튀세르는 비가 온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에 앞서 문장 아닌 어떤 문장, 일종의 기호를 처음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비입니다. (………………) 저에게는 사실 이 기호가 은밀한 감동을 주는데, 여러분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하늘에서는 그냥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자 알튀세르는 바로 이 비를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는 말브랑슈(Maleblanche, 1638~1715)의 말을 생각해냅니다. “왜 바다에, 큰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가 오는지.” 비는 이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농토에도 내릴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바다, 모래사장에도 내릴 수 있습니다. 내리는 비는 땅이나 혹은 바다, 어느 곳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알튀세르는 바다와 모래사장에 내리는 비 속에서 일종의 무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무의미의 발견이란, 순수한 우발성의 발견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비는 내리고, 그 비는 추락을 거듭하다가 무엇인가와 만나게 될 뿐입니다. 반면 농토에 내리는 비에는 분명 어떤 의미(sense)가 있습니다. 그것은 극심한 가뭄 속에 내리는 반가운 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고단한 노동을 도와주듯이, 혹은 우리의 기우제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내리는 비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 달째 계속 쏟아 붓던 비가 오늘도 역시 농토에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저주스러운 비가 되겠죠.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우리 인간의 오만을 나무라듯이, 혹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비는 계속 내립니다.

 

알튀세르는 인간이 생각해내고 또 인간을 지배해온 모든 의미가 기본적으로 비와 어떤 곳의 만남과 같은 무의미 속에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필연성과 같은 의미는 모두 우발성과 같은 무의미가 우선 전제되어야만 발생한다는 것이죠. 이어서 그는 서양철학사의 전통 속에도 바로 이런 우발성의 철학, 무의미의 철학, 혹은 마주침의 철학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가 마주침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 rencontre)’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사유 전통이지요. 그는 이 철학적 사유의 흐름이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55),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홉스(Hobbes, 1588~1679), 스피노자, 루소(Rousseau, 1712~1778), 맑스, 하이데거, 데리다(Derrida, 1930~2004)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사유의 흐름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은 바로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는 우발성의 철학, 마주침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숙고했던 최초의 사상가이니까요. 그럼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튀세르의 말을 통해 잠시 들어보도록 하지요.

 

 

에피쿠로스는 세계 형성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설명한다. 원자는 항상 떨어진다. 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동시에 세계의 모든 요소는 어떤 세계도 있기 이전인 영원한 과거로부터 실존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Sens), 또 어떤 원인(Cause), 어떤 목적(Fin), 어떤 근거(Raison)나 부조리(Déraison)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가 앞서 있지 않다는 비선재성(非先在性)은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이며, 이 점에서 그는 플라톤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대립한다. 클리나멘(Clinamen)이 돌발한다. (……) 클리나멘은 무한히 작은, 최대한으로 작은 편의(偏倚, Déviation, 기울어짐)로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허공에서 한 원자로 하여금 수직으로 낙하하다가 빗나가도록’, 그리고 한 지점에서 평행 낙하를 극히 미세하게 교란시킴으로써 가까운 원자와 마주치도록, 그리고 이 마주침이 또 다른 마주침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가, 즉 연쇄적으로 최초의 편의와 최초의 마주침을 유발하는 일군의 원자들의 집합이 탄생한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에피쿠로스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가 비처럼 평행으로 떨어지는 상태가 있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마주침도 없는, 무의미한 상태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물론 이것은 실제적인 우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순간 이 원자 중 하나의 원자가 평행에서 조금 이탈하는 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 작은 차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편차를 에피쿠로스는 클리나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원자는 다른 원자와 곧 만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만난 이 두 원자는 또 다른 원자와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계속되고, 마침내 이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조그만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 다른 눈과 만나면서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클리나멘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마주침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클리나멘이 생기기 이전에 모든 원자가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본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아닐까요? 이것은 알튀세르의 말처럼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도, 또 어떤 원인도, 어떤 목적,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에피쿠로스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창조주가 이미 존재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창조주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주란 존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는 이미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창조주의 뜻, 즉 분명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창조주의 뜻은 이미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어져 있었을 테니까요.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인당수에 심청을 희생물로 바쳤던 뱃사람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 절실하게 기우제를 지냈던 고대 중국인들! 이들은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철학이라고 부른 사유 전통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두려워 합니다. 인당수의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두려워하고 끝나지 않을 듯한 가뭄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무의미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점점 몰입합니다. ‘신이 존재하고 계실 거야. 그리고 그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 만약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이 세계에는 어떤 마주침도, 사건이란 것도, 우발성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숨겨진 신의 뜻, 신의 의미, 신의 의도가 항상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 필연성의 사유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전도된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우발적인 사건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에 나름대로의 의미, 즉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그 필연성이 자신들이 마주친 사건의 원인으로서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고 믿어버립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필연성의 사유는 결과에 입각한 인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사건과 마주친 이후에 자신이 결과를 통해서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원래 그 사건 속에 미리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신이라는 인격적 주재자의 존재가 설득력을 잃게 되자, 이제 이것을 순수한 필연성이나 근거, 혹은 순수한 의미로서 대치하려는 사유가 출현하게 됩니다. 아마 헤겔의 사변적인 형이상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미신적인 뉘앙스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긍정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이니까요.

 

알튀세르가 말한 마주침의 유물론’, 즉 우발성의 철학은 이제 다시 한번 등장해서 헤겔과 같은 필연성의 철학이 함축하고 있는 허구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정성을 기울인 맑스의 철학이 지닌 중요성입니다. 헤겔은 변증법(dialectics)변증법은 형식논리와 달리 모순이나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형식논리가 모순율, 모순을 피하자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면, 변증법적 논리는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모순과 부정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가 더 이상은 어린아이가 아니게되었기 때문이다으로 유명한 철학자입니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이란 세상의 모든 사건이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나 이념(ldea) 이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개되는 분명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당수의 뱃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헤겔도 이 세계의 모든 사건에는 모종의 필연성이나 숨겨진 질서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 맑스맑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철학, 영국의 경제학, 그리고 독일의 헤겔 좌파 철학을 비판적으로 아우르면서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해갔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영국의 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숙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 맑스는, 헤겔 좌파의 철학적 사유로부터 자본주의를 개념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를 얻게 된 것이다. 주요 저서로 자본론, 독일이데올로기등이 있다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자본론(Das Kapital)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화시키고 있는 사유 과정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창조 과정이고, 현실 세계는 사유 과정의 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정반대인데, 이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거기에서 사유의 형태로 변형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약 30년 전, 헤겔 변증법이 아직 유행하고 있던 그 당시에 헤겔 변증법의 신비화된 측면을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자본론1권을 저술하고 있던 때에는,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개치는 불평 많고 거만하고 또 형편없는 아류들이, 일찍이 레싱(Lessing) 시대에 용감한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 스피노자를 대하듯이, 헤겔을 바로 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언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 군데군데 헤겔의 특유한 표현 방식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다름 아닌 헤겔이 처음으로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서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만 한다.

자본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서 있다는 맑스의 지적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결과에 입각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헤겔의 변증법을 단순히 정립(=) 반정립(=) 종합(=)’의 운동 논리라고 가정해보도록 합시다. 사실 정반합의 삼박자 구조는 헤겔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연구자들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은 즉자 대자 즉자/대자라고 하는 정신의 운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외면적으로는 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이해되지만, 사실 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헤겔의 변증법은 합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꾸로 된 사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헤겔은 정과 반으로 이행합니다. 그다음 그는 이 합의 계기가 이나 속에 이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증법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라는 차이 나는 두 계기를 그 자체로 사유하자는 것, 나아가 이 두 계기의 마주침을 사유하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맑스의 변증법은 을 염두에 두지 않고 으로부터 출발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맑스의 바로 세워진 변증법이란 우발성의 변증법혹은 마주침의 변증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겠지요. 맑스의 자본론이란 바로 이렇게 마주침의 변증법에 입각해서 쓰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생산물의 교환은 서로 다른 가족, 부족 또는 공동체가 접촉하게 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문명의 초기에는 사적인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나 부족 등이 독립적인 지위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공동체는 자신들의 자연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생산수단과 생존 수단을 찾아낸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은 그들의 생산물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바로 이렇게 자발적으로 발전한 차이가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접촉하게 될 때 생산물의 상호 교환을 부추기고 이어서 점차 그 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자본론

 

 

무엇보다 먼저 가족이나 부족이 독립적인 지위에 입각해서 각자 자발적으로 발전한 차이를 키워내야만 합니다. 물론 더 나아가 이들 공동체가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어느 순간 반드시 상대방을 서로 만나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마주침에 맑스가 바로 세운 변증법의 비밀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유지되던 두 공동체가 만났을 때에만 상품이라는 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공동체가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클리나멘이 촉발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바다 혹은 모래사장에 무의미한 비가 내리듯이 말이죠.

 

이렇게 본다면 맑스의 사유는 엥겔스(Engels, 1820~1895)나 스탈린(Stalin, 1879~1953)이 생각했던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사적 유물론, 즉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어떤 사회의 구조나 변화의 법칙을 경제구조의 본성과 진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사회 속의 개인들은 자신들을 결정하는 사회적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이상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간주된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은 정치나 사회의 변화가 경제적 하부구조가 그대로 이행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니까요. 이 점에서 엥겔스나 스탈린의 사유는 헤겔의 사유를 단순하게 조금 비틀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이념이란 것을 단지 경제적 하부구조 정도로 변환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앞서 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유 경향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가 필연성의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발성의 철학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구분은 단지 서양철학의 흐름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자의 사유에서 엿볼 수 있었듯이, 동양철학에서도 방금 언급했던 두 가지 사유 흐름이 서로 대립하며 전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가 내리는 것 사이의 관계가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유학 사상가였던 동중서(董仲舒, BC 176~104)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유명한 한나라 때의 유학자이다. 천인감응설은 글자 그대로 하늘로 상징되는 자연계의 변화가 군주로 상징되는 인간계의 변화를 낳고, 역으로 인간계의 변화가 자연계의 변화를 낳을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종교적인 철학이자 동시에 철학적인 종교라고도 할 수있는 천인감응설은, 그후 중국 사유의 밑바닥에 도도히 흐르는 강력한 요소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중서의 사상은 춘추번로(春秋繁露)에 잘 드러나 있다는 다시 둘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늘에는 음과 양이 있으며, 사람도 또한 음과 양을 가지고 있다. 하늘과 땅의 음기가 일어나면 사람의 음기도 이에 대응해서 일어난다. 또 역으로 사람의 음기가 일어나면 하늘과 땅의 음기도 또한 이에 대응해서 일어나게 된다. (자연계와 인간계의) ()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비가 오게 하려면 음을 움직여 작동하도록 해야 하며, 비가 그치게 하려면 양을 움직여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춘추번로(春秋繁露)』 「동류상동(同類相動)

 

 

이것은 천인감응(天人感應)’으로 알려진 동중서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천인감응은 말 그대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 반응한다는 이론이지요. 자연이나 인간은 모두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음은 자연의 음을 초래하고 역으로 인간의 양은 자연의 양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동중서의 말이 옳다면 이제 우리는 비를 내리게 할 수도, 혹은 반대로 비를 그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는 축축하고 습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을 활성화시키는 제사를 통해서, 예를 들면 물을 뿌린다거나 아니면 동물의 피를 흘린다거나 하는 예식을 통해서 비를 오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동중서의 이야기대로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계속 오지 않는다면, 그의 이론은 결국 좌절되고 말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아마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서 정성이 부족하여 비가 오지 않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동물을 계속 죽여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그것은 분명 비가 오는 바로 그 순간까지입니다. 동중서가 아무리 많이 배운 박식한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생각은 심청을 인당수에 던져 넣었던 뱃사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중서가 필연성의 철학을 주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충(王充, 27~100)왕충은 중국 후한 시대에 활동했던 탁월한 자연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나 귀신설 같은 일체의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사유를 공격했다. 그가 모든 종교적인 사유를 공격할 때 취한 이론적 무기가 바로 우발성이란 관념이었다. 우발성이란 관념의 파괴력을 은폐하기 위해 주류 중국철학 전통은 아직도 그를 숙명론자라고 비난하면서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사상은 논형이란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이라는 자연주의자가 또다시 중국에 태어납니다. 헤겔이 등장하자 맑스가 등장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말이죠.

 

 

어떤 사람의 품성은 어질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화와 복을 만나는 것은 우발적인 문제일 뿐이다. 일을 시행할 때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과 벌을 만나는 것은 우발적인 문제일 뿐이다. 같은 시간에 적병을 만났을 때 숨어 있던 자는 칼에 맞지 않을 수 있고, 같은 날 서리를 맞았을 때 몸을 가린 자는 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칼에 맞거나 상해를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고, 숨어 있거나 몸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숨어 있거나 몸을 가리고 있던 경우나, 칼에 맞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도 모두 우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께 군주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함께 이득을 얻으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신용을 얻고 어떤 사람은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을 받고 신용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참되다고 할 수 없고, 벌을 받고 의심을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거짓되다고 할 수도 없다. 상을 받고 신용을 얻은 경우나, 벌을 받고 의심을 받은 경우 모두 우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논형(論衡)』 「행우(幸偶)1

凡人操行, 有賢有愚, 及遭禍福, 有幸有不幸. 擧事有是有非, 及觸賞罰, 有偶有不偶. 並時遭兵, 隱者不中 ; 同日被霜, 蔽者不傷. 中傷未必惡, 隱蔽未必善, 隱蔽幸, 中傷不幸. 俱欲納忠, 或賞或罰 ; 並欲有益, 或信或疑. 賞而信者未必眞, 罰而疑者未必僞, 賞信者偶, 罰疑不偶也.

 

 

어떤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은 남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평상시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결국 천벌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유족들마저도 벼락에 맞아 죽은 그 남자를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충은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과 그 사람에게 화나 복이 이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에게 복이 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선한 사람에게 화가 닥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왕충은 우발성을 인간 사회의 내부,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면, 신하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이 내려져야겠지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충성을 다한 사람이 항상 그런 대우를 받았었나요? 오히려 충성스런 신하가 어리석거나 잔인한 군주를 만나서 죽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신하가 군주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자신과 관련된 일, 즉 군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덕목과 용기를 키우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줄 군주를 만났느냐, 혹은 만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역량 밖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런 느낌은 바로 우발성의 진리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충성스런 신하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즉 세계에는 만남과 마주침이 편재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진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는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기우제를 지낼 수도 있고, 지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기우제를 지냈을 때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는 인간의 행동과 비를 내리는 자연의 작용이 서로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즉 그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왕충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우발성의 진리를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동양철학 전통에서 필연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우발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들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사실 동양철학에서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서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동중서와 왕충의 대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자(老子, 생몰연대 미상)노자는 고대 중국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근본에는 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도를 인식하면, 인간이 세계 속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도의 인식이 모든 인간에게 제안된 것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군주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사상은 81편의 철학시로 쓰인 도덕경에 압축적인 형식으로 실려 있다장자(莊子, BC 369?~286?)장자는 인간의 삶이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했던 중요한 철학자이다. 모든 유아론적 사유를 꿈에 비유하면서 공격한 그는 중국 역사상 유례 없는 탁월한 비판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타자를 긍정하지 못하는 모든 사유는 기본적으로 유아론적인 것이다. 장자의 사유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구분되어 있는 장자에 실려 있지만, 이중 내편만이 그나마 장자 본인의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라는 두 사상가, 그리고 이들에 대한 끈질긴 오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오해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사상가는 노자라기보다는 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노자의 사유를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라는 잘못된 평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맑스가 헤겔의 계승자라고 오해되는 것에 비유될 만한 사태이지요. 맑스의 변증법이 헤겔의 그것과 같다고 오해되는 이유는, 엥겔스와 스탈린이 맑스를 헤겔 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의 사유가 노자의 사유와 같다고 오해되는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장자를 노자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노자의 유명한 주장 하나를 읽어볼까요?

 

 

()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도덕경(道德經)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여기서 하나’, ‘’, ‘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노자가 결국 도생만물(道生萬物)’, 도가 만물을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주장의 함의는 무엇일까요? 도덕경에 가장 체계적이고 훌륭한 주석을 붙인 왕필(王弼, 226~249)왕필은 중국 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살았던 학자이다. 그는 노자 도덕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뿌리와 가지라는 비유로 설명되는 본말의 형이상학이다. 왕필이 본말의 형이상학 체계를 순수한 철학적 관심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삼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그였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노자주, 주역주, 노자지략등이 있다이란 인물은 노자의 철학에서 나무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왕필의 본말(本末)에 입각한 노자 이해 방식입니다. 여기서 본말이란 글자 그대로 뿌리[]’가지[]’를 의미합니다. 뿌리[]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을 나타낸다면, 가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이하의 영역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뿌리가 통일된 일자(一者)를 상징한다면, 가지는 다양하게 분기된 다자(多者)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무 이미지에 근거한 도덕경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지와 가지 사이의 만남이 결코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뿌리라는 근본적 토대의 매개를 통해서만 서로 만날 수 있을 뿐이죠. 아니, 어쩌면 가지와 가지는 만날 필요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의 뿌리에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다양한 가지가 서로 만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과연 이런 노자의 생각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요? 장자(莊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봅시다.

 

 

()은 걸어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道行之而成.

 

 

장자의 철학은 우리가 살펴본 노자의 나무 이미지와는 사실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자는 노자의 사유, 즉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만물에 앞서서 라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미리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노자가 이야기하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가 우발적으로 만난 후에 생기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 말이 이해하기에 어려운가요? 그러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보지요.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를 노자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 그 때문에 둘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이지,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갑자기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야.” 마치 노자는 전생이나 운명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점쟁이처럼 말할 것입니다. 반면 장자라면 이런 경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두 사람은 마주칠 수도 있었고, 혹은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지. 그런데 마주쳤고 이제 사랑을 나누게 된 것뿐이야. 물론 두 사람이 마주치기 전에 사랑을 포함한 일체의 의미가 미리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야.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는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이 우발적인 마주침에 충실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겠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그렇게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지는 지점을 예견해보았습니다. 서양철학의 흐름 속에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유 전통을 엄격하게 구별했던 철학자는 바로 알튀세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두 가지 사유 전통의 갈등과 대립은 분명 동양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 이것은 사실 은밀하지만 매우 전형적인 철학의 두 가지 경향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앞으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어나갈 때, 혹은 여러분의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이 문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그도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을 발견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 존재한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et) ……(et)……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에 충격을 주고 뿌리를 뽑을 수 있는 힘이 충분하게 들어 있다.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들뢰즈는 우리의 사유를 두 가지 이미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나무(tree)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리좀(rhizome, 뿌리줄기)리좀과 나무를 서로 비교하면서, 들뢰즈는 리좀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공식을 제안하고 있다.(천개의 고원) 그것이 바로 ‘n-1’이라는 공식이다. 사태들의 다양성(n)을 긍정하기 위해서 들뢰즈는 이 다양성을 인위적으로 통일시키는 통일성이나 중심(1)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이란 이미지입니다. 나무는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을 지탱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지와 잎에 앞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토대, 즉 절대적인 의미이자 필연성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뿌리와 줄기로 구성된 나무 이미지를 아버지와 아들의 구조로 이루어진 친자 관계에 비유합니다. 아버지가 없다면 아들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에서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리좀은 어떻게 활동하는지 주목해보지요. 이것은 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입니다. 리좀의 활동이 새로운 연대와 다양한 유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남녀가 만나서 맺어지는 것과 같은 결연 관계에 그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리좀은 새로운 타자, 새로운 사건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지요.

 

그런데 들뢰즈의 이야기에서 조금 어려운 대목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나무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는 대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프랑스 지식인들 특유의 현란한 문체에 너무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물론 두 분이 서로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두 분은 우연히 만났고, 두 분의 사랑을 통해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서 수정체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이루어냈죠. 물론 정자와 난자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특정한 친구와 우정을 맺은 적이 있지요? 물론 그 친구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군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이 경우도 여러분은 사랑하는 상대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발적인 만남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여러분은 바로 현재의 여러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런 무한한 만남을 들뢰즈는 ………………라는 접속사, 즉 프랑스 말 ‘et’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런 예기치 않았던 사건과의 마주침, 즉 우발적인 만님의 결과물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나는 이러저러한 존재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온다고 해서 두 사건 사이에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존재란 확고 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 그리고 저 자신은 무한한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 ‘………………로 설명될 수 있는 우연한 만남의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입니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만남과 사건으로 여러분의 삶이 수놓아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과의 만남도 그리고 저와의 만남도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저의 바람이기도 하구요. 여러분과 저와의 만남!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또 다른 변신!

 

 

 

 

더 읽을 책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서관모 · 백승욱 옮김, 서울: 동문선, 1997)

저자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도전적인 논문을 쓴 다음 이 논문에 대해 나바로(F, Navarro)라는 멕시코 철학자와 진지한 토론을 하는데, 이 책은 이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우발성의 유물론이 어떤 철학적 의의를 가지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서울: 문학과지성사, 2000)

현대철학의 쟁점이 차이와 타자라는 두 범주에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들뢰즈의 철학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서 어떤 고유성을 지니는지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들뢰즈가 강조했던 철학의 두 가지 이미지에 대한 매우 친절하고 문학적인 설명이 돋보입니다.

 

 

다니엘 벤사이드, 저항(김은주 옮김, 서울: 이후, 2003)

알튀세르, 데리다, 네그리 등 위대한 현대철학자들이 결국 두더지로 상징되는 저항의 철학 형식을 만들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단순히 현대철학자들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역사사이의 관계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끈덕진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 들뢰즈-존재의 함성(박정태 옮김, 서울: 이학사, 2001)

사건과 우발성을 사유하는 가장 뛰어난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의 도전적인 들뢰즈 연구서입니다. 들뢰즈 역시 사건과 우발성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바디우가 들뢰즈를 비판하는 이유는, 들뢰즈의 사유 체계 안에는 그 스스로 비판했던 필연성의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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