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선전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 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고립되어서는 자족적일 수 없으므로 전체에 모두 같이 의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국가만이 자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 결사의 혜택을 타인과 더불어 누릴 수 없거나 혹은 이미 자족해 있으므로 국가의 일부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신일 것이다.
『정치학(Politica)』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사유했던 걸까요? 이것은 그가 국가를 하나의 낯선 탐구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물음과 같습니다. 그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가 국가를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국가를 절대화하거나 혹은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그는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가를 벗어난 고립된 개인은 짐승이 아니라면 신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이 될 수 없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국가를 떠나서는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이지요. 짐승은 분명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도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야만이 아닐까요?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립된 개인은 사실 야만의 세계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문명의 세계로 상승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가장 지독한 야만의 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벗어나려는 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이 아닌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대해 진정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지 자명한 것으로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1908~1991)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국가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3000년 내지는 4000년 전부터 지중해 동쪽, 중국, 아메리카 등지에서 문자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그 이전에는 아주 오랫동안 국가가 없는 사회도 충분히 있었던 셈이지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국가를 최상의 목적인 것처럼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와 차이라는 문제를 숙고하고 있는 현대 일본의 탁월한 사상가이다. 부러운 것은 그가 숙고하고 있는 타자와 차이의 문제가, 서양의 데리다나 들뢰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이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그는 어떻게 하면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 즉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사회를 구성할 것인지를 이론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트랜스크리틱』, 『일본정신의 기원』 등이 있다】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유형의 교환은 강탈하는 것이다. 하여튼 교환하기보다는 강탈하는 편이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것을 교환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年貢)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적으로 국가는 초계급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표상된다. 예컨대 유교가 그러한데, 치세자(治世者)의 ‘덕(德)’이 설파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탈과 재분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관계로 숙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해 힘의 우월성을 확보한 것, 그리고 약탈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해 재분배를 작동시키는 폭력적 기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의 교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은혜와 보호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거둬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서는 마치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주종 관계는 분명히 등가교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도 말이지요. 세금을 낼 때 피통치자는 자신이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대가를 동등하게 지불할 뿐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서비스를 받으면 팁을 내는 손님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피통치자가 보호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흔히 조세저항이라고 말하지요. 예전이라면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현재도 국가는 법의 권력을 통해 그 대가를 톡톡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루소【루소는 제네바의 칼뱅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상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자였다. 자연 상태와 자연인이라는 가설적 테마를 통해서,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통찰했으며, 또한 이런 이기적 본성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정치와 사회를 숙고하기 위해서, 현재 그 누구도 루소를 우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요 제서로 『에밀』,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등이 있다】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é parmi les hommes)』
중요한 것은 통치자가 이미 피통치자가 자신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로부터 국가의 교환 논리는 기본적으로는 우월한 힘을 가진 통치자와 그렇지 못한 피통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이 됩니다. 다만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가 국가의 교환 논리가 수반하는 피통치자의 환상(illusion) 혹은 전도된 의식에 대해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통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피통치자가 부등가교환을 등가교환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요. 사실 국가가 피통치자에게 재화를 재분배하거나 혹은 관개 사업 등의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실 더 효율적으로 구성원을 수탈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은 박정희의 독재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그는 경제개발을 해서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독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통치자, 즉 우리의 착각일 뿐이지요.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옳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 통치를 영구히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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