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을 우선적인 보호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보호하는 일차적인 대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국가는 자신의 보호 대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국가의 일차적인 보호 대상에서 농민은 제외되고, 오히려 자본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공공사업의 대부분이 농민을 위한 사업, 예를 들면 토지 정비와 농법 개선, 혹은 관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산업자본주의경제 하에서 대부분의 공공사업은, 산업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유리하도록 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이제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결합됩니다. 이 말은 결국 국가가 수탈과 재분배의 대상을 농민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사회가 붕괴된 이유를 흔히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인자본의 발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봉건적 토대가 무너지고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이유는, 절대 국가(absolutist state)【절대 국가는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가 가졌던 세속적 권력이 군주에게로 이행되면서 출현한 국가 형식이다. 이러한 절대 국가는 왕권신수설과 중상주의를 토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만으로는 절대 국가가 현실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군주는 피통치자에게 복종의 대가를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원 마련을 위해서 무역이나 상업을 장려했고, 이것이 중상주의가 대두된 중요한 이유였다】가 상인자본을 보다 유력한 세금 공급원으로 보고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절대 국가가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상인자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봉건적 사회 체계가 과연 붕괴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절대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성장한 상인자본이 비약적인 과학의 발전을 등에 업고 이제 산업자본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농업생산력이 결코 미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낳게 해주는 상인자본 그리고 무한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 창출 능력을 국가가 새로운 수탈 대상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는 재분배의 대상, 즉 보호와 육성의 대상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본가와 임금노동자가 농민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즉 ‘농사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다’라는 국가의 슬로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자유무역협정(FTA)은 국가 간의 상품의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을 말한다. 이것은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 간에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통일된 자본주의 시장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협정을 맺은 두 국가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북중미 경제블록, 유럽의 경제블록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비준과정이나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농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구의 국회의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정부와 국회뿐만 아니라 언론까지도 산업자본 편을 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요?
흔히들 지금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취지를, 자본의 세계적 흐름을 방해하는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자유롭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윌리엄 탭(William K. Tabb, 1942~)【윌리엄 탭은 퀸스칼리지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인데,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계화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부도덕한 코끼리』, 『전후 일본 체제』, 『정치경제의 구조 조정』 등이 있다】의 생각은 이들의 생각과 확연히 다릅니다. 『부도덕한 코끼리(The Amoral Elephant)』【『부도덕한 코끼리』는 국내에 『반세계화의 논리』(이강국 옮김, 서울: 월간 말,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1세기 세계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논쟁과 투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옮긴이는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이 책을 통해서 세계화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얻기를 바라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거센 지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전망을 꿈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에 실려 있는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썼듯이,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혁명하고 따라서 전체 사회관계도 혁명한다.’ 그 글에서 그들이 정확하게 묘사했듯이 세계화는 지리적 확장을 통해 값싼 임금노동자를 찾는 과정이다. (……) 시애틀과 다른 여러 곳의 시위에서 시위대의 분노는, 세계적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복무하는 WTO와 같은 국제기구에 주로 맞추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경제에서 국가를 무능력한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가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적인(social democratic)’, ‘국민적 케인즈주의(National Keynesiansim)’【국민적 케인즈주의는 규제받지 않는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결국 대공황이란 사태를 발생시키자, 국민적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를 통해서 공평하고 안정된 성장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케인즈주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하나의 낡은 경제 이념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는, 이제 ‘세계적 신자유주의(Global Neo-liberalism)’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산업자본이 남기는 이윤은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화폐량과 제품을 팔아서 생긴 화폐량 사이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10만 원이고 그것을 팔아서 얻는 값이 12만 원이라면, 이 산업자본은 2만원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폐쇄된 지역 경제에만 머물게 되면, 산업자본은 이윤율이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가 이미 소비자에게 충분히 공급되었다면, 이전처럼 높은 가격에 휴대전화가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물론 기술혁신과 조직 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이윤율의 하락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임금이 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제품의 희소성이 높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산업자본은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하는 어려움 없이 아주 쉽게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화로의 충동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선진 산업자본, 즉 다국적기업(muli-national enterprise)이 많은 미국의 경우 이들의 세계화로의 충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권장해야만 합니다. 그들로부터 미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미국이란 국가의 역할은 압도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의 관세장벽을 부수는 것에 모아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다른 국가에서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가한다면, 이 기업들의 이윤은 현저히 줄어들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 대두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FTA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미국이 FTA에 참여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은 당연한데, 우리나라는 이로부터 어떤 이윤을 얻게 될까요? 그것은 FTA를 통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몇몇 거대 산업자본으로부터 국가가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FTA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국가기구와 몇몇 거대 산업자본을 제외한 나머지 시민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전혀 보호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국가는 오직 자신의 주요 세금원인 거대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만을 보호해주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윌리엄 탭의 지적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국가 권력은 약해졌다기보다는, 시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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