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인
그와 관련해 『과정록過庭錄』 4권에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만년에 면천군수를 지내던 시절, 성 동문에 올라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眼界稍豁, 可以盪胸]”하며, 밤늦도록 달구경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귀신이 그 동리의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귀신이 그 여자를 통해 말하기를,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 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고 했다.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인을 남편이 붙들어다 관아 문밖에 데려다 놓았는데, 관아의 업무가 시작되어 일을 집행하는 연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자 놀라 울부 짖으며 달아났다. 그 이후 병이 싹 나았음은 물론이다.
귀신을 질리게 할 정도의 ‘양기(陽氣)’라?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시대와 불화한 지식인들이 숙명처럼 끌고 다니는 어두운 그림자가 전혀 없다. 그는 고독함조차도 밝고 경쾌하게 변화시킨다.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
雨雨三晝, 可憐弼雲繁杏, 銷作紅泥.
긴긴 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오(五)를 부르고 백(百)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永日悄坐, 獨弄雙陸, 右手爲甲, 左手爲乙, 而呼五呼百之際, 猶有物我之間, 勝負關心, 翻成對頭.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焉歟.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而吾於彼, 亦可謂造物者, 猶不勝私, 扶抑如此?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남수에게 답함[答南壽]」
昨日之雨, 杏雖衰落, 桃則夭好. 吾又未知, 彼大造物者, 扶桃抑杏, 亦有所私於彼者歟.
여기에 담긴 심오한 철학적 내용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그저 비가 주룩주룩 오는 봄날,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양손을 갑과 을로 나누어 ‘쌍륙놀이’를 하는 광경만을 떠올려보자. 게다가 승부에 집착하여 한쪽 손을 편들 정도로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유쾌해지지 않는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불평지기와 고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빛나는 명랑성!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는 태양인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타고난 바탕은 막힘이 없이 통하는[疏通] 장점이 있고, 재주와 국량은 교우(交遇)에 능하다.”
이 구절은 기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연암의 기질과 일치한다. 그는 진정 지식과 일상, 글쓰기에서 막힘이 없었으며, 우정이 지상목표였을 정도로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했다. 물론 태양인은 한 고을의 인구를 1,000으로 잡을 때 불과 3~4명에서 10명에 불과할 정도로 드문 체질이다. 그것은 그만큼 세상을 평탄하게 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암이 바로 그러했다. 화통하여 막힘이 없었지만, 위선적이거나 명리를 따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컨대 그는 담소를 좋아하여 누구하고나 격의없이 며칠이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말 중간에 끼여들기라도 하면 그만 기분이 상해 하루 종일 그 사람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도 이런 기질을 잘 알아서, “이것은 내 기질에서 연유하는 병통이라 고쳐보려고 한 지 오래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다. 내가 일생 동안 험난한 일을 많이 겪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此吾氣質之病, 矯揉之久, 終莫能改. 一生備經險巇, 未嘗不由於此](『과정록過庭錄』 3권에)”고 토로하기도 했다. 스스로 질병이라 여길 정도의 이 ‘투명한 열정’이 그의 삶을 계속 주류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리라. 하지만 그로 하여금 인식과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추동한 힘 역시 바로 그 투명한 열정의 소산일 터, 이 또한 생의 역설이라면 역설인 셈이다.
▲ 신윤복 그림 「쌍륙: 쌍륙삼매(雙六三昧)」
한량으로 보이는 선비들이 기생들과 쌍륙놀이에 빠져 있다. 쌍륙놀이란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두 편이 15개씩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던져나온 숫자의 합만큼 말을 움직여서 자신의 모든 말을 판 밖으로 내보내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조선시대 때 특히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 식민지 시기에 화투에 밀려 사라졌다고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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