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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유목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유목

건방진방랑자 2021. 7. 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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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거기일 터, 아포리즘(aphorizm)만큼 유목의 성격에 대해 잘 말해주는 것도 드물다.

 

열하일기를 만난 뒤,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이제서야 이 텍스트를 접하게 된 것일까?’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내가 받은 교육과정 어디에도 열하일기를 통째로 읽는 코스는 없었다는 것. 이유는 간단했다. 문학이라는 척도에 의해 열하일기가 낱낱이 해부되었기 때문이다.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같은 소설적 텍스트거나, 혹은 상기(象記)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같은 명문(名文) 등으로 분해되어 파편적으로만 학습되었던 것이다. 열하일기라는 대양(大洋)이 아니라, 중간에 언뜻언뜻 보이는 산호초들만을 완상한 셈이었다고나 할까. ‘문학이라는 제도는 그토록 허망한 것이다. 유목을 허용하지 않는 정착민의 말뚝!

 

열하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모든 여행기는 그렇게 쓰여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탐욕적으로 여행기의 고전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동방견문록을 비롯하여 걸리버 여행기, 이븐 바투타 여행기, 돈키호테, 을병연행록등등,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열하일기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모두 여행에 관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국적 풍광과 습속을 나열하거나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스토리를 엮어가거나, 기념비와 사적들, 사람들의 이름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거나. 무엇보다 거기에는 유머가 없었다. 이븐 바투타의 지리한 언설은 정말, 끔찍할 지경이었다. 사람 이름은 또 왜 그렇게 긴지(보통이 한 줄, 심한 건 서너 줄인 경우도 있었다)! 돈키호테조차도 열하일기에 비하면 따분한 편에 속한다. 결국 형식이 어떻든 그 텍스트들은 스쳐 지나가는 외부자의 파노라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행기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카프카라면 아마 이런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전문

 

 

박차와 고삐, 말모가지와 말대가리의 경계가 없는 인디언의 말달리기, 인디언과 말, 그리고 광야의 경계조차 사라진 고요한 질주’!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강렬한 액션의 흐름뿐이다. 그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아니,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열하일기는 바로 그런 유목적 텍스트다. 그것은 여행의 기록이지만, 거기에 담긴 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찐한접속이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견의 현장이며,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경이의 장이다. 게다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다채로움은 또 어떤가. 때론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한가 하면, 때론 장중하고, 또 때론 한없이 애수에 젖어들게 하는, 말하자면 멜로디의 수많은 변주가 일어나는 텍스트, 그것이 열하일기.

 

따라서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omad)’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그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좀더 많은 벗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여정마다에서 새로운 마주침들이 일어나기를! 그 마주침 자체가 또 하나의 유목이 될 수 있기를!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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