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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건방진방랑자 2021. 7. 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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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회우기(會友記)를 보냅니다. 제가 평상시 중원을 대단히 흠모해왔지만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는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는 얼굴 씻는 것을 잊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느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 땅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이고 서호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활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里數)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며 수천 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중원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중략)

 

담헌 홍대용(洪大容) 선생이 하루아침에 저 천애(天涯) 먼 곳에서 지기를 맺어 그 풍류와 문묵이 멋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권 사람들은 모두 풍모가 의연하여 지난날 서책에서 본 듯한 인물이고, 주고받은 말은 모두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담겨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저분들이 비록 이 조선과 천리 멀리 떨어져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가 저분들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감격하여 울면서 의기투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제가(朴齊家), 회우기여서관헌상수(會友記與徐觀軒常修)

 

 

회우기는 홍대용이 연경에서 절강성 출신 선비 세 명과 나눈 필담을 정리한 것이다. 박제가는 그것을 본 소감을 감격어린 어조에 실어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이라는 편협한 땅에 대한 한탄, 당시 조선인들의 고루한 풍토에 대한 신랄한 냉소, 국경을 넘는 우정과 교류에 대한 열망 등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여기 담긴 생각이 어찌 박제가만의 것일까. 연암 또한 그러했다. 더구나 앞서 연행을 체험한 벗들로부터 청문명의 번화함을 전해들었던 연암으로서는 중원에 대한 동경이 더할 나위 없이 무르익던 터였다. 그런 연암에게 마흔넷, 생의 한 고비를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침내 중원 천하에 발을 디딜 기회가 주어졌다.

 

홍국영(洪國榮)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화근은 사라졌지만 옛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박제가(朴齊家)의 표현을 빌리면, ‘풍류는 지난날에 비해 줄어들고, 얼굴빛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으니, ‘벗과의 교유도 참으로 피할 수 없는 성쇠(盛衰)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위기는 해소되었지만, 쓸쓸한 귀환이었던 셈.

 

 

열하로의 여행은 이런 그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행운이었다. 1780,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고 있던 차, 삼종형 박명원(朴明源)건륭황제(乾隆皇帝)의 만수절(70)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1780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고, 곧이어 열하로 갔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게 되는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인조 15(1637) 이후 조선조 말에 이르는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사행(使行)이 청국을 다녀왔고, 그 결과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연행록이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연행 붐이 일었던 것이다.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북경을 휘젓고 다니는 요즘과 단순 대비하기란 어렵겠지만, 어떻든 중국대륙에 대한 꿈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연행 붐이 일긴 했지만, 사행단의 기본 관점은 어디까지나 북벌론(北伐論)’에 입각해 있었다. 청나라는 만주족 오랑캐이고, 병자호란의 수치를 안겨준 원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북벌론의 핵심요지다. 명의 멸망으로 이제 진정한 중화문명은 조선으로 옮겨왔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와 효종 이후 북벌론은 소중화주의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청을 향하기보다 내부를 향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이것을 묵수하는 한, 청문명을 직접 접한다 해도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사상사적 모색이 감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북벌이라는 견고한 요새에 균열을 일으키고, 북학으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이끈 것은 바로 연암그룹에 의한 연행록 시리즈였다. 김창업의 연행일기를 비롯하여 홍대용(洪大容)담헌연기(湛軒燕記, 한글판은 을병연행록건정동필담(회우록)이 나왔고, 뒤이어 1778년 중국을 다녀온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에 의해 각각 입연기(入燕記)북학의(北學議)가 제출된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연행록은 아니지만, 북학의 논리와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계열에서 주요한 위상을 점한다. 이 일련의 시리즈는 분명 기존의 연행록의 지평에서 벗어난 새로운 계열이다. 이 계열은 청문명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소중화(小中華)라는 도그마에 찌든 당대 지성사에 북학의 호흡을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암 역시 이러한 무드속에서 중원에 대한 꿈을 고양해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연암의 연행기는 이 이질적인 계열 내에서도 또 하나의 변종이다. 열하일기는 그 무엇에 견주기 어려운 지층들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연행은 여행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었다.

 

 

▲ 「연행도(숭실대 박물관 소장)

조선 연행사들이 북경을 향해 출정하는 모습. 당시 청나라는 세계제국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연행은 단지 의례적인 외교행사에 그치지 않고, 선진문명을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했다. 행차가 거창해 보이기는 하나, 사실 이들의 앞날엔 고생문이 훤하다. 대략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행록 한편 한편에는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어드벤처와 서스펜스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연암은 비공식 수행원이었던 만큼 아마 이 행차의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따라갔을 것이다. 애마(!)를 타고 장복이와 창대, ‘환상의 고지식 커플과 함께.

 

 

웬 열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전의 중국 기행문은 모두 연기(燕記),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린다. 유독 박지원의 것만이 열하일기라는 좀 괴상한(?)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연행록이 아니고 열하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열하? 그러고 보면 이 이름은 또 얼마나 낯선지. 중국기행이 국내여행보다 흔해빠진 요즘에도 열하를 여행 코스로 삼는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열하는 여전히 낯설고도 이질적인 공간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열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한 것. 이곳은 한족과 이민족 간의 격전지로 유명한, 장성 밖 요해의 땅이자 천하의 두뇌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황제의 열하행은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壓腦而坐, 扼蒙古之咽喉而已矣]”는 고도의 정치적 포석의 일환이었다. 건륭황제의 치세에 이르러 국경도시로서 융성번화의 극치를 달렸던바, 황제는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불리는 장대한 별궁을 지어놓고는 매년 순행하여 장기 체류하곤 했다.

 

열하는 애초의 일정에 없던 것이었다. 목적지는 연경이었는데, 마침 황제가 피서산장인 열하에 있으면서 조선 사행단을 급히 열하로 불러들이는 돌발적 사태가 벌어진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간신히 연경에 도착하여 겨우 숨을 돌리는 순간, 느닷없이 열하로 떠나야 했으니(그날의 해프닝은 3부의 2절을 기대하시라!), 연암은 조선사람으로서는 처음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만수절 행사에 모여든 온갖 이민족들 몽고, 이슬람, 티베트 등의 기이한 행렬을 목격하게 된다. 요컨대 열하는 이질적인 것들이 도가니처럼 뒤섞이는 특이한 장이었다. 그가 그 장대한 여정을 열하라는 이름으로 압축한 것도 바로 그 점에 착안한 것이었으리라. 변방의 외부자 연암, 만주족 오랑캐가 통치하는 중화, 그리고 열하라는 낯선 공간 ―― 『열하일기는 이 상이한 계열들이 접속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주름이다.

 

 

성군(聖君) 트리오

청나라, 아니 중국사가 낳은 최고의 황제 트리오’, 오른쪽 위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각각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제위순 역시 그와 같다. 연암의 열하행은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 가운데서도 강희제는 지략, 경륜, 학문 등 다방면에서 막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왕중왕이고, 옹정제는 변방의 하급관리까지 일일이 체크할 정도로 치밀하고 성실한 군주로 유명하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하다 과로사로 쓰러진 드문 케이스다. 그 둘에 비하면 좀 급이 떨이지기는 하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덕에 힘입어 건륭제 역시 청나라를 세계제국의 중심으로 이끌어갔다. 연암이 만날 당시에는 총명과 위엄은 여전한데, 마음의 평정을 잃어 노쇠의 기미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소문의 회오리

 

 

연암은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3년여에 걸쳐 열하일기를 퇴고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초고가 나돌아 문인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여기 열하일기를 말할 때면 언제나 따라다니는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뛰어난 문인이자 고위관료였던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에 실린 삽화.

 

 

내 일찍이 연암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에 모였을 적에, 이덕무와 박제가(朴齊家)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과 차수(次修) 박제가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이제부터 고문이 진흥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한다. 연암이 취한 어조로, “네가 무엇을 안단 말이야하고는, 다시금 계속했다. 산여 역시 취한 기분에 촛불을 잡고 그 초고를 불살라버리려 하였다. 나는 급히 만류하였다.

余嘗從燕巖朴美仲, 會山如碧梧桐亭館, 靑莊李懋官貞蕤朴次修皆在. 時夜月明, 燕巖曼聲讀其所自著熱河記, 懋官次修環坐聽之. 山如謂燕巖曰: “先生文章雖工好, 稗官奇書, 恐自此古文不興.” 燕巖醉曰: “汝何知?” 復讀如故. 山如時亦醉, 欲執座傍燭焚其藁. 余急挽而止.

 

 

이것이 그 유명한 촛불사건의 전모다. 보시다시피 열하일기가 불태워질뻔한 건 국가제도나 정적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연암 주변인물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권력은 늘 인접한 곳에서 작동한다고 한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의 말이 환기되는 대목이다.

 

더 재미있는 건 그 다음 대목이다. 연암은 짐짓 삐친척 몸을 돌이킨 채 일어나지 않는다. 이덕무(李德懋)가 거미 그림을 그리고, 박제가(朴齊家)가 병풍에 초서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쓰자, 남공철이 연암에게 이 글씨와 그림이 극히 묘하니, 연암이 마땅히 그 밑에 발을 써서 삼절(三絶)이 되게 하시라며 달래주었으나, 연암은 끝내 못 들은 체한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서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고서는 산여야, 이 앞으로 오라. 내 이 세상에 불우한 지 오래라, 문장을 빌려 불평을 토로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내 어찌 이를 기뻐서 하겠느냐. 산여와 원평(元年, 남공철) 같은 이는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문장을 공부하더라도 아예 나를 본받지 말고 정학(正學)을 진흥시킴으로써 임무를 삼아, 다른 날 국가에 쓸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이제 마땅히 제군을 위해서 벌을 받으련다[山如來前. 吾窮於世久矣, 欲借文章, 一瀉出傀儡不平之氣, 恣其游戲爾. 豈樂爲哉? 山如元平, 俱少年美姿質, 爲文愼勿學吾, 以興起正學爲己任. 爲他日, 王朝黼黻之臣也. 吾當爲諸君受罰]’하고는 커다란 술잔을 기울여 마신 뒤, 다른 이들에게도 마시게 하여 호탕하게 풀어버린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문장을 내려놓아버리는 이 장면은 분위기가 사뭇 비감하다. 그것은 언표 그대로의 진실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나는 아예 외부자로 살아가겠노라는 단호한 선언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지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데 대한 원망과 억울함이 어찌 없었을까마는 연암은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는 건 가는 길이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지 않는가. 아마도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지.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촛불사건은 사실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열하일기는 언제나 소문의 회오리를 몰고 다닌다. ‘오랑캐의 연호를 썼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유희했다’, ‘패관기서로 고문을 망쳐버렸다등등. 그 하이라이트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웬만큼 세상의 시시비비에 단련된 연암도 이렇게 한탄했을 정도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이야 난들 어떡하겠느냐?” 한마디로 한치의 명성이 높아지면, 비방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는 역비례 현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열하일기를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게 했던 것일까?

 

분명 열하일기문제적인텍스트다. 어떤 방향에서건 사람들을 자극할 요소들을 무한히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악의적 비방이든 애정어린 비판이든 열하일기의 진면목을 본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대개 풍속이 다름에 따라 보고 듣는 게 낯설었으므로 인정물태(人情物態)를 곡진히 묘사하려다보니 부득불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거나,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이 책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대개 기이한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써놓은 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식의 평가만해도 그렇다. 상당히 우호적임에도 열하일기에센스인 유머와 해학을 서술의 곁다리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특장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열하일기가 당대 지식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무수한 흐름이 중첩되는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구성할 수 있는 도저한 열정. ‘산천,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 등등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더욱이 그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윤색인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연암 자신이 도처에서 밝히고 있듯이, 모험에 찬 여정 속에서 기억과 기록이 많은 부분 사라지거나 희미해졌을 뿐 아니라, 도저히 한 사람의 관찰과 기억이라고 보기 어려운 내용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는 까닭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질(虎叱)이다. 연암은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한 점포의 벽에 붙은 기문(奇文)’을 일행인 정군과 함께 베꼈는 데, “사관에 돌아와 불을 밝히고 다시 훑어 본즉,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곳이 수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서 전혀 맥이 닿지 않으므로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해서 한 편을 만들었다[及還寓, 點燈閱視, 鄭之所謄, 無數誤書, 漏落字句, 全不成文理. 故略以己意點綴爲篇焉]”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텍스트 중에서 대체 어디까지가 정군이 베낀 것이며, 어디까지가 연암의 윤색이란 말인가(Nobody knows!).

 

어디 호질(虎叱)만 그럴까. 양매시화(楊梅詩話)에서는 필담했던 초고 가운데 겨우 10분의 3, 4만이 남았는데, 더러는 술취한 뒤에 이룩된 난초’, ‘저무는 햇빛에 달린 필적이었다니, 이쯤 되면 사실과 허구를 분별하기란 요원할 터, 아니 이 마당에 분별 자체가 무의미하다. 게다가 수많은 판본이 떠돌면서 윤색이 가해졌던바, 그야말로 열하일기는 미완의 텍스트인 것. 물론 이때 미완성이란 결여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계속 거부하는, 그리하여 수많은 의미들을 생성해낸다는 의미에서의 그것이다. 열하일기를 둘러싼 무성한 스캔들은 그 의미들이 좌충우돌하면서 일으킨 사소한’(!) 잡음에 불과하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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