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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편력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편력

건방진방랑자 2021. 7. 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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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력(遍歷)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 20대 시절, 내 사주에는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있다고 어떤 얼치기 점쟁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이후의 내 삶의 여정을 보면 편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의(偏倚) 이른바 클리나멘(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의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도 이런 우발적인 편의들을 통해서였다.

 

대학시절, 나름대로 독일 문학에 심취했던 내가 한국 고전문학을 택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졸업반 무렵, 당시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흥규 선생님의 강의를 신청했는데, 그게 현대비평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고전소설 강독이었다. 강의 변경을 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들었는데, 그때 얼떨결에 춘향전,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인생행로가 급선회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원전으로 읽은 고전들은 기묘한 울림으로 내 신체에 육박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안내자의 인도로 인해 더한층 증폭되었다. 고전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아니면 논리와 열정으로 가득찬 교수법에 대한 감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지적 욕망은 한국 고전문학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첫번째 클리나멘(clinamen).

 

전공 기초지식은 물론이고 한문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도 없이 고전문학을 택한 나는 무식의 용맹함 말고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선배들의 멸시천대’(?) 속에서 고전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짧고 쉬운 시조(時調)’로 석사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곁다리로 하는 말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쓴 글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석사논문을 들 것이다. 당시는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시대였는데, 그때 소모된 원고지를 쌓아 놓는다면 아마도 족히 한 리어카는 될 것이다. 수없이 고쳐 쓴 뒤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가차없는 교정 지시가 내려지고, 또 다시 고쳐 쓴 뒤 지도교수에게 보이면 완전히 씨뻘건 피바다 (빨간 볼펜으로 교정을 했기 때문)가 되어 되돌아왔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당시 나는 돈도 없었고, 연애도 제대로 안 되는 한심한 청춘이었지만, 그런 건 정말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건 오직 글쓰기에 대한 욕망뿐이었다. 멋진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뜨거운 한철을 통과했다. 물론 그렇게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석사논문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건이 되었을 뿐이다. 워낙 밑바닥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쓰기까지 겪은 수련과정은 이후 내 지적 편력의 불멸의 초석이 되었다. 지식이란 그렇게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사이를 넘나드는 흐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운 기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식의 지적 풍토가 있었다는 것이 내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지. 안타깝게도 이후 그런 행운을 누렸다는 풍문을 누구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황폐함 같은 흉흉한 담론이 떠돌 때면, 내게는 늘 석사논문을 쓰던 그 화려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쨌든 이런 경로를 거쳐 박사과정에 들어가 고전문학 풍토에 좀 익숙해지려는 순간, 이번에는 맑스주의라는 회오리에 휩쓸리게 되었다. 876월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투쟁이 거세지면서 대학원에도 맑스주의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운동권에서는 이미 입문의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 노선을 둘러싸고 온갖 정파로 분화되고 있었건만, 고전문학이라는 변방(!)의 연구자들에게까지 물결이 몰아친 건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거리에 나선 이후였다. 물론 당시 내 나이도 20대 후반, 청춘의 막바지에 들어섰으니 이래저래 뒷북치는 꼴을 면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그러나 늦바람이 무섭다고, ‘늦깎이로 읽기 시작한 공산당선언, 독일이데올로기, 프랑스혁명사 3부작에 나는 한마디로 번개를 맞은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변증법유물론을 통해 그때까지 희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삶과 사유의 추상성이 한방에 날아가버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맑스의 수사학은 환희그 자체였다.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고 전투적인 내용을 그토록 선정적(?)이고 생기발랄한 언어로 구성할 수 있다니! 석사논문을 쓴 이후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 전면적으로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클리나멘(clinamen).

 

이후 박사과정 내내 맑스주의는 내게 있어 세계관과 방법론의 토대이자 구심점이었다. 사설시조(辭說時調), 19세기 대중시조, 잡가(雜歌)건 나는 고전문학을 맑스주의와 결합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투쟁이었고, 동시에 나의 삶과 지식이 변혁운동에 동참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했다(솔직히 나는 당시에 벌어진 노선투쟁에 대해 지금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쪽 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한참 지나고 보면 다른 쪽 줄에 서 있는 적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후미에서 근근히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시조를 예술사적 흐름 속에서 조망한 박사논문은 그런 안간힘의 최종 결정판이었다. 고전문학에 대한 열정과 맑스에 대한 사랑, 박사논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마 이쯤 되지 않을지. 박사논문은 어떻게 썼냐고? 아주 쉽게(!) 썼다. 그 사이에 컴퓨터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다, 고전문학계에서 좌충우돌하며 쌓은 연륜도 있어 특별한 수난없이 통과했다. 그래서 석사 시절에 겪은 피바다가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박사논문을 쓴 뒤, 나는 마침내 황량한 광야에 섰다. 소속도 지위도 없는 30대 후반의 박사 실업자로, 이미 맑스는 유행 저편으로 밀려났고, 혁명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터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서태지와 모래시계에 열광하는 한편, 몇몇 구좌파(?) 동료들과 자본을 한 구절 한 구절 낭독하고,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원텍스트와 함께 읽어가던 도중, 푸코와 들뢰즈/가타리, 이른바 68혁명 이후의 철학자들과 접속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세번째 클리나멘(clinamen).

 

 

그들’(!)과의 만남 이후 나는 그간 철의 강령처럼 지니고 다녔던 근대, 민중, 민족이라는 척도를 놓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문학이라는 척도까지.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근대주의라는 목적론의 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그 필드(field)’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뼈아프게 확인해야 했다.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편력이 시작되었다. ‘탈 근대혹은 근대 외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게 되면서 삶과 지식 혁명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위로서 80년대를 통과한 친구들을 만나 집합적 관계를 구성하면서 분과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을 감행하게 된 것. 80년대에 혁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은 나의 지식과 일상 곳곳에서 살아 숨쉬는 과 같은 존재였다. 그 이후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라는, 좀 길지만 아무 데서나 끊어 읽어도 무방한 이름을 가진 지식공동체가 내 삶의 거처가 되었다. 처음 수유리에서 시작하여 지금 대학로 한복판에 오기까지 나는 이 필드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온갖 지식의 향연에 참여하였다. ‘세계는 넓고 공부할 건 정말 많구나!’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게 그동안 내가 터득한 삶의 지혜다(이후 수많은 변전을 거쳐 지금은 <남산강학원감이당>이 내 활동의 거처가 되었다).

 

그 인연조건에 의해 2001년 봄 마침내 열하일기를 만났다! 당시 연구실 멤버들이 문학계간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창간호에 동서양의 외부자들을 다루는 특집을 꾸미게 되었다. 카프카, 루쉰, 이상, 박지원 등 한 시대를 주름잡은 거물급(?) 작가들이 선정되었다. 그런데 순전히 고전문학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박지원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로 배치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일 터, 그런 점에서 나와 박지원의 만남은 연구실의 지적 실험과 집합적 관계에 의해 벌어진 일대사건이었다.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 짝이 없다. 고전문학 연구자이면서, 그것도 18세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내가 정작 학교에 몸담고 학위논문을 쓸 때는 읽을 필요도, 엄두도 내지 않고 방치했던 그 텍스트를 긴 우회로를 거쳐 만나게 되다니! ‘운명적인 해후!’

 

그렇게 외적 강압(?)에 의해 집어든 열하일기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어떤 텍스트하고도 견주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동안 내가 학습한 표상체계로는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일종의 기계였다. 거기에 담긴 것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이었다. 파노라마적 관광도 아니고,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도 아닌, 마주치는 것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적 편력,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여행이라는 이름으로도, 편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오직 유목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인용

목차 / 박지원

열하일기 / 문체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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